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돼지고기 이야기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4장

Meat marketer 2025. 5. 4.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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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4장

Pigs, Pork, and Heartland Hogs: From Wild Boar to Baconfest

제4장
식민지 돼지: 대항해시대의 돼지

사람들은 보통 1492년을 대항해시대의 시작으로 인식하지만, 이 시기를 특징짓는 목표와 사고방식, 그리고 필요한 기술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발전해 왔다. 실제 탐험도 1492년 이전부터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행과 배움에 대한 갈망은 오랜 세월 동안 탐험가들을 자극해왔다. 1200년대의 마르코 폴로나 1300년대의 이븐 바투타처럼, 그들은 세계의 길 위로 나섰다. 이국적인 땅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여행 욕구를 자극했지만, 동시에 무역에 대한 열망도 큰 동력이 되었다. 실크로드와 같은 국제 무역로는 수천 년 동안 구대륙을 가로질렀고, 향신료와 비단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반했다. 그러나 그 경로를 따라 수많은 중개상이 끼어들면서 가격은 매우 비싸졌고, 이에 유럽인들은 중국에 이르는 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향신료 무역은 더욱 어려워졌고, 이는 아시아로 가는 새로운 경로를 꿈꾸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동기를 부여했다.

바다에서 오랜 시간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은 비교적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1400년대 중반에 등장한 이 선박들은 돛대와 돛의 수가 늘어나면서 노 없이도 항해가 가능해졌고, 덕분에 훨씬 더 안정적인 항해가 가능해졌다. 포르투갈은 1400년대 초중반부터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을 탐사하기 시작했고, 1488년에는 희망봉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항해에 자금을 댄 나라는 바로 스페인이었다. 그 항해를 통해, 인류의 식생활 또한 변화하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은 세계 식단에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초콜릿, 카사바, 파인애플, 땅콩 등 매우 다양한 식재료를 기여하게 된다. 반대로 아메리카는 밀, 쌀, 감귤류, 양파, 유럽의 허브들, 아시아의 향신료들, 그리고 축산물이라는 복합적인 선물—혹은 재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사람들은 목적지까지 먼저 도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탐험가들과 선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바다 위에서

탐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어디에 도착하든 긴 항해는 피할 수 없었다. 1500년대를 지나면서 탐험이 계속되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 항로가 파악되어 점차 익숙해지긴 했지만, 대서양을 건너는 데만도 여전히 열 주 이상이 걸렸다. 초기 항해의 경우,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여덟 달이 걸리기도 했다. 선원, 무기, 교역품을 싣고 나면 선박에 남는 공간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식량과 식수는 최소한으로만 실을 수 있었다. 항해 중 어딘가에서 보급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게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몇 달 동안 바다 위에서 버틸 수 있는 음식은 영양적으로 균형이 매우 부족했다. 야채나 과일이 없었던 항해에서 괴혈병은 오랜 세월 선박에서 전투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간 심각한 문제였다.

항해를 위해 싣는 식량의 주된 구성은 전분과 육류였다. 전분 식품에는 말린 완두콩도 있었지만, 대개는 ‘쉽스비스킷(ship’s biscuit)’이라 불리는 딱딱한 비스킷이었다. 이것은 밀가루와 물만으로 반죽을 만들어 두 번 이상 구워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었으며, ‘비스킷’이라는 단어 자체가 ‘두 번 구운 것’을 의미한다. 이 빵은 무려 50년 동안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너무 단단해 스튜나 국물에 불려야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몇 주만 지나면 이 비스킷조차도 쌀벌레(위벌)로 가득 차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먹는 것이 꺼려지기도 했다. 콜럼버스의 아들 페르디난드는 선원들이 밤이 되어야 비로소 빵을 먹는 이유는 그 속에 득실거리는 벌레 유충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전했다.

육류는 대부분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나 소고기였지만, 항해에서는 보통 돼지고기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격이 더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항해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늘 가격이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냉장 기술이 없었던 만큼, 육지에서도 사람들이 주로 먹던 것은 절이거나 식초에 담근 고기였다. 그러나 선원들에게 지급된 돼지고기는 대체로 좋은 부위는 아니었다. 항해 중 더 큰 문제는 이 고기를 불리거나 조리할 만큼의 담수(식수)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고기는 지나치게 짜서 먹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¹

초기 유럽 탐험가들이 상륙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살아 있는 돼지를 배에 싣고 귀국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아시아나 태평양으로 향한 경우에는 이런 일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도착한 서인도 제도,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지에서는 단백질 공급이 매우 부족했고, 돼지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분할

콜럼버스의 항해를 후원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왕은 그가 발견한 땅을 자신들의 영토로 여겼다. 이들은 오랜 숙적이자 경쟁국인 포르투갈이 새로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교황에게 신세계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편을 들었다. 1493년, 교황은 ‘교황의 분할선(Line of Demarcation)’을 설정했다. 이 선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바다를 중심으로 그어졌고, 세상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나누는 기준이 되었다. 첫 번째 분할선은 신세계에서 포르투갈이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게 설정되었다. 이에 포르투갈이 항의하자, 분할선은 서쪽으로 이동되었고, 1494년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은 이 새로운 분할선을 공식화했다. 이로 인해 남아메리카에서 오늘날의 브라질에 해당하는 부분이 포르투갈의 영역이 되었고, 그 이외의 신세계는 모두 스페인에 속하게 되었다.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에게 돌아갔으며, 단 가톨릭 통치자가 있는 국가는 예외였다.²

프랑스와 영국 등 여러 나라가 이 조약에 반발했지만, 그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단순히 항의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 역시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제노바 출신 항해사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존 캐벗(John Cabot, 본명 지오반니 카보토)이다. 그는 영국 헨리 7세를 설득해 항해를 허가받았고, 1497년 캐나다 동부 해안에 도착해 그 땅을 영국의 영토로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는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그 땅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한 세기가 더 필요했다.

1494년 조약이 논의되는 중에도 콜럼버스는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두 번째 항해인 1493년 항해에서 사탕수수와 같은 식물의 종자와 삽수를 비롯해 말, 개, 돼지, 소, 닭, 양, 염소 등의 가축도 함께 실어갔다. 스페인은 이 땅에 정착할 의지가 확고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동물들 가운데 돼지는 새로운 환경에 가장 빠르게 적응했다. 먹이가 풍부했고, 천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개체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다른 가축들도 분명 유용했지만, 처음에는 돼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³

원주민들은 돼지의 도입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돼지를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하며 기존의 개를 대체하게 되었고, 스페인 측에서 카리브해와 멕시코에서 인육 섭취를 금지하자 돼지가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돼지는 주변 모든 것을 먹어치웠고, 이는 원주민들이 의존하던 열매와 뿌리, 새, 뱀, 도마뱀까지 포함되었다.⁴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점은 가축이 ‘치명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돼지와 말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처음으로 ‘가축 매개 질병’을 퍼뜨린 동물이었다. 이 동물들을 데려온 유럽인들은 이미 livestock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로, 면역력을 갖춘 생존자들이었다. 당시에는 질병이 어떻게 전염되는지 아무도 몰랐지만, 1500년대의 기준에서 가축 떼는 생존을 의미했다.⁵ (물론, 인플루엔자와 같은 동물 유래 질병이 먼저 유입되긴 했지만, 이후 천연두라는 더욱 치명적인 질병이 도래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정착한 지역에만 돼지를 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항해 도중 거치는 거의 모든 섬에 돼지를 한 쌍씩 풀어놓았다. 조난자나 앞으로 도착할 군인들이 언제든 식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1514년 4월,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Diego Velásquez de Cuéllar)는 페르디난드 왕에게 편지를 보내 “쿠바에 처음 데려온 24마리의 돼지가 이제는 3만 마리로 늘어났다”고 보고했다. 물론 이 수치는 상징적 과장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만큼 폭발적인 번식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음은 분명하다.

 

정복자들과 함께 도착한 돼지들

돼지를 데리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정복자들은 돼지 문화에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초기 정복 시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지휘관—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모두 스페인의 엑스트레마두라(Extremadura) 지역 출신이었다. 이 지역은 대규모 돼지 사육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히 하몽 이베리코(jamón ibérico)로 유명하다. 돼지고기에 대한 애착과 굶주림을 피하려는 실용적 이유가 맞물리면서 돼지는 스페인의 정복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⁷

코르테스는 1519년 멕시코에 상륙할 때 돼지를 데리고 갔다. 오늘날 멕시코만 연안 지역에 서식하는 크고 위험한 야생 멧돼지들은, 당시 스페인에서 데려온 돼지들의 야생 후손들이다. 1521년에는 멕시코 중부의 톨루카 계곡이 정복되었고, 1530년에는 톨루카 시가 세워졌다. 이곳은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병사들이 정착한 도시였기 때문에, 곧바로 엑스트레마두라 스타일의 소시지와 햄으로 유명해졌다.⁸

돼지의 도입은 아즈텍 요리를 비롯해 스페인이 정복한 여러 원주민 문화권의 요리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돼지고기의 다양한 형태뿐만 아니라, 스페인인들은 원주민들에게 라드(lard, 돼지기름)를 제공했고, 그로 인해 원주민들은 ‘튀긴 음식’이라는 새로운 조리법을 접하게 되었다.⁹ 반면, 스페인인들은 신세계에서 얻은 한 가지 획기적인 작물 덕분에 돼지를 더 효율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옥수수였다. 옥수수는 유럽인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을 변화시킨 기적의 곡물로, 정복된 원주민들로부터 조공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제공되었다. 이 옥수수를 바탕으로 스페인인들은 대규모 돼지 떼를 원하는 지역 어디든 데려갈 수 있었다. 1531년 피사로는 돼지를 데리고 페루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마에서는 돼지고기가 육류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¹⁰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돼지를 본국인 스페인에서부터 데려올 필요가 없어졌다. 쿠바, 히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등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탐험과 정복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 1539년 에르난도 데 소토가 플로리다의 탬파베이에 상륙했을 때, 그가 데려온 열세 마리의 돼지들은 모두 쿠바에서 온 것이었다. 데 소토가 데려온 돼지들은 모두 임신한 암퇘지들이었는데,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기간 원정을 떠나는 만큼, 식량 확보를 위한 자급자족용 돼지 떼를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원정 기간 중 일부 돼지는 병사들에게 도축되었고, 일부는 도망쳐 야생화되거나, 원주민들과의 평화를 위해 선물로 제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 소토가 사망할 때쯤에는 이 돼지 떼가 700마리로 늘어났다고 전해진다.¹¹

한편 스페인이 신세계에서 정복을 넓혀가는 동안, 포르투갈은 세계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다른 지역을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먼저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자원을 얻고(특히 노예), 아랍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존 무역로를 우회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고자 했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면서, 이 목표를 이뤄냈다. 그는 아랍 세계가 통제하던 향신료 무역의 우회로를 확보함으로써 포르투갈에 무역의 주도권을 가져다주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더 동쪽으로 진출하여 1512년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제도에 도달했고, 150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점령하고 정착하면서 두 나라의 문화와 요리를 크게 변화시켰다. 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가축화된 돼지의 도입이었으며, 이는 이전까지 주로 유제품과 곡물에 의존하던 식단에 풍부한 육류를 추가하게 만들었다.¹²

1500년,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상륙하여 스페인과의 조약에 따라 자신들에게 할당된 신세계의 구역에 정착을 시작했다. 브라질의 덥고 습한 해안 기후는 대부분의 유럽 가축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돼지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곧 돼지들이 번성하여 엄청난 수로 증가하였고, 돼지고기는 브라질 식민지 주민들의 식단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¹³

인도에서는 포르투갈이 고아를 식민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다양한 새로운 음식과 함께 종교재판도 인도에 가져왔다. 힌두교도에게는 소고기를, 무슬림에게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가톨릭 포르투갈에 충성을 맹세했는지를 시험하였다. 이 강제는 시간이 지나 폐지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고아는 인도 내 다른 지역에 비해 돼지고기 소비가 많은 편이며, 포르투갈식 돼지고기 요리 ‘빈달루(Vindaloo)’는 고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남아 있다.¹⁴

신세계의 은광과 노예무역은 스페인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의 과잉 유입은 결국 스페인을 재정 파탄에 빠뜨렸다. 반면 포르투갈은 향신료, 아시아산 교역품,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1500년대 내내 두 나라는 세계 곳곳으로 통제력과 영향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6세기 중반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나 월터 롤리(Walter Raleigh)와 같은 사설 해적들이 스페인을 괴롭히긴 했지만, 스페인의 전 세계적 지배에 본격적인 도전이 가해진 것은 1588년 잉글랜드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한 이후였다.

스페인이 해상 지배권을 상실하자, 해안선을 따라 발전한 항해 전통을 가진 유럽의 다른 국가들—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잉글랜드 등—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식민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더 이상 정복보다는 자신들이 이미 점령한 영토를 지키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기타 국가들의 해양 진출

일부 정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처럼 정복에 나서기를 원했지만, 많은 유럽인들은 신세계를 자원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유럽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 농지를 확보하기에는 부족했으며, 숲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1300년대 초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소빙기’는 기후를 더욱 춥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북부 유럽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식량 부족이 빈번했다.¹⁵ 게다가 비(非) 이베리아 국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부를 축적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로감을 느꼈고, 따라서 경쟁에 뛰어들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지역(신세계의 미개척지들)에 정착하거나, 이미 점령된 지역에서 그들의 자산을 빼앗는 것이었는데, 후자의 방식은 주로 아시아에서 이루어졌다.¹⁶

르네상스는 고대 로마의 법과 사상을 부활시키며, 유럽인들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600년대 식민지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수세기 동안, 이 개념들은 유럽 사회에 스며들어 있었고, 단지 수용된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으로 굳어졌다. 이 시기에 부활된 로마법 가운데 식민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레스 눌리우스(res nullius)’였다. 이는 “아무의 것도 아닌 소유물”이라는 뜻으로, 명확한 소유자가 없는 땅은 무주지(無主地)이며, 누구나 차지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¹⁷ 고대 로마가 ‘야만’ 유럽 지역을 정복하며 내세운 논리이기도 하며, 정복지의 수많은 주민을 노예화했던 우월주의적 사고 역시 르네상스를 통해 되살아났다. 중세 동안 유럽에서 사라졌던 노예 제도가 이 시기에 다시 확산된 이유다.¹⁸ 이러한 사고는 훗날 다윈의 “문명화된 인종은 야만적인 인종을 거의 확실하게 절멸시키고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다.¹⁹ 물론 모두가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이들이 이 생각을 수용했기에 이후 수세기 동안 벌어진 많은 일들의 기반이 되었다.

철학이 문을 열어주었다면, 실제로 그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탐욕, 모험심, 갈등, 빈곤, 박해, 기근, 또는 단지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오랫동안 포르투갈로부터 향신료를 공급받아 유통해 왔으나,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비자발적으로) 통합되면서 그 길이 막혀버렸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하나가 되면서 곧바로 적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네덜란드는 스스로 향신료를 확보하자는 결정을 내리고, 먼저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로 항해한 뒤 남인도로 향했다. 1600년대 초, 네덜란드는 마침내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차지했으며,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 지역만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다.²⁰

서쪽으로는, 1609년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에 정착을 시작했다. 1626년에는 네덜란드가 레나페(Lenape) 원주민에게 맨해튼을 ‘값싼 장신구 상자’와 교환해 샀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천과 손도끼 등 실용적인 교역품이었다.²¹ 1650년대에 이르러 네덜란드는 영국인 이웃들과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뉴암스테르담에 성벽을 쌓았고, 이 성벽의 안쪽에 생긴 길이 훗날 월 스트리트(Wall Street)가 되었다.²²

1630~40년대에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의 포르투갈 교역권을 공격했고, 1652년에는 남아프리카에 네덜란드 식민지를 세웠다. 브라질에는 이미 네덜란드가 도착하기 전부터 돼지가 널리 퍼져 있었고, 남아프리카의 경우 돼지가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네덜란드가 돼지를 가져왔고, 포르투갈 또한 인도와 인도네시아로 가기 위해 희망봉을 지날 때 돼지를 풀어놓았을 가능성이 높다.²³

 

프랑스는 카리브해(서인도 제도)에서 부를 추구하는 동시에, 오늘날 메인주와 캐나다로 이어지는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 탐험가들이 아시아로 향하는 북서 항로(Northwest Passage)를 발견해 중국과 인도로 갈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 지역은 어업과 모피 무역으로도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프랑스의 첫 정착지는 1604년, 펀디만(Fundy Bay)의 한 만 입구에 있는 섬에 세워졌으며, 이후 프랑스인들은 내륙으로 진출해 오늘날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에 해당하는 지역을 아카디아(Acadia)라 부르며 정착했다.

프랑스 이주민들과 함께 돼지와 전통적인 프랑스식 돼지고기 조리법도 도착했다. 1609년까지는 퀘벡에 확실히 돼지가 들어왔으며, 그보다 더 이른 시점에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²⁴ 프랑스 모피 무역의 핵심이었던 보야주르(voyageurs)들은 엄청나게 고된 생활을 돼지고기로 버텼고, 그로 인해 ‘라드를 먹는 사람들(mangeurs de lard)’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들이 수프에 넣어 삶아 먹던 돼지고기는 근면한 프랑스계 농민들에게도 귀중한 음식이었다. 퀘벡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돼지고기 파이 ‘투르티에르(tourtière)’는 1600년대에 탄생했다. 돼지 족발 스튜인 ‘파트 드 코숑(pattes de cochon)’도 인기였고, 노란 완두콩 수프는 염장 돼지고기로 풍미를 더한 대표적인 요리 가운데 하나였다.²⁵ 이 노란 완두콩 수프는 오늘날에도 프랑스계 캐나다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아, 요리책은 물론 슈퍼마켓의 통조림 코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²⁶

캐나다에는 프랑스인뿐 아니라 대구 어업을 위해 포르투갈인, 영국인, 아일랜드인, 바스크인도 몰려들었고, 이들이 전한 염장 돼지고기 문화는 해안 어촌 요리의 기초가 되었다. 예컨대, 뉴펀들랜드에서는 지금까지도 전통 요리에 염장 돼지고기가 주요 재료로 쓰인다. 스튜의 풍미를 내고, 대구 케이크를 튀길 때 쓰이는 기름으로 쓰이며, ‘스크런션스(scrunchions)’라는 이름의 돼지비계 튀김 조각은 대구 혀 요리(실제로는 물고기 목살 부위)와 늘 함께 제공된다.

1682년, 프랑스 탐험가 르네-로베르 카발리에(René-Robert Cavelier), 라 살 경(Sieur de La Salle)은 캐나다에서 출발해 오대호를 지나 일리노이강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하했고, 멕시코만에 도달한 지역을 루이 14세를 기려 루이지애나(Louisiana)라 명명했다. 본격적인 프랑스 식민은 1702년에 시작되었으며, 1700년대 중반에는 프랑스에서 온 크레올(Creole) 정착민들과 함께, 영국에 의해 아카디아에서 쫓겨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루이지애나로 이주했다. 이들은 아카디안(Acadian)의 이름이 변형된 ‘케이준(Cajun)’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한 독특한 요리 문화가 형성되었다. 부댕(boudin), 잠발라야(jambalaya), 그라통(돼지껍데기 튀김), 앙두이(매운 소시지), 타소(향신료에 절인 돼지 어깨살) 같은 음식이 대표적이다.

1638년에는 스웨덴 정착민들이 현재 델라웨어 밸리 지역에 뉴 스웨덴(New Sweden)이라는 식민지를 세웠다. 당시 스웨덴은 핀란드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착민들 중 다수는 실제로 핀란드인이었다. 뉴 스웨덴은 델라웨어강을 따라 확장되었고, 이는 훗날 뉴저지 지역이 되었다. 스웨덴인들도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의 정착은 북미 대륙에서의 돼지 사육 증가에 기여했다. 이 식민지는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는데, 1654년 네덜란드 총독 페터 스튜이베산트가 스웨덴 요새 전부의 항복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뉴 스웨덴은 초기 미국 문화에 많은 것을 남겼으며, 초기 개척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통나무집(log cabin)도 이들이 남긴 유산이다.²⁷

카리브해에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선원들이 지나치는 섬마다 돼지를 풀어놓았기 때문에, 사람보다 돼지가 더 많은 섬들이 많았다. 1609년, 당시 무인도였던 버뮤다 섬에서 한 영국 선박이 난파되었을 때, 선원들은 섬에 자생하는 많은 돼지 덕분에 굶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었다. 이후 버뮤다가 정착지로 발전하면서, 감사의 의미로 버뮤다 화폐에는 수퇘지 문양이 들어가게 되었다. 1627년, 영국이 바베이도스에 정착할 당시에도 사람이 없었지만 야생화된 돼지는 풍부했다.²⁸

 

급속히 늘어난 돼지들은 탐험가, 정착민, 난파선 생존자뿐만 아니라, 점점 더 증가하던 탈영병, 추방자, 무허가 무역상, 그리고 국적을 불문한 해적들의 식량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돼지를 조리하기 위해 현지인들의 조리법을 받아들였다. 카리브 지역의 원주민인 카립족(Caribs)은 고기와 생선을 훈연해 건조시키는 데 뛰어났는데, 이 작업은 푸른 나무로 만든 격자를 연기가 나는 불 위에 설치하여 이루어졌다. 이 격자를 그들은 ‘부캉(boucan)’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인들은 이 조리법을 채택한 사람들을 ‘부카니에(boucanier)’라고 불렀고, 이후 영어를 쓰는 영국인들은 이를 ‘버커니어(buccaneer)’로 바꾸어 불렀다. 이 조리 방식은 다른 유럽 식민자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특히 간편하고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스페인 사람들은 푸른 나무로 만든 그릴을 가리키는 아라와칸어(Arawakan) 단어인 ‘바르바코아(barbakoa)’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바비큐(barbecue)’라는 단어와 조리 전통의 어원이 되었다.⁽²⁹⁾

하지만 1600년대 중반, 카리브 제도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커피, 차, 초콜릿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설탕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설탕 생산을 위해 사탕수수 농장이 확대되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집중하게 된 농장주들은 더 이상 돼지를 기를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육지에서 염장 돼지고기를 구매하면 되었기에 자급 생산을 포기했다. 이로 인해 숲이 모조리 개간되었고, 그 숲을 기반으로 유지되던 돼지 떼들도 함께 사라졌다. 결국 사탕수수가 카리브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영국은 바베이도스라는 작은 섬 하나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섬을 점령한 후, 영국은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 계약노동자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계약이 끝난 후 해방된 이들 중 일부는 본토인 미국의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이주했고, 바베이도스에서 익힌 돼지 조리법을 본토로 전해주었다. 이들이 가져온 조리 문화는 훗날 미국 남부에서 중요한 돼지고기 관련 전통으로 발전하게 된다.⁽³⁰⁾

이후 영국은 자메이카(1655년)를 점령하게 되지만, 카리브 지역에서 돼지와 관련된 영국의 주된 역할은 생산자보다는 소비자였다. 돼지와 관련하여 훨씬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북미 본토에 있던 영국 식민지들이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접근 방식과는 달랐다. 심지어 영국 식민지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정복자나 군인이 아닌 농부가 되기를 원했다. 영국의 북미 식민지 경제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으며, 그 농업이 바로 식민지의 성장과 힘의 원천이 되었다.⁽³¹⁾

오랜 세월 동안 영국에서 농업은 경제의 근간이자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렇기에 영국 정착민들은 농업을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여겼다. 문명화된 사람이라면 농사를 짓고,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당연히 신세계에서도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 기대했다.⁽³²⁾

오늘날처럼 빠른 변화와 간편한 이동이 가능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는 데 수개월이 걸리고 변화라는 개념이 수세대 또는 수백 년 단위로 이야기되던 당시 사람들의 상황을 상상하기 어렵다.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뿐 아니라,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것은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함을 찾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세계의 황무지를 영국 시골처럼 아기자기한 농지로 바꾸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³³⁾

하지만 시작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버지니아의 로어노크 섬에는 두 차례 정착 시도가 있었으나, 첫 번째는 철수로, 두 번째는 모든 정착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미스터리로 끝났다. 최초의 성공적인 영국 식민지는 1607년에 세워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었다. 초기 식민지 생활은 매우 고단했고, 수명도 짧았지만, 제임스타운은 살아남아 점차 성장했다.

낙담스러운 소식이 이어졌지만, 희망을 품은 정착민들은 계속해서 신대륙으로 향했다. 유럽 전역에서 실업과 기근이 심화되고 있었고, 극빈자가 아니더라도 삶을 개선할 기회가 전혀 없던 사람들이 많았다. 가난, 굶주림, 전쟁, 박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물질적 성공에 대한 기대가 그들을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

미국 역사 수업에서 자주 접하는 이야기처럼,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과 1620년에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원주민들에게 옥수수(마이즈)를 배워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며, 옥수수는 식민지들이 성장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³⁴⁾ 하지만 식민지 상황이 진정으로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 그리고 남쪽 스페인 정착지로부터 가축들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두 개의 식민지가 생존에 성공하면서, 구세계에서 얻을 수 없던 기회를 신세계에서 찾으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북미로 몰려들었다. 버지니아와 매사추세츠에서 시작된 정착지는 바깥으로 확장되었고, 식민지는 점차 ‘체서피크(Chesapeake)’와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는 지역 단위로 구분되어 논의되기 시작했다.

 

 

체서피크 지역, 즉 1634년부터 포함된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식단에 돼지고기와 쇠고기, 특히 돼지고기를 추가하면서 기아의 위협을 줄일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제임스타운에서 담배가 중요한 수출 작물로 자리 잡으면서 영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졌고, 더 많은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1600년대 내내 체서피크 지역의 삶은 여전히 거칠었다. 사망률은 높았고, 정착민들의 평균 수명은 약 40세로, 이 지역의 원주민 평균 수명인 50세보다 10년이나 짧았다.⁽³⁵⁾ 주거는 매우 열악했으며, 대부분의 가축은 주변 숲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영국 정부가 원래 투자자들로 구성된 버지니아 회사를 대신해 식민지를 접수하면서, "야생 가축"은 모두 국왕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식민지 주민들은 동물들이 원래 이 땅에 없던 존재였으므로 "야생"일 수 없다고 반박하며 반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가축들이 점차 방목되며 야생화되기 시작하면서 소유권을 증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돼지는 야생에서 새끼를 낳는 경우가 많았고, 그 돼지들이 어느 암퇘지의 자손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체서피크 지역의 정치적 논쟁은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시점에서 동물이 야생화되었는지를 둘러싼 문제에 집중되었다.⁽³⁶⁾

체서피크와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몇몇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극명한 차이도 존재했다. 제임스타운이 대부분 남성들에 의해 세워졌다면, 플리머스는 가족 단위의 정착이었다. 이는 식민지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차이였다. 제임스타운은 처음에 ‘단기 수익’을 노린 사업지로 여겨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들이 이주하긴 했지만 문명적인 안정이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또한 영국 정부는 버지니아로 스스로 비용을 부담해 건너온 이들에게 넓은 토지를 부여했고, 이는 향후 남부의 플랜테이션 문화로 이어졌다. 반면 뉴잉글랜드는 마을 중심의 농장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가축을 방목하기도 했지만, 더 많은 가축들이 마을 농장이나 공동 초지에서 사육되었다. 또한 토지를 효율적으로 개간하려는 노력도 더 적극적이었다. 이는 인간과 가축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고, 숲에 서식하던 야생동물로부터 가축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³⁷⁾

이처럼 다양한 차이가 있었지만, 두 지역 모두 돼지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돼지는 새로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숲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북미에는 아직 울창한 숲이 존재했고, 일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참나무와 밤나무는 유럽에서 돼지들이 오래도록 먹어 왔던 열매(마스트)를 제공했고, 여기에 북미 특유의 피칸과 히코리나무 열매가 더해졌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광범위한 벌목 이전 시대에 그러했듯, 북미에서도 돼지를 방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돼지는 반야생 상태로 자라게 되었지만, 사육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고 관리도 쉬웠다. 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식민지 생존에 핵심적인 요소였다. 당시 영국 식민지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먹이를 제외하고도 북미에서 돼지가 선호된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북미의 숲이 늑대와 곰 등 육식 동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축들은 이들 야생 동물에 비해 방어력이 약했다. 특히 양은 방어 수단이 전혀 없어 대형 포식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늑대와 곰에게 새로운 먹이원이 생기자 개체수는 증가했다. 소는 잘 먹고 건강한 상태라면 대체로 덩치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야생보다는 농장에서 더 잘 지냈다. 하지만 돼지는 사정이 달랐다. 돼지는 (지금도 그렇듯) 매우 강한 동물이다. 어린 돼지는 늑대나 곰에게 잡아먹히기도 했지만, 다 자란 야생 멧돼지는 검은곰을 죽이기도 했다.⁽³⁸⁾

이러한 이유로 식탁은 자연스럽게 돼지고기 중심이 되었다. 베이컨, 햄, 염장 돼지고기, 소시지 등이 풍부하게 유통되었고, 신선한 고기도 자주 즐겼다. 추수감사절의 주요 요리로는 칠면조와 함께 돼지고기 로스트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1600~1700년대의 큰 잔치에서는 가능한 한 여러 메인 요리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³⁹⁾

그러나 풍요가 곧 편리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돼지는 파괴적인 동물이라 밭을 울타리로 막지 않으면 작물뿐 아니라 땅까지 뒤엎어 경작이 어려울 정도였다. 중세 유럽의 농부들이 그랬듯, 신세계의 농부들도 돼지가 울타리를 뿌리로 파헤치는 것을 막기 위해 돼지 코에 링을 끼웠다. 또한 울타리 감시인을 임명하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호그리브(hogreeve)’라는 공식 직책도 생겼다. 리브(reeve)란 규제를 집행하는 사람을 뜻하며, 이는 ‘셰리프(sheriff)’의 어원인 ‘셔리프(shire reeve)’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호그리브는 피해를 평가하는 역할도 했지만, 본래 목적은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었다.⁽⁴⁰⁾

뉴잉글랜드에서는 방목 중인 돼지를 관리하고, 체서피크 지역에서는 반야생 상태의 돼지를 숲에서 찾아내는 일이 정착민에게 큰 도전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비교적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축의 도입은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실제로 원주민들의 삶에 미친 충격은 정착민의 도착 그 자체보다도 훨씬 더 컸다. 특히 돼지는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정착민들과의 오해와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식량 문제였다. 돼지들이 먹고 있던 도토리나 밤은 원래 원주민들이 식량으로 삼던 것이었다. 하지만 돼지는 마스트(견과류)뿐 아니라 모든 것을 먹었다. 돼지는 조개, 굴, 과일, 버섯까지 먹었고, 원주민들이 사냥하던 사슴이나 야생동물들은 숲에서 먹이가 줄어들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또 돼지는 어린 동물도 잡아먹기 때문에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상황에서 가축은 숲에 서식하던 야생동물뿐 아니라 원주민의 작물에도 피해를 입혔다. 원주민들은 밭에 울타리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돼지가 침입해 경작지를 망치는 일이 많았다.

1666년, 메릴랜드의 한 원주민은 식민지 의회에 “우리에게 어디서 살아야 하고, 어떻게 돼지와 소들로부터 미래를 지킬 수 있을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⁴¹⁾

 

하지만 원주민과 돼지의 관계는 단순히 “모든 걸 먹어치우는 존재에 대한 증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초기 식민자들은 원주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농사를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원주민들은 땅이 척박해지면 다른 곳으로 옮겨 경작했고, 철 따라 이동하는 동물을 따라 사냥하며 살아갔다. 이에 식민자들은 원주민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 정착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식민자들이 원했던 것은 원주민이 소를 기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는 울타리와 마구간이 필요하고 정착을 전제로 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주민은 가축을 기른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소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면, 돼지는 이해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특히 야생화된 돼지는 사냥을 통해 쉽게 확보할 수 있었고, 키우는 데도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원주민들은 돼지를 점차 이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사냥한 돼지들이 대개 식민자들의 소유였다는 데 있었다. 돼지가 숲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은 이 돼지들이 누군가의 소유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다툼이 생겼다. 이 돼지들은 분명히 식민자들이 기르던 돼지였고, 도난이나 손해로 여겨졌다. 따라서 설명과 협상, 그리고 보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다행히도 원주민 문화에도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뉴잉글랜드에서는 한동안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점차 사냥하던 동물이 사라지고, 원주민들은 돼지고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었다. 식민지로 이주하는 정착민의 수는 계속 증가했고, 돼지도 계속해서 번식했다. 어떤 원주민들은 더 서쪽으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소와 양은 이미 식민자들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일부 원주민들은 그 동물들을 죽이거나 고의로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저항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돼지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나 식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식민자들의 유입은 멈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서의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로 왔지만, 모든 이가 자발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빈민, 고아, 정치적으로 반항적인 사람들(특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을 식민지로 강제 이주시켰고,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유를 얻은 계약노동자들도 북미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인구는 빠르게 증가했지만, 가축의 수는 그보다 더 빠르게 늘어났다.

 

1600년대 중반, 특히 뉴잉글랜드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는 주요 변화가 또 하나 발생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인도 제도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사탕수수를 심기 위해 현지 식량 생산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 인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늘어나는 돼지 떼는 이를 실현 가능한 현실로 만들었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salt pork)는 뉴잉글랜드에서 매우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으며, 소금대구(salt cod)와 함께 담배가 체서피크 지역에서 누렸던 경제적 성공에 상응하는 ‘현금 작물(cash crop)’이 되었다. 당시 뉴펀들랜드부터 버지니아까지 이미 뉴잉글랜드의 소금 돼지고기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카리브해에서의 수요가 폭증하면서 농부들은 이제 생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든 돼지 생산물이 식민지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돼지고기와 옥수수는 전 식민지 인구의 식단의 기초였다. 햄이나 베이컨은 어디서든 흔했고, 모든 콩 요리는 반드시 소금 돼지고기를 넣어 만들었으며, 요리용 기름은 라드(돼지기름)뿐이었다. 옥수수는 식민지인들을 자립하게 만들었고, 돼지는 그들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둘 다 함께 식민지인들을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도왔다.

1670년까지 뉴잉글랜드에는 5만 명이 넘는 식민지인이, 체서피크 지역에는 4만 명 이상의 식민지인이 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여전히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가축이 가해지는 토지에 대한 압박은, 이제 식민지인과 원주민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점점 더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무역은 점점 복잡해졌고, 원주민은 유럽 상품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유럽 식민지로부터 점점 밀려났다.

1674년에 체결된 웨스트민스터 조약은 오랜 기간 이어졌던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갈등을 끝냈고, 그 결과 영국은 뉴욕과 뉴저지 식민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1681년, 찰스 2세 국왕은 자신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윌리엄 펜에게 광대한 신대륙 토지를 하사했고, 펜은 그 땅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펜실베이니아라 명명했다. 찰스의 동생인 요크 공작(후에 제임스 2세, 뉴욕의 이름 유래)이 펜에게 델라웨어 지역도 주면서, 뉴잉글랜드와 체서피크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지역, 즉 ‘미드애틀랜틱(Mid-Atlantic)’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착민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와의 갈등, 원주민과의 마찰뿐 아니라 기후 역시 혹독했기 때문이다. 남부 식민지는 가뭄에 자주 시달렸고, ‘소빙기’는 여전히 영향을 미치며 식민지 사람들과 가축들을 괴롭혔다. 특히 1694~1695년의 겨울은 그 혹독함과 얼마나 많은 가축이 있었는지를 함께 보여주는 사례였다. 메릴랜드에서만도 이 겨울에 2만 5천 마리의 소와 6만 마리의 돼지가 동사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는 성실한 노동과 소금 돼지고기를 통해 점점 부유해졌고, 이에 따라 점점 더 독립적인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이는 영국 왕실의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뉴잉글랜드가 영국 외의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한다는 점은 왕실의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이에 영국은 뉴잉글랜드의 무역, 정치적 방향성, 심지어 종교까지 통제하려 들었으나, 이 시도들은 복잡했고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소금 돼지고기를 선원들에게 팔고 수출하는 데 있어 뉴잉글랜드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체서피크 지역도 참여하여 절이거나 절인 형태의 돼지고기를 생산했다. 공급이 증가함에 따라 수요도 늘어났고, 1700년대 후반에는 매사추세츠와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유럽과 카리브해로 엄청난 양의 통조림 형태의 돼지고기가 수출되었다. 예를 들어, 1774년 한 해에만 버지니아에서 쿠바, 마데이라, 포르투갈로 6만 개의 돼지고기 배럴이 수출되었다.

물론 1774년은 식민지 시대의 종말이 임박한 시기였다. 돼지의 이야기는 계속되겠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제 ‘미국의 돼지’에 대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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