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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성 고기의 모든 것

MEAT EVERYTHING YOU NEED TO KNOW 1

by Meat marketer 2025.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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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토요일 자정 무렵, 나는 양복을 입고 아내 제니퍼와 함께 링컨 타운카 뒷좌석에 앉아 아들의 학교 기금 마련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때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브루클린 프로스펙트 파크에서 열린 대형 육류 음식 축제의 조직자였다. 이틀 동안 열리는 행사 중 첫날이었고, 그는 지금 행사장에 음식이 바닥났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음식이 부족한 바람에 낮에 폭동까지 발생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닭가슴살 하나를 두고 꼬치로 서로 찌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지금 그 조직자는 뉴욕 경찰과 함께 있었는데, 싸움 때문에 경찰이 개입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음식 공급을 보장하지 않으면 다음 날 행사를 열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나는 정육점 주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가족이 운영하는 정육회사를 이끌고 있다. 나와 아버지, 그리고 사촌 마크 파스토레가 함께 운영하는 이 회사는 내 증조부가 100년 전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는 그리니치빌리지에 있는 수많은 소규모 정육점 중 하나였고, 대부분 우리처럼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작은 몫이라도 차지하려고 경쟁했다. 그 시절 우리 회사는 인근의 20~30개 정도의 소규모 식당에 고기를 납품했다. 지금 우리는 뉴욕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1,200곳이 넘는 식당에 미국 최고의 고기를 공급한다.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 우유로 키운 송아지고기, 콜로라도산 양고기, 맞춤형 다진 고기 혼합물까지 다양한 고기를 취급한다.

이번 축제에 참여하는 고객들을 위해 일주일 내내 고기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물량을 적게 주문했다. 주최 측은 주말 동안 5천에서 1만 명 정도가 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첫날에만 3만 명이 몰렸다. 그래서 경찰은 우리 라프리다 미트(LaFrieda Meats)가 충분한 고기 공급을 보장하지 않으면 행사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이런 전화를 받는 것조차 한편으로는 즐겁다. 도울 수 있겠느냐? 가능하겠느냐? 비상 상황에서도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 이런 질문은 내게 도전이자 기회다. 우리는 2003년 정전 사태 때도 고객들에게 고기를 공급했고, 허리케인 샌디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최자가 지금 내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연결해 경찰에게 내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하면 행사는 취소된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작업장은 주 6일 밤샘으로 돌아간다. 단,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는 문을 닫는다.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었다. 나는 아내를 집에 내려다주고 바로 작업장으로 향하면서 직원 몇 명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들이 나와 함께 작업장으로 나왔다. 우리는 밤새 비프립, 세인트루이스 립, 스커트 스테이크, 행어 스테이크, 닭고기류, 햄버거용 고기 등 온갖 종류의 고기를 손질하고 포장했다. 원래 계획된 대로 875파운드짜리 소 한 마리도 행사장에서 구워야 했고, 우리 직원들은 아침부터 나가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주최 측은 여기에 더해 나에게 버거 스탠드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8온스짜리 패티 4,000장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아침 8시, 나는 고기로 가득 찬 에스컬레이드를 몰고 브루클린으로 향했다. 뒤에는 또 다른 트럭이 뒤따랐다.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햄버거 패티를 반으로 나누어 8,000개 분량으로 나눴고, 소 한 마리는 2,000인분이 나왔다. 그럼에도 오후 6시가 되자 음식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행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관객들도 만족스러워했다.

행사가 끝난 후, 마크와 나는 피크닉 테이블 위에 등을 맞대고 앉았다. 둘 다 탈진한 상태였다. 마크는 하루 종일 버거를 굽느라 고생했고, 나는 2,000인분의 소고기를 빠르게 썰느라 손에 물집이 잡혔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회상하며, 행사가 얼마나 잘 끝났는지를 이야기했다. 마크는 오늘 하루 우리가 유일하게 돈을 못 벌었다며 웃었다. 사실이다. 토요일 밤에 갑작스럽게 직원을 불러 일을 시키면 비용이 많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수익이 목적이 아니었다. 오늘은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이었다. 재난 시나리오를 완벽히 실행해낸 하루였고, 내 생애 최고의 하루 중 하나였다.

물론 안다. 그냥 고기일 뿐이다. 세상을 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고기를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내 일이다. 나는 뉴욕시의 정육업자다. 이것이 바로 내 정체성이다.

 

서문

내 아버지는 내가 정육업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그리니치빌리지의 블리커 거리와 웨스트 10번가 모퉁이에 있는 1,500평방피트 크기의 식당 납품 전문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가게는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첫 번째 ‘팻 라프리다’와 함께 운영한 가업이었다. 내 할아버지 팻과 그의 형 루는 그들의 아버지이자 나의 증조부인 앤서니 라프리다에게 정육 기술을 배웠다. 앤서니는 1922년, 나폴리에서 아들 루와 함께 엘리스 아일랜드를 통해 미국에 도착한 지 13년 만에 브루클린에 소매 정육점을 열었다.

이후 뉴욕에서 고기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 식당들이 고기를 구하기 어려워졌을 때, 두 형제는 자신들의 가게를 열었다. 바로 라프리다 미트(LaFrieda Meats)의 시작이었다. 그 가게는 오늘날 미트패킹 디스트릭트(Meatpacking District)라고 불리는 14번가 고기 시장에 있는 톱밥이 깔린 공간에 있었다. 그 지역은 남쪽으로 일곱 블럭쯤 확장되어 있었고, 14번가를 경계로 하는 묘하게 생긴 44에이커의 구역에 250개가 넘는 고기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양머리를 반으로 가르는 상점들이 예쁜 자갈길과 빌리지 브라운스톤 주택가 사이에 늘어서 있었고, 그 끝은 제인 스트리트까지 이어졌다.

그 주변 비즈니스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지역이 고급 호텔과 비싼 부티크,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클럽이 들어선 동네로 바뀌기 전까지는, 특히 이른 아침 시간엔 그 지역 도로가 트럭들로 꽉 막히곤 했다. 뉴욕 시민들과 식당들이 원하는 모든 종류의 고기를 실은 트럭들이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루 삼촌 밑에서 일을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였다. 그 무렵 할아버지는 가게를 조금 더 남쪽으로 옮겨, 리틀 웨스트 12번가에 있는 2층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은 지금 하이라인 공원이지만, 당시에는 뉴욕 센트럴 철도 지선인 웨스트 사이드 라인이 들어오는 곳이었다. 1980년까지는 실제 작동하는 철도 노선이었고, 소고기, 송아지고기, 양고기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닭은 나무 상자에 담긴 채 트럭으로 오곤 했는데, 가끔은 깃털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면, 아직 몸집도 작고 어린아이였던 아버지는 고기를 사러 보내졌다. 지금의 스탠다드 하이라인 호텔 자리에 있던 기차 승강장 계단을 올라가 고기를 고르고, 무게가 200파운드에 가까운 소 4분의 1 토막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시 계단을 올라 가게로 가져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또 다른 고기를 사야 했다. 아버지 말로는, 시장 사람들이 A&P 마트에서 식료품 수레를 훔쳐 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 수레로 고기를 밀고 다녔지. 자갈길이라도 어깨에 짊어지는 것보단 나았어. 수레를 하나 구하면 목숨 걸고 지켜야 했어. 다른 사람들도 훔쳐가려고 눈독 들이고 있었거든.”

오늘날 우리는 USDA의 철저한 감독 아래 있어, 공장에 검사관이 상주할 수 있도록 그들의 근무 시간에 맞춰야 한다. 하지만 린든 존슨 대통령이 1971년 ‘건강한 육류법(Wholesome Meat Act)’을 통과시키기 전에는 정기적인 검사가 없었다. 당시에는 아버지, 할아버지, 루 삼촌 같은 정육업자들이 해야 할 일은 끝날 때까지 일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삼촌과 새벽 3시 30분에 일을 시작해 밤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어느 날 일 마치고,” 아버지가 말했다. “‘날씨 좋다. 해도 떴고. 좀 쉬어라’고 삼촌이 말했지. 기차역까지 몇 블럭 걸어갔는데, 벌써 해가 져 있었어. 삼촌이 반나절 일한 줄 알게 속인 거였지. 이미 밤이었어.”

겨울엔 너무 추워서 사람들이 닭장과 고기에서 잘라낸 기름을 금속 통에 모아 불을 피우곤 했다. 불을 쬐기 위해 긴 흰색 도살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그 불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삼촌과 함께 일하면서 고기를 고르는 법, 자르는 법, 그리고 정육업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은 한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은 정육업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처음 삼촌 따라 일하러 간 날부터 이 일은 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게 벌써 50년 전이야.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진짜 열정은 자동차였고, 실제로 자동차 관련 혁신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육업의 이면까지 꿰뚫고 있었다. 삼 남매와 서른 명의 사촌들 가운데, 가족 사업을 이어받기로 선택된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꿈을 접고, 가족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만큼은 정반대의 삶을 원했다.

나는 네 형제자매 중 장남이다. 남동생 조셉과 크리스토퍼, 여동생 미셸이 있다. 우리는 브루클린 벤슨허스트에 있는 3층짜리 3가구 주택에서 살았다. 우리 집 위층과 아래층에는 다른 가족들이 살았다. 벤슨허스트는 당시에도, 지금도 거칠고 험한 동네였다. 내가 살던 시절, 이 지역은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다. 대부분은 1세 또는 2세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고, 여기에 큰 규모의 흑인 커뮤니티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때렸다. 이탈리아계는 이탈리아계끼리, 이탈리아계가 흑인을, 흑인이 흑인을, 흑인이 이탈리아계를 때렸다. 지역 공립학교는 폭력이 너무 심해 캠퍼스 안에 아예 경찰서가 설치돼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가 억지로 정육업에 들어갔던 경험 때문에, 우리 형제자매가 그 길을 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아 우리 모두를 사립학교에 보냈다. 우리는 아버지의 피땀이 교육비로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그만큼 학업에 충실하며 반드시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배웠다. 아버지는 교육이야말로 우리를 정육업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곧 자신이 자식들을 정육업에서 ‘구원’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무렵,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리틀 웨스트 12번가에서 이사해 현재 빌리지 약국이 자리한 블리커 스트리트에 새로운 가게를 열었다. 나는 아마 여덟, 아홉 살쯤이었는데, 그 가게에서 바닥을 쓸던 기억이 있다. 또 하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일하던 직원들이 화장실에 두고 간 《플레이보이》 잡지였다. 오늘날 그 블리커 거리에는 값비싼 부티크들이 줄지어 있지만, 당시의 그리니치 빌리지는 정말 ‘마을’ 같았다. 블리커 스트리트에는 지토(Zito)’라는 빵집이 있었는데, 바삭한 긴 바게트와 캔 토마토 같은 이탈리아 식품만 팔았다. 아버지의 형이자 우리 삼촌인 프랭키는 새벽 3시 반이나 4시쯤 빵이 갓 구워질 때 그곳에 들러 따끈한 빵 몇 개를 사 와 우리에게 건넸다.

우리는 주변 가게들과 모두 알고 지냈다. 일부 가게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거리 건너편에는 또 다른 이탈리아계 정육점인 오토마넬리 앤 선즈(Ottomanelli & Sons)가 있었고, 수제 치즈를 파는 머레이(Murray’s),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생고기와 훈제 돼지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파이코(Faicco)’라는 정육점이 있었다.

우리는 항상 레스토랑에만 고기를 공급하는 도매 정육점이었다. 일반 소비자에게 고기를 팔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게는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 한가운데 있었고, 대부분의 가게들이 소매업이다 보니 손님들이 가끔 찾아와 우리에게 고기를 사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고기가 있는데, 왜 안 팔겠나?’ 생각하며 팔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떤 손님은 10파운드짜리 송아지 간에서 두 조각만 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팔 수 없어 어머니에게 가져다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손님은 닭 날개 네 개만 원했다. 아버지는 “지금 내가 하던 걸 멈추고 닭 날개 네 개를 꺼내줘야 해? 날개만 빠진 닭 두 마리는 어떻게 하라고?”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그는 다시 원래대로 동네 레스토랑에만 납품하기로 했다.

 

장남인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일터에 나갔다. 아버지는 아침 3시 30분이면 가게에 도착했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가 일찍이 그 시간에 출근했듯이, 아버지도 어릴 때부터 매일 다섯 번씩 그 시간에 일터에 나가 고기를 준비해 점심과 저녁에 맞춰 레스토랑 고객에게 납품했다. 우리는 아직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섰고, 나는 아버지 옆 조수석에 앉아 자고 있는 동네를 지나며 AM 라디오 방송국 1010 WINS를 들었다. 당시에는 그 방송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우리는 이야기하며, 오늘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일을 일찍 마치면 어디로 낚시를 갈지, 무엇을 낚을지를 얘기했다.

아버지는 평생 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가장 큰 취미였다. 배는 벤슨허스트에 있는 마린 베이신 마리나(Marine Basin Marina)에 정박해 있었고,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나의 대부인 제리 앨버스도 가까운 곳에 배를 댔다. 그래서 이 배는 남자들끼리의 우정과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다. 형제들과 나는 그 배 위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매일같이, 또는 가능한 한 자주 낚시를 나갔다. 내 어린 시절 동안 우리는 베라자노 내로스 다리에서부터 록어웨이 방파제, 뉴저지 하이랜드와 자메이카 베이까지의 바다를 누볐다. 도미, 청어, 전갱이 같은 작은 물고기를 낚아 미끼로 쓰고, 줄무늬농어, 블루피시, 광어 등을 본격적으로 낚았다. 하루가 끝나면 잡은 생선을 집에 가져와 손질해 요리할 준비를 했다. (나는 고기를 썰기 전부터 생선을 먼저 손질할 줄 알았다.) 아버지는 생선을 즐겨 먹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위해 생선을 구웠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부엌에서 요리하며, 형제들과 친구들은 지상 수영장에서 놀았다. 저녁 전에 우리는 물고기 가득 든 쿨러를 집 앞에 꺼내 두었다. 그러면 동네의 이탈리아계 아주머니들이 앞치마 차림으로 냄비를 들고 모여들었고, 우리는 쿨러에서 생선을 꺼내 아주머니들 냄비에 담아주었다. 어떤 날은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 아버지가 맨해튼으로 돌아가 레스토랑에 팔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담배를 피웠다. 마를보로 레드 한 갑이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에 늘 있었다. 우리는 브루클린-배터리 터널을 지나 맨해튼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나는 고기와 일, 그리고 낚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담배 갑을 들어 깊이 들이마셨다. 불 붙이지 않은 담배의 냄새가 너무 좋았다. 지금도 그 냄새를 좋아한다. 나에게 그건 어린 시절의 냄새이자,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의 냄새다.

그 당시 우리 가게에는 컴퓨터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와 내가 출근한 지 몇 시간 후면 어머니가 가게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밤새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고객들의 주문 전화를 듣고, 손으로 주문 장부에 하나씩 적었다. 각 고객마다 장부가 따로 있었고, 장부 아래에는 복사용 탄소지가 깔려 있었다. 나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장부를 받아 고객 주문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나를 특별대우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직원들과 똑같이 일을 했고, 아버지가 아닌 직원들에게 지시를 받았다. 주문을 받은 뒤에는 워크인 냉장고에 들어가 필요한 고기를 꺼내 손질하고, 갈아야 할 것은 갈고, 포장지로 싸고, 각 레스토랑별로 상자에 담아 마무리했다. 레이블이라 해봤자 매직펜으로 상자 옆에 식당 이름을 휘갈겨 쓰는 것이었다. 그다음엔 두 대밖에 없던 밴에 실었다. 밴이 가득 차면 기사가 배달을 나갔다.

처음에 아버지가 나를 일터에 데려간 이유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열두 살쯤 되어서 바닥 청소를 끝내고 소 엉덩이살을 자르고 묶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아버지는 다른 목적을 갖고 나를 데려갔다. 그건 바로 이 일이 얼마나 고된지, 내가 학교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평생 이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몸소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내 일 따라하지 마라. 돈도 안 되고, 평생 동전만 비비며 살다 끝날 거다. 죽도록 일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다.”

하지만 아버지가 아무리 정육업을 말려도, 나는 마음속으로 이 일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 일이 정말 좋았다. 아침 일찍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좋았고, 함께 일하는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았다. 일 자체도 재미있었다. 가끔 다진 고기를 만들다가 아무도 안 볼 때면 손에 쥐고 냄새를 맡았다. 마치 아버지 담배의 냄새처럼 좋았다. 그 냄새는 나의 일부 같았고, 마치 내 혈액 속에 흐르는 본능 같았다.

 

모든 배송 밴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운전사와 조수였다. 조수는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운전사가 정차하면 곧바로 내려 식당 지하까지 상자를 나르는 일을 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수 일을 자청했다. 운전사들은 나와 함께 일하는 걸 좋아했다. 나는 상자를 들고 가파르고 미끄러운 계단을 날듯이 오르내리는 걸 전혀 마다하지 않았고, 그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샌드위치를 먹거나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가 내가 다시 올라오면 다음 장소로 운전해 갔다. 만약 어떤 셰프가 우리가 납품한 고기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는 나에게 문제점을 설명하거나, 다음에 원하는 고기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곤 했다. 나는 그런 셰프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척 좋았다.

아버지는 내가 정육업을 싫어하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를 문제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내가 10대였을 무렵,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차를 훔치고 다닐 때, 나는 일하고 있었다. 학교가 없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LaFrieda Meats에서 일했다. 크리스마스, 봄방학, 여름방학 등 모든 방학 기간과 학교가 쉬는 날마다 일했다. 열한 살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줄곧 그랬다. 아버지의 꾸준한 강조 덕분에 나는 학교 공부도 비교적 잘했고, 졸업 후에는 펜실베이니아 리딩에 있는 사립대학인 알브라이트 칼리지에 진학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나에게 정육업은 내 길이 아니라고 확신시켰고, 나는 의대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건 철저히 아버지를 위한 선택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내가 의사가 되는 것은 최고의 성공의 상징이었다. 단지 내 성공이 아니라, 아버지 자신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어도, 나는 의사 체질이 아니었다. 과학 과목에서 크게 힘들었고, 고급 수업으로 갈수록 따라잡을 수 없었다. 2학년이 끝난 여름, 유기화학 과목에서 낙제한 뒤,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는 전공을 금융학으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그 결정에 실망했지만, 사업은 확실히 내게 더 잘 맞는 분야였다. 금융 수업은 수월하게 잘 따라갔고, 졸업 후 2주 만에 정장을 입고 월스트리트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시리즈 7 시험에 합격했고, 정식 주식 중개인이 되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그 일이 끔찍했다. 내가 일하게 된 회사는 동부 전역에 지사를 둔 제법 큰 회사였는데, 내부적으로는 매우 비윤리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신입이었지만, 그 일이 정당하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무가치한 주식을 순진한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 일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고, 결국 열 달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앞으로 뭘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동안은 라프리다 미트에서 잠깐 일할게요… 정말 잠깐만요.”

 

내가 그때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다른 계획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정육업자가 되고 싶었다. 대학 시절, 의대 준비를 할 때도, 그리고 나중에 금융을 전공할 때도,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내게 졸업 후 뭘 할 거냐고 물으면 늘 똑같이 대답했다.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을 거예요.” 다들 그 사업이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올 때마다 다진 소고기 10파운드짜리 봉지랑 슬라이스 아메리칸 치즈 5파운드짜리를 가져다주셨고, 나는 그걸로 친구들에게 햄버거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내가 월스트리트에서 일을 그만두기 약 5년 전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이모인 리사와 함께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14번가 정육시장 남쪽으로 열 블록 떨어진 웨스트빌리지의 러로이 스트리트에 있는 건물을 사서 그곳으로 회사를 이전했다. 내가 가족 사업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이모 리사 덕분이다.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당시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이모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트릭에게 기회를 주세요. 사업을 키워보게 해봐요.” 아버지는 그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분명히 실망스러워했다. 하지만 이모는 아버지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대단히 강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모의 결단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모는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러로이 스트리트 정육점 위쪽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가 하나 있었는데, 이모가 그곳에 살다가 뉴저지로 이사하면서 주 2회 정도만 와서 묵곤 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동생들이 내 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자 이모가 자기 아파트에 살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스물다섯 살에 그 아파트에 살며 아버지 회사에서 정육업자로 일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 인생에서 당연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1994년, 내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을 때, 우리 회사는 거래 식당이 40곳뿐이었고, 직원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물론 나도 그 세 명 중 하나였다. 당시 14번가 정육시장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미국의 정육 산업 전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산업화되는 시기였다. 모든 소규모 업체들이 대형 무관심 기업들에 흡수되어 가는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라프리다 미트는 눈부신 성공을 이뤘다. 우리는 몇 년 뒤 러로이 스트리트 공간을 벗어나 뉴저지에 3만5천 평방피트 규모의 새로운 공장을 세웠고, 현재는 그 근처에 두 번째 공장을 오픈할 계획 중이다. 현재 나는 140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고 있고, 매주 30만 파운드 이상의 고기를 납품하며, 매일 900건이 넘는 배송을 식당과 일부 소매점에 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고기에 대한 지식을 나눌 것이다. 고기를 어떻게 사야 하고, 어떻게 조리해야 하며, 어디서 오고, 어떻게 분해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가장 가슴에 와닿는 이야기는 바로 개인적인 여정이다. 어려움 속에서 가족 사업을 물려받아 전국적인 브랜드로 키워낸 나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단지 내 개인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걸 더 큰 맥락 속에서 생각한다. 이것은 ‘위대한 미국식 성공 스토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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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Dry-Aged Steaks)

드라이에이징은 스테이크를 부드럽고 풍미 있게 만들기 위해 온도와 습도가 조절된 공간에서 21일에서 120일까지 매달거나 선반에 올려 숙성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고기의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풍미가 더욱 농축된다. 또한 숙성이 진행되는 동안 고기 안의 천연 효소가 작용해 근육 속 콜라겐을 분해한다. 콜라겐은 근육을 질기게 만드는 성분이기 때문에, 이 성분이 분해되면 고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숙성이 잘 된 스테이크는 손가락으로도 찔러서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연해지기도 한다. 드라이에이징된 쇠고기에서는 익힌 맥주와 비슷한 고소하고 달큰한 향, 마치 익힌 옥수수 같은 냄새가 난다.

7일 숙성:

콜라겐이 이제 막 분해되기 시작한 단계로,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에서 기대하는 풍미나 식감을 아직 갖추지 못한 상태이다. 이 시점의 고기는 시중에서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로 판매되지 않는다. 육색은 아직 비교적 밝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분이 빠지고 숙성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어두워지고 건조해진다.

 

21일 숙성:

숙성 첫 3주 동안 스테이크는 증발을 통해 전체 중량의 약 10%를 잃는다. 수분은 고기의 앞면과 뒷면을 통해 빠져나가지만, 양쪽 측면에 있는 지방과 뼈는 방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측면에서는 수분이 빠지지 않는다. 고기가 수축하면서 스테이크는 숙성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오목한 형태가 된다. 지방은 수축하지 않지만 숙성 과정에서 색이 점점 어두워진다.

30일 숙성:

이 시점은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요청되는 숙성 기간이다. 스테이크는 드라이에이징 특유의 풍미와 식감을 갖추게 되며, 매우 부드러워지고 맛은 버터를 입힌 팝콘과 레어로 구운 로스트비프를 섞은 듯한 풍미를 지닌다. 이 시점까지 스테이크는 전체 중량의 약 15%를 잃는다.

 

45일 숙성:

45일 숙성된 스테이크는 30일 숙성보다 풍미가 조금 더 깊고 ‘펑크(funk)’한 숙성향이 강해진다. 중량 손실은 30일에 비해 약간 더 줄어든 정도이지만, 고기보다 지방의 맛이 먼저 변화하기 때문에 조리 전에 모든 지방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잘라낸 지방은 ‘로즈마리와 마늘을 곁들인 숙성우지(Aged-Beef Lard)’처럼 별도의 풍미 있는 곁들임으로 활용할 수 있다.

 

90일 숙성:

고기 표면에 생기는 흰 줄무늬는 좋은 곰팡이이며, 수분과 함께 고기에서 빠져나온 소금이다. 이때 형성되는 외부의 딱딱한 껍질은 치즈의 껍질처럼 내부 고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외부 껍질은 판매 전에 모두 잘라낸다. 최종적으로 남는 스테이크는 신선한 고기보다 약간 더 어둡고 건조한 외관을 가지지만, 숙성 고기를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신선한 고기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120일 숙성:

이것은 우리가 숙성하는 스테이크 중 가장 긴 기간이며, 일반적인 레스토랑이나 정육점에서 판매되는 숙성 스테이크보다 약 4배 더 오래된 것이다. 이 정도로 숙성된 고기를 구입하는 곳은 극소수의 고급 레스토랑뿐이다. 고기는 원래 무게의 35%를 잃게 된다. 120일 동안 숙성된 스테이크는 매우 강한 ‘펑키’한 풍미를 가지며 가격도 매우 비싸다. 따라서 진한 소고기 맛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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