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돼지고기 이야기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3장

Meat marketer 2025. 5. 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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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3장

Pigs, Pork, and Heartland Hogs: From Wild Boar to Baconfest

 

제3장 — 구세계의 돼지: 돼지고기와 익숙한 문화의 형성

기원전 1천 년경, 이후 수세기 동안 세상의 사상과 문화적 기준을 형성하게 될 다양한 민족과 문명들이 등장했다. 켈트족이 비누를 발명하고, 로마인이 식사의 마지막에 디저트를 곁들이는 개념을 도입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무렵, 아시아와 유럽은 물론 그 너머의 지역에서도 돼지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다. 돼지는 사회 질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야생 멧돼지를 사냥했지만, 그 이유는 멧돼지가 위험한 동물이었고, 그런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가 영웅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기에 등장하고, 언어와 문화, 요리 속에 녹아든 존재는 야생 멧돼지가 아닌 돼지였다.

정복과 이주는 공식적인 ‘대항해시대’가 콜럼버스로부터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돼지 또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모든 문명이 그렇듯,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면도 있다. 하지만 대략 기원전 1000년부터 서기 500년까지는 유럽에서는 켈트족,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 로마인의 등장과 쇠퇴가 이어졌고, 중국에서는 지역 단위에서 하나의 나라로 결집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중세시대(서기 500년~1500년)**가 뒤를 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돼지를 기르고 관리하는 방식에 여러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유럽에서 일어났다. 아시아, 특히 중국은 비교적 일찍 안정된 사육 방식을 확립했고, 이 방식은 최근까지도 유지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 시기 돼지는 인도 전역은 물론 태평양을 건너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각 문화권은 서로 달랐고, 특정 시기에는 극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수 세기 동안 일정한 방식이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기와 지역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돼지고기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켈트족

우리가 켈트족에 대해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덕분에 로마 제국의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하지만 켈트 문화권은 로마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되었다. 켈트족은 기원전 2천 년경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700년경의 수천 개에 달하는 무덤들이다.

초기 켈트인들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의 염전에서 소금을 채굴하며 무역을 했던 상인들이었지만, 상당히 유동적인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기원전 100년경이 되면 켈트 부족은 아시아 소아시아(현 터키 지역)부터 스페인, 북쪽으로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퍼져 있었다.

켈트족은 북서유럽에 정착하며 농업 전반에 걸쳐 여러 획기적인 변화를 도입했다. 윤작 제도, 퇴비(가축 배설물)의 비료화, 로마보다 우수한 쟁기, 최초의 수확 기계 개발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그들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계기는 소금으로 돼지고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었다. 켈트족이 가장 가치 있게 거래한 물품은 베이컨과 햄이었다.¹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스트라보(Strabo)**는 켈트족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음식이 매우 풍족하다. 우유와 다양한 종류의 고기가 있으며, 특히 돼지고기를 신선한 것과 염장한 것 모두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이들의 돼지들은 야생처럼 풀어 키워지며, 매우 크고 대담하며 민첩하다... 그들의 돼지 떼는 워낙 방대하여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에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넉넉히 공급할 수 있었다.”²

스트라보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켈트족이 키운 돼지는 상당히 컸다. 하지만 단순한 덩치만이 아니라, 이들은 **켈트 랜드레이스(Celtic Landrace)**라는 품종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특정 지역과 연관된 돼지 품종을 뜻한다. 이후 수세기 동안 다양한 랜드레이스들이 개발되었지만, 스트라보가 글을 쓸 당시 유럽에는 두 가지 랜드레이스가 있었다. 북유럽의 켈트 랜드레이스남유럽 이베리아 랜드레이스이다.

켈트족에게 더 중요했던 점은 그들의 돼지가 **길고 마른 체형의 ‘베이컨형 돼지’**였다는 사실이다. 고기가 많고 소금절이와 훈연에 이상적인 형태였다.³ 반면 이베리아 돼지는 지방이 더 많아 신선한 고기로 소비하는 데 적합했다.

기후는 이런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켈트족은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돼지를 도살하고 보존 처리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소금과 훈연은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겨울에는 돼지가 야외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 등 남쪽 지역은 겨울에도 돼지를 풀어놓을 수 있었다.⁴

돼지는 켈트 문화에서 단순한 생존 수단 이상이었다. 고기 부위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상징되었는데, 예를 들어 왕은 다리살, 왕비는 엉덩이살, 최고의 전사는 허벅지살을 받았다. 고대 귀족의 무덤에는 돼지고기 부위나 통째로 구운 돼지가 껴묻거리로 함께 묻히기도 했다. 돼지를 소재로 한 신화와 전설도 많았다. 헬멧에는 야생 멧돼지가 새겨져 수호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돼지치기가 영웅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어떤 신화에서는 **투아하 데 다넌(Tuatha Dé Danann)**이라는 신족이 돼지를 아일랜드에 처음 가져왔다고 전한다. 철기 시대의 아일랜드는 실제로 “돼지의 섬”으로 불릴 정도였다.⁵

켈트족의 식생활을 접한 외부인들은 그들의 고기 소비량에 대해 늘 감탄했다. 그리스 작가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의 음식은 조금의 빵과 매우 많은 양의 고기로 구성된다. 고기는 숯불이나 꼬챙이에 구워 먹는다. 그들은 깔끔하게 먹지만 사자의 식욕을 가지고 있다. 양손에 커다란 고기 조각을 들고 뜯어 먹거나, 질긴 부분은 단검으로 썰어 먹는다.”⁶

이렇듯 다혈질 전사들의 식사 풍경은 강렬했다. 물론, 항상 커다란 고기 덩어리만 먹은 것은 아니다. 켈트족은 맥주를 만들었고, 돼지고기 맥주 스튜가 인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이컨과 리크(부추) 조합도 즐겨 먹는 방식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많이 먹은 고기 대부분은 돼지고기였으며, 돼지는 명백히 켈트족이 가장 사랑한 동물이었다.⁷

 

고전 세계 — 돼지와 식문화의 발전

고전 고대 세계는 음식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들—특히 돼지에 관한—을 후대에 전해주었다. 로마와 그리스에서 유래한 대표적인 단어들로는 porcus(라틴어로 돼지, 혹은 길들여진 돼지), laridum(라드, 베이컨, 염장된 돼지고기) 등이 있다. 이 중 laridum은 그리스어 larinos (지방의)와 laros (맛있는)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돼지고기를 ‘기쁨을 위한 음식’으로 소비했음을 암시한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의 돼지의 등장은 이 동물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기원전 800년경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기름진 돼지”**가 잔치나 가정 식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일리아스』에서는 용맹한 전사들이 자주 야생 멧돼지에 비유된다. 『오디세이아』에서는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신시키는데, 이는 그녀의 마법적 사악함을 보여주는 장치이지만, 동시에 돼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도 내포되어 있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를 충실히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돼지를 기르던 에우마이오스(Eumaeus)**였으며, 그는 여전히 왕의 막대한 돼지 떼를 잘 관리하고 있었다. 이 묘사는 돼지가 귀중히 여겨졌을 뿐 아니라, 돼지를 돌보는 사람 역시 존경받는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서 호메로스는 어린 돼지보다 기름진 수퇘지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고대 귀족의 식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에우마이오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젖먹이 돼지를 대접한 것을 사과하며, 그것을 **“하인의 돼지고기(servant’s pork)”**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쾌락을 위한 식사’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고급 음식과 저급 음식의 구분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부유한 계층은 서민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념은 고대 그리스에서 본격화되었다. 물론, 그리스는 다수의 도시국가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도시의 문화는 달랐다. 스파르타처럼 쾌락과 사치를 경멸하던 전사 중심 문화도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조차도 돼지를 식용으로 삼았으며, 유명한 요리인 **“검은 수프(black soup)”**는 돼지 다리와 피, 소금, 식초로 만든 스파르타 고유 음식이었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5세기 이후 문화와 지성이 전투 능력보다 중시되었고, 페리클레스 시대의 황금기에 이르러서는 빈부 간의 식문화 격차가 더욱 두드러졌다. 부유층은 제사를 통해 바쳐지지 않은 고기를 먹었고, 물보다 포도주를 더 마셨으며, 진귀하고 이국적인 식재료를 추구했다. 심지어 과식으로 죽은 돼지를 최고의 진미로 여겼다. 이 시기에는 돼지가 송로버섯(truffle)을 찾는 능력도 음식 마니아들 사이에서 환영받았다.

이러한 미식 열풍과 함께 음식 관련 문헌도 함께 증가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요리책이나 음식 문헌은 제목과 다른 문헌 속 인용구 일부뿐이며, 실제 조리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여러 재료가 들어간 조리 음식(made dishes), 작은 접시에 담긴 전채 등 다양한 요리의 개념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는 흔적은 남아 있다.⁸

그러나 이러한 향락적 식문화에 대한 반대도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은 고기 과다 섭취나 식탐이 인간의 기질을 흐리게 하고, 체액 균형을 깨뜨리며, 두뇌 기능을 떨어뜨리고, 성욕을 과도하게 자극한다고 우려했다.⁹

서민들은 과식한 돼지를 식탁에 올릴 일은 거의 없었지만, 소시지 형태로 돼지고기를 자주 소비했다. 소시지는 노동자와 독신 남성들이 애용하던 거리 음식이었다.¹⁰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년)의 등장과 함께 미식 문화는 더욱 복잡해졌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전체 돼지를 속을 채워 통째로 구워낸 요리를 즐길 만큼 호화로운 미식문화를 좋아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문화를 혼합하여 헬레니즘(Hellenistic) 문화를 형성했으며, 그 안에는 음식문화도 포함되어 있었다.¹¹

알렉산더는 그리스, 소아시아, 인도, 이집트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고, 그 결과 헬레니즘식 요리와 식문화가 널리 퍼졌다. 이는 훗날 로마 제국이 받아들이는 표준 문화로 이어진다.

그리스가 변화하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문화도 발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섞여 있었고, 음식 문화도 혼합되었다. **에트루리아인(Etruscans)**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존재했던 민족으로, 기원전 616년에 로마에 왕이 즉위했을 때 그 인물은 에트루리아 문화 속에서 자란 그리스인이었다. 이처럼 문화적 융합은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음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요리를 음악과 함께 하는 고귀한 행위로 보았고, 모든 요리를 음악에 맞춰 조리했다. 돼지를 대규모로 사육했으며, 에트루리아 유적에서는 돼지고기 외의 다른 육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주방에만 음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에트루리아인은 나팔 소리에 따라 돼지 떼를 훈련시켰다. 각각의 돼지 떼는 특정한 나팔 소리에 반응하도록 길들여져, 여러 무리가 뒤섞여도 각 무리를 구분하여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에트루리아의 왕은 하루에 두 번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반면, 부유한 그리스인들은 하루에 한 번만 큰 식사를 하고 그 외에는 간단한 식사를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식사 습관을 지나치다고 여겼고, 일반적으로는 그리스의 식사 방식을 따르려 했다. 다만 무덤 벽화에 나타난 잔치 장면은 에트루리아의 연회가 그리스 문화를 분명히 모방한 것임을 보여주지만,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에트루리아 여성들은 잔치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¹²

마케도니아인들은 자궁으로 속을 채운 돼지를 즐겼고, 에트루리아인들은 돼지의 내장을 요리하는 데 능했다. 그러니 로마인들이 돼지의 내장, 자궁, 귀, 유선까지 즐기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¹³ 물론 이러한 기이한 식재료에 대한 애호는 처음부터 미식적 이유가 아닌, 모든 부위를 남김없이 활용해야 했던 생존의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 초기에는 로마 도시가 자체적으로 인구를 먹여 살리기엔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주변 농촌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고, 로마는 항상 기아 직전의 상태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로마의 제국적 팽창의 동기가 되었다. 유럽과 중동의 식량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재배하는 것보다 저렴해졌고, 로마 시민 한 명을 먹이기 위해서는 시골에서 최소 열 명의 노동자(그중 다수는 농부)가 필요했다. 로마의 인구가 백만 명을 넘겼을 때, 그 시골 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은 정복 전쟁을 통해 끌려온 노예들이었다.¹⁴

이렇게 구축된 거대한 운송망은 단지 식량뿐 아니라 로마 병사들의 이동도 지원했다. 그 결과, 브리튼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로마 제국의 변방 어디에서든, 돈만 있다면 로마 귀족 못지않은 식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로마 음식이 전파되는 곳마다 반드시 돼지고기도 함께 전해졌다, 왜냐하면 돼지고기는 로마인들이 가장 사랑한 고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¹⁵

로마 제국이 쇠락하고, ‘빵과 서커스’로 대중의 불만을 달래던 시대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배급된 식량에는 돼지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¹⁶

로마 역시 영웅들의 멧돼지 사냥 전통을 유지했지만, 실제 소비되는 돼지고기의 대부분은 길들여진 가축에서 얻은 것이었다. 도시 빈민들의 돼지들은 거리에서 쓰레기를 먹으며 방목되었고,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집안은 몇 마리의 돼지를 기르기도 했지만, 정기적으로 돼지고기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부유층은 돼지를 사육하며 사치스럽게 먹였다. 특히 말린 무화과와 벌꿀 와인을 강제로 먹여, 고기를 달게 하고 간을 비대하게 만들어 푸아그라처럼 즐겼다.¹⁷

또한 켈트족, 특히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베이컨과 햄이 수입되기도 했다.

노동자 주거지에는 주방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노점상에게서 음식을 사 먹었다. 당시에는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는 다양한 수준의 상류층과 하층민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시기 가장 인기 있었던 음식 중 하나는 대파를 넣은 돼지고기 소시지였다.

**아피키우스(Apicius)**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고대 로마 요리서에서도 소시지 요리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 요리서에는 돼지고기의 다양한 부위—어깨, 등심, 암퇘지의 배, 간, 신장, 무화과 먹인 돼지고기, 베이컨 등—에 대한 별도의 장이 있을 정도이며, 야생 멧돼지 요리에 대한 장도 따로 존재한다.¹⁸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상류층의 이야기일 뿐, 대다수 로마 시민에게 고기는 여전히 사치였다.

 

로마의 요리 사상은 특히 『아피키우스(Apicius)』에 반영된 내용을 중심으로, 서기 1600년대 중반까지 유럽 요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소시지에 겨자를 곁들이거나, 돼지고기를 사과와 함께 내는 방식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¹⁹

이탈리아의 코르시카(Corsica)에서 만드는 간 소시지는 로마식 소시지의 직계 후손이며, 『아피키우스』에 등장하는 루카니아(Lucanian) 소시지이탈리아 전역의 건조 돼지고기 소시지에서 그 계통을 엿볼 수 있다.²⁰

로마가 아직 공화정이던 시기에는, 상류층 가정의 식사는 비교적 소박했고, 가족이 함께 식탁에 앉아 집에서 식사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확장되고 부패가 만연함에 따라, 부유층은 더욱 부유해졌고, 이들은 점차 호화로운 연회 문화로 악명이 높아졌다. 이 연회에서는 멧돼지, 통돼지, 다양한 돼지 부위 요리가 빠지지 않았다.

물론 어떤 연회는 단순히 부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때로는 혼자 식사할 때조차 연회를 열 만큼 과시욕이 극심했다. 로마의 한 장군은 자신만을 위한 화려한 만찬을 요구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오늘은 루쿨루스(Lucullus)가 루쿨루스와 함께 식사하는 날이라는 걸 몰랐나?”

²¹

그러나 이런 과도한 사치와 방탕은 지속될 수 없었다. 공공 자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는 빈민이 너무 많았고, 정치적 음모와 유혈, 그리고 도처에서 밀려드는 적들정부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렸다. 여기에 더해, 기후의 변화도 결정적이었다.
로마의 온난기(Roman Warm Period)’가 끝나면서 농업 생산성은 급감했고, 북쪽 지역에서는 더 이상 농사를 짓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서방 로마 제국은 몰락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역시 로마 초기와 유사한 문제를 겪었다.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곧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들은, 이후 중세 시기의 농업·세금·식량 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세 시대

서방 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로마 군대가 더 이상 여행자를 보호하지 않았고, 도로를 유지·보수할 세금도 사라지면서, 이전까지 자유롭게 거래되던 식량은 갑자기 사라졌다. **사람들은 굶주렸다. 서기 200년부터 600년 사이, 유럽 인구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는 추정도 있다.**²²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을 돕고 식량 폭동을 막기 위해,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농민들을 농지에 묶어 두려는 법령을 발표했다. 즉, **콜로누스(colonus, 소작농)**는 세습 농지에 얽매이게 되었고, 땅을 빼앗기지는 않지만 자유롭게 떠날 수도 없었다. 이 제도는 유럽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존재했지만, 중세 유럽 농노제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²³

봉건제도의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럽에는 여전히 농민이 있었고, 당연히 돼지도 함께 남아 있었다. 중세 전 기간에 걸쳐, 돼지고기는 유럽 서민층이 접근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육류였다. 물론 귀족과 성직자, 수도원도 돼지를 사육하고 소비했지만, 대다수 인구는 농민이었고, 농민 가정은 적어도 돼지 세 마리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대저택, 수도원, 법원 등의 식탁에는 더 풍부한 돼지고기와 베이컨이 올라왔지만, 일반 농민이 먹는 고기 역시 대부분 돼지고기였다.

돼지는 식량 외에도 다양한 자원을 제공했다.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데 쓰인 수지(tallow), 조리에 사용되는 라드(lard), 도구와 바퀴축에 바르는 윤활유, 솔을 만드는 돼지털(bristles) 등이 있었다.
(물론 농민들은 곡물도 재배하고 훌륭한 정원도 가꿨기 때문에, 해마다 기근이 들지만 않으면 채소 등으로 식단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늘 배고팠던 건 사실이지만, 대체로 농민들은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²⁴

하지만 중세는 단지 농민과 돼지의 시대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는 매우 역동적인 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약 1,000년에 이르는 중세는 일반적으로 초기(500 ~950년), 중기(950 ~1300년), 후기(1300~1500년)로 구분되며, 시간이 흐르며 문화와 생활양식도 변해 갔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은, 전쟁과 침략을 일삼던 야만 부족과 몰락해 가는 로마 제국의 이중성에서 벗어나, 우리가 오늘날 인식하는 ‘유럽’이라는 정체성으로 변화했다.

고딕 아치, 시계, 음악 음계, 최초의 안경 등은 모두 중세의 산물이며,
샤를마뉴, 알프레드 대왕, 단테, 마르코 폴로, 피보나치, 타이유방(중세 프랑스 요리사), 마그나 카르타,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설립,
그리고 유럽의 위대한 대성당 건축들도 모두 이 시대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물론 전쟁, 흑사병, 기근 같은 암울한 사건들도 존재했지만, 이 천 년 가까운 시간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본질은 아니었다.²⁵

 

돼지와 인간의 중세 관계

중세에 접어들며, 돼지와 인간의 관계는 고대에서 이어진 부분이 많았다. 도시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돼지를 용인하거나, 야생 멧돼지를 사냥하는 문화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야생 멧돼지 사냥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귀족과 용사의 전유물로 간주되며 지속되었다.

1400년대 영국의 요크 공작 에드워드는 “멧돼지는 한 번의 찌르기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적었다. 이는 멧돼지 사냥이 단순한 유희가 아닌, 실제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위험성과 난이도는 전쟁 못지않은 영광을 부여했으며, 많은 이들이 그 영광을 좇았다.

또한 야생동물은 귀족의 성이나 영주의 영지에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자신의 사유림을 매우 엄격히 보호했다. 물론 사냥 대상은 멧돼지만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태피스트리(직물 회화), 회화, 역사서, 법령, 전설 등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냥감은 단연 멧돼지였다. 이는 멧돼지가 유럽 전역의 숲에 풍부했기 때문이다.²⁶


서민층과 숲, 그리고 돼지 사육

중세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유럽 농민층의 돼지 사육은 숲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마을 돼지들은 자유롭게 숲에서 도토리, 너도밤나무 열매, 기타 견과류 등 ‘마스트(mast)’라 불리는 먹이 자원을 찾아 다녔다. 이때 숲에서 돼지를 방목할 수 있는 권리를 **‘패니지(pannage)’ 혹은 ‘공유 마스트권(Common of Mast)’**이라고 불렀다.

도토리는 돼지 고기의 풍미와 지방 함량을 높이는 최고의 먹이였기 때문에, 숲의 가치는 해당 숲이 얼마나 많은 돼지를 살찌울 수 있느냐에 따라 측정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가을 두 달 정도의 ‘패니지 기간’이 법적으로 정해졌고, 지나친 방목을 막기 위해 돼지 수 제한도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예를 들어 15세기 초 독일 남서부의 루슈하르트(Lusshardt) 숲에서는 매년 4만 3천 마리가 넘는 돼지가 살찌워졌으며, 이는 이미 방목 제한이 생긴 이후의 수치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패니지가 더 이상 모두의 권리가 아니라, 토지 소유주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얻어야 하는 권리로 바뀌었다. 이는 야생 멧돼지들도 숲의 마스트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숲이 황폐해지는 걸 우려한 지주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후에는 ‘패니지’라는 말 자체가 돼지를 방목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뜻하게 되었다.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의 변화

영국에서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계 지배층이 등장하면서 사람들과 돼지 모두에게 세금이 부과되기 시작했다. 이 돼지 세금 제도는 영국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왔다.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전문 돼지 사육인(swineherd)’의 등장이다.

마을의 돼지치기들은 각 가정에서 돼지를 수거하여 숲이나 초지로 데려가 방목하고, 작물이나 시설을 해치지 않도록 관리한 뒤, 다시 밤에 돌려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한 가정의 돼지 수는 적었지만, 마을 전체의 돼지를 모으면 상당한 대규모 무리가 되었기에 이를 관리하려면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돼지치기는 도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특히 패니지 기간에는 돼지들이 야성을 띠며 다루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성을 동반한 직업이기도 했다.²⁷ ²⁸

 

중세 말기, 돼지를 중심으로 한 유럽 사회의 변화

유럽 전역에서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의 토양이 고갈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농지를 확보하기 위해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돼지 사육의 전환점을 불러왔다. 중세 말기에 접어들며 일부 지역에서는 **‘산림법(Forest Laws)’**이 제정되어 삼림 파괴를 늦추려 했지만, 더 이상 돼지들이 의존하던 거대한 숲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법은 더 엄격해졌고, 방목은 제한되었으며, 방목료는 올라갔다.

전통적으로 돼지는 완전한 의미의 ‘농장 동물’이 아니었고, 숲이나 들판을 자유롭게 누비며 자연에서 식량을 조달하던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코티지 피그(cottage pig)’, 즉 농가 옆 우리 안에서 주방 찌꺼기를 먹으며 자라는 돼지로 바뀌게 된다.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돼지가 가두어 사육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숲이 사라지면서, **귀족들이 숲을 이용해 일반인에게 부과하던 권리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²⁹


도시 속 돼지와 그 문제점

시골의 돼지가 마스트(도토리 등)로 배를 채우던 것과 달리, 도시의 돼지들은 쓰레기를 먹고 자랐다. 중세 도시의 거리 곳곳에는 돼지들이 돌아다녔고, 노동자 계층은 물론, 중산층 가정도 뒷골목에서 돼지를 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도시의 음식물 쓰레기와 오물 문제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줬으며, 먹이도 공짜였기에 매우 유용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덩치가 큰 돼지들이 마차와 보행자, 심지어 왕족의 말까지 방해하면서 사고가 잦았다. 1131년 파리에서는 루이 6세의 아들 필리프 왕자가 말을 타고 가다 거리의 돼지가 갑자기 튀어나와 낙마했고, 결국 두개골이 골절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파리에서는 도시 내 돼지 사육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40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³⁰

또한 도시 내 돼지의 배설물은 심각한 환경 문제를 초래했다. 소와 말보다 돼지가 훨씬 많았고, 소똥과 말똥은 돼지가 먹었지만 돼지의 배설물은 소비되지 않고 도시의 하수로 흘러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뒷마당에 변소나 오물 구덩이를 파는 정도였기 때문에, 비가 오면 오물이 하천으로 유입되며 수질 오염 문제가 심각해졌다.³² 비록 미생물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오염이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는 인식은 분명했기에, 중세 말기에는 도시 계획의 상당 부분이 돼지와 그 배설물 관리에 집중되었다.³³


수도원, 중세 유럽을 다시 세우다

도시와 영주 영지의 영향도 컸지만, 유럽의 중세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수도원이었다. 문명 재건에는 생존을 넘어서 상업과 시장의 부흥이 필요했고, 이 역할을 수도원이 담당하게 된다.

장남이 가문을 계승하던 중세 사회에서, 차남이나 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종교 혹은 결혼뿐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유능한 남녀들이 수도원이나 성직에 들어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농사 기술과 장비 개발에 전념했으며, 지식을 나누고 땅을 개간하며 직접 가축을 키우고 농작물을 재배했다. 또한 이들은 일반 농민과는 달리 방앗간 등 가공시설을 세울 자본과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식품 가공과 유통을 맡아 시장과 장터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양성과 풍요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새로운 식품 유통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수도원에서는 치즈, 와인, 맥주, 빵 등을 생산해 판매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돼지, 곡물 등을 가져와 거래했다. 특히 돼지고기는 가장 손쉽게 보존할 수 있는 육류였기 때문에 소시지, 베이컨, 햄, 라드 형태로 다양하게 가공되어 거래되었다. 라드는 버터와 달리 냉장 없이도 오래 보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또한 맥주 양조 후 남는 맥주박이나 치즈 제조 후 남는 유청은 돼지 사료로 사용되며 돼지 사육이 더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도원의 식량 저장실(larder)**은 말 그대로 라드(lard), 베이컨,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보관하는 공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제 규모의 힘과 중세 후기의 식생활 변화

규모의 경제, 전문화, 중앙집중식 가공은 실제로 모든 것을 더 싸고 효율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체계는 당시 모든 사람에게 큰 혜택이었다. 수도원장(Abbot)은 수수료를 걷고 계량의 공정성을 보장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개인의 역량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던 다양한 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었고, 더 잘 먹게 되었다. 이러한 풍요는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수도원은 어느새 **당대의 ‘농업-산업 복합 기업체’**가 되어 있었다.³⁴


고급 요리의 확산과 돼지고기의 공통성

재건된 무역로를 통해, 부유층이 먹는 **‘고급 요리(high cuisine)’**가 지역을 넘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서민들은 여전히 지역의 제철 식자재에 의존했지만, 돈이 있는 사람은 다른 부유층이 먹는 이국적인 식자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곧 부유한 이들이 먹는 음식은 어디서나 비슷해졌다. 하지만 계급 간의 식단이 완전히 나뉘지는 않았다. 부자든 가난하든 모두가 공통적으로 먹은 것은 돼지고기였다.

농민은 소시지, 소금에 절인 삼겹살이나 돼지 어깨살에 지역 빵, 계절 과일과 채소를 곁들였고, 귀족은 야생 멧돼지를 통째로 구워내거나, 소를 채워 구운 통돼지를 먹었다. 여기에 공작새, 홍학, 토끼, 메추라기, 철갑상어, 피라미, 장어, 다양한 소스, 패스트리까지 더해져 부와 요리사의 솜씨를 과시하는 진수성찬이 완성되었다.³⁵


좋은 시절은 길지 않았다 – 기후, 전염병, 그리고 흑사병

그러나 풍요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속적인 농경은 토양을 고갈시켰고, **1300년대에 접어들며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가 끝나고 **소빙하기(Little Ice Age)**가 시작되었다.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줄었고, 1314년과 1315년의 폭우는 작황을 망치며 대기근을 초래했다. 이때 동북아에서 유럽으로 진군하던 칭기즈칸의 군대는 말벼룩을 통해 질병(아마도 탄저병)을 퍼뜨려, 유럽 전역의 가축을 몰살시켰다. 다행히도 돼지는 이 병에 면역이 있어, 돼지고기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하지만 진짜 재앙은 곧 찾아왔다. **1347년, 무역로를 따라 흑사병(페스트)**이 유럽에 도달했고, 유럽 인구의 20~45%가 사망했다.³⁶


흑사병 이후, 돼지고기는 평민의 고기

아이러니하게도, 흑사병은 생존자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 인구가 급감하면서 식량은 남아돌았고, 노동력 부족은 임금을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평민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페스트 이전에는 귀족들이 하루에 돼지고기를 3파운드나 먹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평민이 그렇게 먹게 되자, 귀족들은 더 이국적이고 희귀한 식재료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귀족들의 입맛은 차별화를 위해 점점 더 멧돼지, 공작, 장어, 심지어 희귀 향신료나 장식용 요리로 옮겨갔다.


르네상스의 씨앗, 중세의 끝자락에서 싹트다

흑사병 이후에도 중세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중세 말기(Late Middle Ages)**에는 이미 르네상스를 향한 여러 변화가 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와 연관짓는 페트라르카의 철학,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 등도 사실상 이 시기의 성과였다. 시대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변화 중이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대항해 시대(Age of Exploration)’**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바꿔놓을 결정적 계기가 된다.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돼지를 가축화하였다. 시작부터 돼지는 개체 수가 많고 널리 분포했으며, 대체로 우리에 가두어 사육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은 오늘날의 단일 국가가 아닌, 여러 봉건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던 지역이었다. 이들 국가가 처음으로 의미 있게 통일된 것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제국을 세우고 첫 번째 황제가 되었을 때였다. 이 통일은 오늘날의 중국 전역을 포함하지도 않았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중국'이라 부르는 국가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³⁷


그러나 중국의 정치적 구성이 수차례 변해온 것과 달리, 돼지에 대한 중국인의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실, 중국 농촌 지역의 돼지 사육 방식은 지금도 고대 초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된 최근 수십 년에 이르러서야 대부분의 중국인이 돼지고기를 얻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돼지를 우리에 가두는 것은 산림의 고갈과 인구 밀도가 높은 현실 때문이었다. 중국의 돼지는 번식력이 높았고, 인구가 빠르게 늘던 시기에 이는 매우 중요한 특징이었다. 몸집이 작아 필요하다면 집 안으로 들여올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깥에 우리를 만들어 길렀다. 벼의 왕겨가 주요 사료였고, 사람의 배설물은 돼지에게 가장 중요한 영양원 중 하나였다. 실제로 화장실은 돼지우리와 연결된 형태로 지어졌고, 중국어에서 변소(便所)와 돈우리(豚舎)는 동일한 글자로 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에 음식 찌꺼기, 잡초, 부엌 쓰레기 등을 더하면 한 사람이 배출하는 폐기물만으로도 돼지 한 마리를 기를 수 있었다. 인원이 많은 가족일수록 돼지를 더 많이 기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가난한 농민은 대부분의 시기 동안 고기를 거의 먹지 못했다. 이들이 확실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시기는 연말연시, 가족이 키운 돼지를 도축하는 설날 즈음뿐이었다.³⁸


중국은 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소비국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자국 내에 머무르지 않았다. 중국인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다른 민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간주한 지역 주민을 밀어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 문화, 작물, 그리고 돼지를 전파하며 더 넓은 ‘중국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³⁹


중국의 확장과 영향력은 동아시아 전역의 역사에 깊게 스며들었다. 중국 대륙에서 밀려난 일부 민족은 대만, 동남아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뉴기니 등지로 이주했으며, 이들의 확산은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16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처럼 바다 건너 먼 지역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오늘날 우리는 **‘폴리네시아인’(Polynesians)**이라 부른다.

기원후 1세기에는 사모아, 쿡 제도, 마르키즈 제도까지 이들이 도달했고, 기원후 500년경에는 마다가스카르, 하와이, 이스터 섬까지 진출했다. 뉴질랜드에는 기원후 1000년경 폴리네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이들은 여행할 때마다 돼지를 함께 데려갔으며, 자신들이 이주한 모든 곳에 돼지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유럽인이 처음 하와이 섬을 발견하기 천 년 전부터 하와이에는 돼지가 존재했다. 오늘날 하와이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타로 잎에 싸서 땅속에 구워내는 전통적인 폴리네시아식 돼지요리를 한 번쯤 접하게 된다.⁴⁰

 

북인도, 헬레니즘, 그리고 돼지

북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이 침공하며 헬레니즘과 그 식문화 이상을 전파한 지역 중 하나였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323년에 사망한 지 2년 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하며 인도의 권력 중심은 인더스 계곡에서 갠지스 강 유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새로운 제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인더스 계곡의 아리아인들은 페르시아 영향을 받은 음식문화를 도입했고, 그 안에는 돼지고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고기 섭취는 지역과 신분에 따라 달랐다. 특히 북인도에서는 중앙아시아 유목 문화와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고기 소비량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인도 전역에 돼지가 존재했고, 여러 토착 품종이 존재했다.⁴²


오늘날 인도에서 돼지고기는 전체 육류 소비량의 약 7%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돼지 개체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인도의 방대한 인구와 증가하는 육류 수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돼지 사육을 주목하고 있다. 번식력이 높고 사육이 쉬운 돼지를 키워 판매하는 것이 빈곤 탈출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⁴³


서아시아(소아시아, 오늘날의 터키), 이집트, 중동 전역에서도 돼지는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더 강하게 정착되었다. 켈트족이 소아시아로 이주할 때도 돼지 사육이 계속 이어졌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이 지역에 헬레니즘을 전파한 이후에도 돼지는 여전히 인기를 누렸다.

이스라엘만은 예외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식문화와 생활방식을 정복지 전역에 강요하려 했지만, 이스라엘에는 그러한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던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는 달랐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는 헬레니즘적 문화를 전 지역에 강요하며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써 헬레니즘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그 전까지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문화 정체성의 핵심 요소는 아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유대교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원전 142년,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지배를 물리치고 독립을 회복했지만, 기원전 63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를 거부하는 유대인의 태도에 혼란스러워했지만, **돼지고기 섭취를 강요하지는 않았다.**⁴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돼지고기를 위한 양돈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단, 북부의 소수 아랍계 기독교 지역에서는 예외가 있으며, ‘키부츠 라헤브(Kibbutz Lahev)’에서는 의료 연구 목적의 돼지 사육이 허용되어 있다. 돼지는 생리학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점이 많아 의학 연구에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비록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들이더라도 과학적 연구를 위해 돼지를 이용하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으며, 이는 돼지를 오랜 세월 동안 회피해온 민족이 돼지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⁴⁵

 

변화의 전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거의 중세 전체를 무어인(Moors)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무어인은 서기 711~712년에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고, 그들은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톨릭 신앙이 뿌리 깊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는 단순한 식습관이 아니라, 종교적·정치적 정체성의 표지가 되었다. 심지어 교회 전통을 얼마나 따르느냐보다 돼지고기를 먹느냐가 더 확실한 신분 확인 수단이 되었다.

돼지는 정치적 선언이 되었고, 누가 누구이며 누가 아닌지를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다.
1478년에 **스페인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이 시작되자, 새로 집권한 가톨릭 군주들은 돼지고기를 이용해 '국가의 적'을 가려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돼지고기를 먹기를 거부하면, 이단자나 유대인 혹은 무어인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⁴⁶


**레콩키스타(Reconquista, 재정복 운동)**는 1492년 1월,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을 완전히 몰아내며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해는 단지 이슬람 세력의 축출만으로 유명해진 해가 아니었다.
수세기 동안 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자원이 해방되자, 스페인은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중국으로 항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후원하는 일이었다.

콜럼버스는 **아랍 천문학자들, 특히 알파르가니(al-Farghani, 라틴어로 Alfraganus로 번역됨)**의 연구를 참고했다.
그는 아프리카로 항해하던 중 자신의 측정이 알파르가니의 '적도상의 1도는 56과 2/3마일'이라는 계산과 일치한다고 기록했다.⁴⁷

물론 당시의 '마일' 단위는 국가마다 다르게 사용되었고, 콜럼버스가 이 차이를 무시했거나 알고도 무시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는 그는 다른 이론들이 아시아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중국까지 3,000마일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동시대의 전문가들은 이를 부정했지만, 이사벨라 여왕은 그를 믿고 항해를 승인했다.⁴⁸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성공하길 원했다.
만약 그가 향신료 무역의 길을 새로 연다면,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저 끝없는 바다 어딘가에서 죽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육지를 발견했고, 자신의 이론을 너무나 확신했던 나머지, 죽을 때까지 그곳이 아시아라고 믿었다.
비록 상당한 반대 증거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항해시대, 혹은 신대륙 발견의 시대는 유럽인들이 탐험하고 정복하며 정착한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 내부는 정지해 있지 않았다. 유럽의 식민지들이 겪게 되는 모든 일은 어느 정도까지는 구세계의 전통, 발전,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유럽인들이 돼지를 탐험길에 어떻게 데리고 다녔는지를 다룰 예정이지만, 단지 돼지라는 동물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가축 사육법, 번식 방식, 먹이의 조달, 소유권 개념, 식재료 조리 방식 등도 함께 전해졌다.

물론 사람과 사물은 쌍방향으로 오고 갔으며, 신세계는 다시 구세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는 그 이전까지 돼지를 기른 적 없던 지역들에서 발생했다.


르네상스의 시작은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르네상스적 사유 방식은 새로운 땅과 문명을 향한 열망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돼지에 관한 유럽 내부의 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 야생 멧돼지는 여전히 가축화된 돼지보다 더 명예롭고 귀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 도토리를 먹는 숲속의 돼지는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 도시 거리에는 여전히 돼지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돼지고기, 햄, 베이컨, 소시지, 족발, 블러드 푸딩 등 ‘소리를 제외한 전부를 먹는’ 방식으로 돼지를 소비했고, 유럽 각국은 각각 고유한 돼지고기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 전통들은 훗날 각국 사람들이 신세계에 정착하면서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유럽에서 일어났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대지주들은 기존의 돼지 품종이 중세의 야생 멧돼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자신들의 취향, 기후, 농업 방식에 더 적합한 새로운 돼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자유롭게 방목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자, 이들은 눈을 중국으로 돌렸다.
중국 돼지는 오랜 시간 우리 안에서 길러졌으며,

  • 등이 휘고 다리가 짧았고,
  • 성격이 온순했으며,
  • 피하지방이 도톰하게 쌓여 있어 라드가 필수였던 시대에 매우 적합한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 돼지가 수입되었고, 육종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19세기 무렵, 오늘날 ‘헤리티지 품종’이라 불리는 많은 유명 품종들이 탄생하게 되며, **19세기 후반부터는 품종협회가 체계적인 번식 기록을 관리하기 시작했다.**⁴⁹


이러한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품종 이름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 버크셔(Berkshire)
  • 햄프셔(Hampshire)
  • 서퍽(Suffolk)
  • 링컨셔(Lincolnshire)
  • 에식스(Essex)
  • 레스터(Leicester)
  • 요크셔(Yorkshire 또는 Large White)
    등은 모두 영국 지역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품종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기준에 따라 분류되었다.

  • 귀의 방향(귀가 서 있는 ‘직립귀(pricked)’인지, 눈을 덮는 ‘처진귀(lop)’인지)
  • 색깔
  • 얼굴 형태
  • 몸에 있는 특정한 무늬나 특징 (예: 레드 와틀(Red Wattle), 웨섹스 새들백(Wessex Saddleback) 등)

뿐만 아니라, 용도에 따라

  • 고기용(bacon pigs)
  • 지방용(lard pigs)
    으로 나뉘기도 했다.

이들 품종은 급격히 산업화되어 가는 구세계뿐 아니라, 신세계 각지에서 지역 맞춤형 품종 개발의 기초 유전자원으로도 활용되며 중요한 자산이 된다.


결국,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돼지를 소중히 여겨온 지역들에서는 이후에도 돼지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1492년 이후 수세기에 걸쳐 더 많은 국가들이 탐험, 발견, 그리고 식민지 확장을 위한 경쟁에 참여하면서, 돼지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대륙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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