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5장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5장
Pigs, Pork, and Heartland Hogs: From Wild Boar to Baconfest
제5장 — 미국의 돼지
미국 문화, 농업, 식생활을 형성하다
미국 독립혁명은 식민지인들에게 단순히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생존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1700년대 내내, 특히 북부 식민지에서는 토지 부족이 큰 문제였다. 도시는 혼잡했고, 그에 따른 문제들—특히 전염병의 빠른 확산—도 심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확장할 수 있는 땅이 없었다. 1770년대 초, 평균적인 뉴잉글랜드 농부는 초기 정착민 세대에 비해 3분의 1밖에 안 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인구의 거의 절반이 자급자족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대응했다. 가족 규모를 줄이거나, 물물교환 시스템을 만들거나, 낚시, 덫 사냥, 혹은 다른 농장의 품팔이로 생계를 보충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든, 비자발적으로든 말이다.¹
1754년부터 1763년까지 이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 이후—이 전쟁에서 식민지인들은 영국 편에 서서 싸웠다—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들이 이제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광대한 땅을 획득했고, 식민지인들은 이미 오하이오 계곡의 비옥한 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1763년, 조지 3세는 포고령(Proclamation)을 발표했다. 그 내용 중 하나는 식민지인들이 이 땅으로 이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763년 왕실 포고령은 또한, 전쟁 이전에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동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단, 원주민과의 교역은 금지되지 않았고, 다만 면허가 필요하다는 조건이 붙었다.)² 이 조치는 오하이오강 계곡에 이미 농장을 일구고 살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그곳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도 무너뜨렸다.
이 포고령의 본래 목적은, 식민지인이 원주민의 땅에 들어갔다가 공격받는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 영국군이 그들을 구하러 출동해야 하는 상황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혼잡하고 경작 가능한 토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 포고령은 식민지인들에게 단지 또 다른 방식의 영국 통제 수단처럼 보였고, 이는 곧이어 비영국산 식품이나 물품을 구입한 이들을 처벌하는 세금 조치들과 맞물리며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가 모국의 이익을 위한 존재임을 분명히 했고, 식민지인들이 지나치게 자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독립혁명의 원인은 단지 이 포고령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식민지 불만을 증폭시킨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고, 혁명을 통해 결국 해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성장하는 국가
신생 도시들의 팽창과 농장의 축소는 뉴잉글랜드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체서피크와 중부 대서양 식민지에서도 땅은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은 식민지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었지만, 미래를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선물은 바로 토지에 대한 약속이었다. 혁명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획득한 광대한 땅은, 일부 프랑스의 요새와 교역소를 제외하면 거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국가는 이제 미시시피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북서부 준주(Northwest Territory)’라고 불렸으며,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 땅을 **측량(survey)**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자신들이 무엇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파악해야 했고, 동시에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의 무질서한 토지 분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체계적인 구획 계획을 수립하고자 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급자족과 독립이 가능한 농민의 나라를 꿈꾸었다. 많은 독립전쟁 참전 군인들이 전쟁 중 제공한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토지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정부는 그것이 공정하고 잘 조직되도록 하려 했다. 이에 따라 **1785년 토지조례(Ordinance of 1785)**가 제정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영토를 **격자 무늬(grid pattern)**로 나누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각 **타운십(township)**은 한 변이 6마일인 정사각형으로 설정되었으며, 각각은 다시 640에이커 단위의 농장으로 쉽게 분할할 수 있었다. 이 격자형 토지 구획은 오늘날에도 미국 중서부 상공에서 항공기로 보면 뚜렷이 관찰된다.
측량사(surveyor)는 이미 교육받은 모험심 강한 남성들에게 존경받는 직업이었고, 이제는 신생 국가 정착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독립전쟁 이전부터 오하이오 강 계곡 지역에 불법적으로 선점해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법적으로 해당 지역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803년,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거대한 영토를 매입하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이 거래가 바로 유명한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며, 이를 통해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확대되었다. 이 지역은 **신 북서부 준주(New Northwest Territory)**가 되었고, 이제 미국은 로키산맥까지 뻗어나가게 되었다.
한편, 독립전쟁 당시 영국 편에 섰던 플로리다는 전쟁 후 다시 스페인의 소유로 돌아갔고, 남서부 지역 대부분도 여전히 스페인령이었다. 또한 러시아, 영국, 스페인은 오늘날 오리건, 워싱턴, 브리티시컬럼비아 대부분을 포함하는 오리건 준주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미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다에서 바다까지(sea to shining sea)” 확장을 이루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이 시점에서 연방 정부는 관리하고 개척할 토지가 충분히 많았다.
토지 구획 계획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땅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루이스와 클라크가 대륙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부터, 토머스 제퍼슨은 조지 워싱턴과 함께 개척민들이 서부로 이동하기 쉽게 만들 넓고 현대적인 도로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제퍼슨은 1806년 3월, 도로 건설을 승인하는 법안에 서명했고, 이는 신생 국가 최초의 연방 자금으로 건설된 고속도로가 되었다. 이 도로는 **내셔널 로드(National Road)**라 불리게 되었고, 후에 **“국가를 만든 길(The Road that Built the Nation)”**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도로 폭은 **32피트(약 9.8미터)**였고, 포장도로였다. 1811년, 메릴랜드 주 **컴벌랜드(Cumberland)**에서 공사가 시작되어 **컴벌랜드 로드(Cumberland Road)**라는 이름도 붙었다.
하지만 곧 미국 정착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만든 사건, 즉 **1812년 전쟁(War of 1812)**이 발발하면서 도로 건설은 중단된다. 당시 영국 정부는 자신들이 여전히 식민지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생각했고, 미국의 모든 시민들을 배신자로 간주했다. 이에 영국은 캐나다에서 쫓겨나고 소외된 북미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해 미국에 대한 보복과 식민지 탈환 작전에 이용하고자 했다. 물론 영국은 이를 원주민들을 위한 반환이 아닌, 자신들의 재탈환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은 오대호 지역을 따라 남하하며 미국 동부 해안으로 진격했고, 영국 해군은 해상 공격을 가했다. 정착지는 파괴되고, 요새는 함락되었으며, 워싱턴 D.C.는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결국 볼티모어 전투에서 미군이 영국군의 진격을 막아내면서, 영국의 미국 재점령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른바 **“제2의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1812년 전쟁은 서부 개척에 대한 긴박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사람들은 안전은 땅을 빨리 차지하는 데 있다고 느끼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내셔널 로드 공사도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이후 약 25년간 이 도로는 **북서부 준주(Northwest Territory)**로 뻗어 나가며, 당시 일리노이 주 수도였던 **반달리아(Vandalia)**에 이르기까지 서부를 여는 길이 되었다.
하지만 내셔널 로드가 서부로 이동하는 유일한 경로도 아니었고, 가장 이른 경로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미지의 땅으로 들어간 이들은 바로 **백우즈맨(backwoodsmen)**이라 불리는 개척민들이었다. 이들은 손도끼와 심을 옥수수 씨앗 몇 줌 등 극소량의 짐만 챙겨 도보로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물을 따라 이동하기를 선호한 사람들은 **오하이오강(Ohio River)**을 따라 오하이오와 켄터키 지역으로 들어갔고, **오대호(Great Lakes)**도 또 다른 진입 경로였다. 이외에도 이전 탐험가들이 남긴 자취들이 곧 **개척로(track)**가 되어 서부로 향하는 길이 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땅을 향해 퍼져 나갔다. 이들을 움직인 동력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과, 출생이 아닌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구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토지의 약속”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새로운 땅은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풍요의 실현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 풍요의 상징은 다름 아닌 먹을거리에서 시작되었다.
개척지에서의 음식은 대체로 열악했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프론티어는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1812년 전쟁이 끝난 지 불과 50년 만에, 서쪽으로 향하던 미국인들은 로키산맥에 이르기까지 정착을 마쳤고, 대륙횡단철도 건설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짧은 기간은 **미국 음식 문화(American foodways)**의 초기 발전기를 이루었다.
옥수수와 돼지가 미국을 만든 것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둘은 동부 초기 정착민들의 생존과 번영을 도왔고, 이후 서부 개척지에서도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누구도 옥수수와 돼지만 먹고 살고 싶어 하진 않았지만,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서부 확장이 본격화될 무렵, 미국인들은 이미 200년에 가까운 음식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옥수수(당시에는 여전히 **“인디언 콘(Indian corn)”**이라 불림)는 이미 일상 식재료로 정착했고, 사람뿐 아니라 가축 사료로도 아주 유용했다. 미국 농업은 곧 “옥수수-가축” 중심의 체계가 되었고, 옥수수는 재배가 쉽고 수확량도 많았기 때문에, 고기 역시 풍족해졌고, 자연스레 고기 소비량도 높아졌다.
1800년경, 미국인의 연간 평균 고기 소비량은 1인당 150~200파운드에 달했다. 하인들조차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고기는 고된 노동과 혹독한 겨울을 버티기 위한 열량 공급원이었고, 당시 계속 이어지고 있던 소빙기의 영향으로 북부에서는 여전히 긴 겨울이 존재했다. 또한, **고기를 먹는 것은 펠라그라(niacin 결핍병)**를 예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옥수수만 먹고 살면 나이아신 부족으로 질병이 생기지만, 고기가 이를 막아줬다.
그리고 고기 중 가장 쉽고 풍부한 공급원은 돼지였다. 물론 소고기가 더 높은 가치를 지녔고, 부자나 명절 음식으로 여겨졌지만, 일상의 고기는 어디까지나 돼지고기였다.
탐험가 루이스와 클라크가 탐험을 시작할 때 가지고 간 식량 목록에는 통에 절인 돼지고기 3,700파운드, 돼지기름(lard) 700파운드, 그리고 옥수수 6,000파운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의 **백우즈맨(backwoodsmen, 숲속 개척자)**들은 사냥 기술에 의존했지만, 조만간 모두 돼지를 키우게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의 테네시 출생지를 발굴한 결과, 출토된 뼈의 92% 이상이 돼지 뼈였다고 한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도 자신을 "마스트 먹고 자란 변호사(mast-fed lawyer)"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도토리나 너도밤나무 열매 등을 숲에서 주워 먹고 자란 반야생 돼지들처럼 자랐다는 뜻이다.
서부로 출발하는 커버드 왜건(덮개 마차)에는 성인 1인당 베이컨이 75파운드씩 실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부 개척민들의 시작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하지만 개척자들은 베이컨만 챙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돼지도 함께 데리고 갔다.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할 때 돼지는 옥수수만큼이나 어디서든 잘 자라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서부로 향한 돼지들은 다리가 길고, 몸통은 짧으며, 털은 거칠고,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강인한 개체들이었다. 이들의 성질머리 덕분에 ‘그루터기 파는 놈(stump-rooter)’, ‘뱀 잡아먹는 놈(snake-eater)’, ‘상처 만드는 놈(wound-maker)’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새끼돼지들은 마차에 태워 갔지만, 성체 돼지들은 그냥 주인 옆에서 걸어가거나 아예 풀어두면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녔다. 놀랍게도 끝없는 야생이 펼쳐진 상황에서도, 주인이 부르면 돼지들이 돌아왔다.
풀어놓은 돼지들은 도토리, 열매, 뿌리, 풀, 작은 동물 등 뭐든 닥치는 대로 먹었다. 이는 동부에서처럼, 프론티어에서도 돼지들이 원주민의 식량 자원을 고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돼지들이 가장 좋아한 건 옥수수였기에, 인디언 콘 보관 장소를 찾아낸다면 큰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농장이 자리 잡은 이후에는, 돼지들이 옥수수를 좋아하는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옥수수를 돼지에게 먹이는 건, 곧 옥수수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돼지들은 결국 “다리에 달린 옥수수밭(cornfields on legs)”, 또는 **“다리 달린 옥수수(corn on the hoof)”**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된다.
**‘옥수수와 돼지(hogs and hominy)’**는 서부로 확산되던 농업 방식을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다. 이 조합이 워낙 상징적이어서 **1830년대에는 테네시주가 일시적으로 ‘돼지와 옥수수의 주(Hog and Hominy State)’**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테네시의 옥수수 및 돼지고기 생산량이 워낙 막대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러 이주한 가족들에게 돼지는 가족이 먹을 식량이자 교환 수단이었다. 우유를 얻기 위해 젖소를 데려올 수는 있었지만, 소고기는 애초에 식단에 없었다. 하루 세 끼, 심지어 그 이상도 옥수수와 돼지고기가 식탁을 채웠고, 겉보기에 돼지고기 요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염장한 돼지고기로 맛을 냈다.
돼지가 새로운 환경에 금방 적응하는 점은 큰 장점이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적은 인원으로도 도축과 가공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 개척가정에 이상적이었다. 이웃이 생긴 이후에는 고기와 노동을 나눌 수 있었지만, 정착 초기에는 스스로 자급자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리의 정교함은 생존이 확보된 이후의 문제였다. 1830년대, 미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소설가 **프레더릭 매리엇(Frederick Marryat)**은 귀국 후 미국의 음식 상태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미국 요리는 그 지역 인구의 세련됨의 정도와 정확히 비례한다. 주요 도시의 개인 가정에서는 런던이나 심지어 파리에서도 보기 힘든 훌륭한 요리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인구가 줄어드는 시골로 갈수록 요리 수준도 점차 떨어진다. 결국 먼 서부에 이르면 ‘옥수수빵과 지방 돼지고기(common doings)’ 수준에 이른다. 개척지에서는 돼지고기를 가장 쉽게 키울 수 있으며, 미국인들은 돼지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
미국 초기 정착민들은 여러 유럽 국가 출신이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초기 미국 음식문화는 조리 전통보다는 생존의 필요성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행히 옥수수는 많은 이들에게 낯선 식재료였지만, 돼지고기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익숙한 음식이었다.
미국이 형성되던 당시에는 분명한 국가별 요리 전통이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800년대 중반 중산층이 생겨나기 전까지, 음식은 ‘국가’보다는 ‘계층’에 의해 정의되었고,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가 식생활을 결정했다. 나중에 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이 우리가 오늘날 특정 국적의 전통 요리로 여기는 음식들을 들여오게 되지만, 1800년대 초 미국 요리는 주로 ‘옥수수와 돼지고기’라는 가장 안정적인 재료에 의존해 발전해 갔다.
정착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는, 유럽에서 들여온 사과, 양파, 완두콩 등 과일과 채소도 텃밭에서 재배되었지만, 옥수수와 돼지고기는 여전히 식단의 핵심이었다. 옥수수는 미국 중서부의 한 지역 이름이 될 정도로 중요했고, 돼지고기는 1600년대부터 가장 중요한 육류로 자리잡았으며, 1900년대 초까지도 주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물론 유럽에서 전해온 요리법도 있었고, 특히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돼지고기를 다루는 방식은 켈트족으로부터 유래된 베이컨과 햄, 로마에서 내려온 로스트와 소시지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신대륙에서도 그대로 자리 잡았다. **염장 돼지고기(salt pork)**는 20세기까지도 생존식이자 조미료로서 필수였고, **라드(lard)**는 거의 모든 요리에 사용되는 조리용 지방이었다.
많은 이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에, 음식문화에는 절약 정신이 깊이 뿌리내렸다. 오늘날 ‘코끝부터 꼬리까지 먹는다’는 철학, 즉 ‘노즈 투 테일’(nose-to-tail) 식문화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돼지 족발은 별미로 여겨졌고, 돼지 머리는 삶아서 뼈를 바르고 **수스(souse), 브론(brawn), 헤드치즈(headcheese)**로 가공되었다. 이 명칭은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다르지만, 만드는 방식은 거의 비슷했다. 1800년대 후반 한 요리책에서는 돼지새끼를 통째로 구운 뒤, 간과 뇌, 심장을 다져서 그레이비에 넣는 레시피도 실려 있다.
소시지는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래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독일어권 출신 이민자들이 가장 다양한 소시지를 가져왔다. 다양한 가축의 내장, 특히 **자연 케이싱(natural casing)**으로 쓰이는 큰 창자는 항상 소시지 제조에 사용되었고, 작은 창자는 소시지 외에도 **치터링스(chitterlings)**라는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치터링스’라는 단어는 중세 영어에서 1200년대에 등장했으며, 내장을 먹는 문화는 유럽 전역에서 보편적이었다. 오늘날도 프랑스에서는 **안두이예트(andouillette)**라는 소시지 안에 내장을 채워 먹는다. 그러나 미국 남부의 치터링스 전통은 영국에서 유래했으며, 1627년경 버지니아에서도 이미 먹고 있었다. 플랜테이션 문화가 자리 잡으며, 백인과 흑인이 함께 도축 작업에 참여했고, 치터링스도 함께 만들었지만 식사는 따로 했다. ‘치터링스’를 줄인 형태인 ‘칫린스(chitlins)’는 1842년 이후부터 등장했고, 오늘날 미국 남부 요리,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식문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노예무역은 미국 남부 요리문화에 의도치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땅콩(peanut)**은 남아메리카 원산이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아프리카로 옮겨 심었고, 저렴한 노예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1700년대 아프리카 노예들이 버지니아로 이송될 때, 땅콩도 함께 옮겨졌다. 처음에는 가축 사료나 가난한 이들의 식품으로 취급받았지만, 이후 돼지에게 먹이로 사용되면서 **스미스필드 햄(Smithfield ham)**과 같은 전설적인 남부의 햄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한 유럽 지역, 특히 영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국계 정착민들은 그들의 문화, 언어, 정치 및 법 개념을 미국에 가져왔으며, 미국은 대부분 이를 채택했다. 이들은 음식에 대한 생각도 함께 가져왔고, 앞서 언급한 **치터링스(chitterlings)**뿐 아니라 **콜라드 그린(collard greens)**과 같은 잎채소를 즐겨 재배했고, 로스트, 스튜, 파이, 커스터드, 소시지, 수프 등 수천 년에 걸친 교역·이주·침략(예: 로마 제국, 노르만 정복 등)으로 발전된 음식문화를 미국에 이식했다.
미국 초기 요리책들은 새로운 식재료 몇 가지를 제외하면 사실상 영국 요리책 그대로였고, 사람들이 주(state)나 지역에 따라 자신과 음식의 정체성을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조차 큰 차이는 없었다.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들 역시 음식문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오크라, 참깨, 흑눈콩(black-eyed peas) 등을 들여온 이들은 특히 남부 요리에 영향을 주었지만, 초기 남부 음식문화는 북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과 북 모두 옥수수와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삼았고, 경우에 따라 추가 식재료가 보완되었을 뿐이었다. 유럽처럼, 무엇을 먹는가는 지역적 정체성보다는 계층과 소득,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예를 들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수산물이 돼지고기와 옥수수를 보완했으며, 부유층은 식단에 쇠고기와 차(tea) 같은 사치를 더했다.
이러한 흐름은 남북전쟁 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부는 전쟁에서 승리한 배경 중 하나가 식량의 우세였으며, 전쟁 이후 산업화와 부의 집중으로 더 번영하게 되었다. 반면 폐허가 된 남부는 생존 자체가 과제였다. 북부는 점점 도시화되었고, 남부는 여전히 농촌 중심이었기 때문에, 남부 음식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상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어온 음식이었다. 북부에서는 더 이상 질긴 잎채소나 기름지고 질긴 돼지고기 부위를 먹지 않아도 되었고, 점차 쇠고기를 구매할 여력도 생겼다.
반면 남부의 시골 주민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땅과 환경에 접근할 수 있었다. 북부 도시에서는 사람 수는 많았지만 직접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식재료의 다양성은 오히려 더 제한되었다.
서부로의 확장이 진행되었을 때에도, 음식문화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스페인계 정착지와의 접촉, 또는 다양한 유럽계 이민자의 유입에 따라 새로운 식재료가 더해졌을 뿐이다. 루이지애나의 케이준(Cajun)과 크리올(Creole) 요리는 동부 영국 문화권의 영향 밖에서 발전한 예외적인 사례였고, 이외에는 음식과 지역, 계층, 민족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20세기 들어서야 본격화되었다.
결국, 당시의 음식은 모두 통칭하여 **"아메리칸 푸드"**였을 뿐이다.
무엇을 구할 수 있었는가”라는 주제를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고기와 채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실제로 일반 가정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작고 실용적인 **주물(鑄物) 주방용 난로(스토브)**가 발명된 것은 1834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은 커다란 벽난로에서 요리를 했다.
이런 조리 환경은 조리 방법에 큰 제약을 줬다.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굽는 방식, 커다란 솥에 끓이는 스튜, 그리고 뜨거운 숯불 속에 넣는 더치 오븐 정도가 주요 방법이었다. 이 방식은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긴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불에 타는 사고는 생각보다 흔했다.
**병조림(캔닝)**은 180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졌고, 그것도 처음엔 유리병을 사용한 방식이었다. **프랑스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는 이 보존 방법을 발명해 나폴레옹 군대의 보급 성공에 기여한 공로로 1만 2천 프랑의 상금을 받았다. 이후 고기, 해산물, 과일, 채소, 수프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식품이 병에 담기기 시작했다.
병조림 기술은 곧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전해졌으며, 영국에서는 유리 대신 철제 캔에 주석을 입히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물론 이것 역시 군대를 위한 보급 식량의 성격이 강했다. 주석 캔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820년경이며, 이 당시에도 모두 수작업으로 절단하고 용접해야 했다. 이어 이 기술은 미국으로도 전파되었다.
초기의 주석 캔 조림은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깡통을 여는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최초의 깡통 따개는 1858년이 되어서야 발명되었다.
**남북전쟁(1861~1865)**이 시작될 무렵, 여전히 수작업으로 캔을 만들던 미국의 통조림업자들은 북군에 식량을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군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절대 상하지 않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그 결과 캔 음식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게 된다. 통조림 산업은 급성장했고,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표 등록 제품 중 하나가 돼지고기와 관련된 제품이다. 바로 **언더우드 데블드 햄(Underwood Deviled Ham)**으로, 1868년에 출시되어 1870년에 상표 등록되었으며, 지금도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다.
캔 음식의 인기는 너무나 높아 품질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걱정이 있어도, 캔 덕분에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큰 매력이었다. 아무리 성공적인 농장을 운영하더라도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식량이 고갈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캔은 혁명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오픈 파이어(벽난로)에서 요리하던 시대에서 다구 burners(버너가 여러 개인 스토브)**와 오븐이 달린 주방기구로 바뀌면서 요리의 방식 자체가 변혁을 맞이했다. 일부는 직화구이의 풍미를 그리워했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요리법의 등장을 환영했고, 겨울철에 여름 채소를 식탁에 올릴 수 있다는 기쁨을 누렸다.
흥미로운 사실은, 남북전쟁 시기 요리책 출판의 폭발적 증가도 함께 일어났다는 점이다. 군에 보낼 물자, 옷, 붕대 등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여성들이 서로의 요리법을 모아 요리책을 만들어 판매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20년경부터 1865년까지의 시기에 가정 요리의 세계는 기술적으로도, 정보 공유 측면에서도 커다란 전환을 맞게 된다.
태도와 선택의 변화
미국 도시들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뉴욕은 1810년에서 1860년 사이에 인구가 약 750% 증가했으며, 그 속도를 도시 행정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쓰레기와 오염 문제는 심각해졌고, 이 시점에서 뉴욕은 아직 맨해튼 섬에만 국한된 도시였다.
1810년대 이후부터는 맨해튼에 약 2만 마리의 돼지가 살고 있었다. 도시 빈민층은 이 돼지들을 의지해 생활했고, 거리에서 사육되었다. 쓰레기를 먹는 돼지의 특성 덕분에 사육비가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 마리의 큰 돼지들이 도시의 배수로와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풍경은 위생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안전에도 위협이 되었다. 뉴욕은 돼지를 키운 유일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 최대 도시였던 만큼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직면해야 했다.
문제는 단순한 사육에 그치지 않았다. 1850년경, 뉴욕 시내 정육점에서는 매주 약 1만 마리의 가축(소, 양, 돼지 포함)을 도축했다. 이는 도시의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진 뉴욕 시민들은 점점 내장을 포함한 ‘코끝부터 꼬리까지 먹는’ 식문화를 꺼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리되지 않은 내장과 부산물은 강으로 버려졌다. 다만, 일부는 이러한 내장 및 부산물을 가공하여 수익을 내는 사업도 생겨났다.
당시 **6번가와 7번가 사이 지역은 ‘호그타운(Hogtown)’**으로 불렸고, 이곳은 돼지를 살찌우는 사육장과 뼈·가죽·지방·내장을 가공하는 공장이 밀집한 곳이었다. 1856년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센트럴파크를 방문했을 당시, **“공원의 땅은 돼지 우리, 도살장, 뼈 삶는 공장의 찌꺼기와 오수로 뒤덮여 있었다. 악취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도시 돼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여러 충돌과 소요 사태를 낳았다. 특히 빈민층은 돼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1859년의 '피거리 전쟁(Piggery War)'**은 맨해튼 돼지 산업을 없애려는 첫 번째 본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맨해튼에서 마지막 돼지가 사라진 것은 1910년 이후였다. 그럼에도, 점차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동부 도시들의 식량 수급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1860년대 후반, 맨해튼 인구가 백만 명에 육박했을 때, 도시 인구에게 필요한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매년 110만 마리의 가축이 필요했다. 도시 외곽에서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도축과 가공은 도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는 중서부(Midwest)의 개척이었다.
서부로 향한 모든 이들이 조그만 집과 먹을 것을 찾아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어떤 개척민들은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를 위한 돼지고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고자 넓은 땅을 찾으며 서부로 향했다. 정말 큰 돼지 떼를 몰고 있던 정착민들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돼지를 방목하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으며, 이상적인 인구 밀도는 제곱마일당 2명 이하였다.
도시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돼지를 기르는 일이 늘면서, 사람과 돼지 모두 양방향으로 오가야 했다. 실제로 철도와 간선도로를 따라 이동한 돼지의 수는 다른 모든 가축을 합친 수보다 다섯 배나 많았다. 1847년,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유료도로에서는 양 692마리, 소 898마리, 말 1,317마리, 돼지 51,753마리가 지나간 기록이 있다. **오하이오에서 메릴랜드, 켄터키에서 버지니아, 테네시에서 앨라배마에 이르는 ‘돼지 드라이브’**는 반복되며 널리 알려진 길이 되었다.
돼지들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도시로 밀려들어 도시민들의 식탁을 채웠다.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가축이 도시로 가는 방법은 이제 도보만이 아닌 철도 운송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도축장까지는 여전히 동물들을 직접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도시의 거리에는 여전히 가축들이 넘쳐났고, 그만큼 많은 피와 내장 등이 처리되어야 했다. 도시민들은 도시 중심에서 도축되는 고기에 여전히 의존했지만, 동시에 그 불결함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커지고 있었다.
그 시점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등장하기에 완벽한 시기였고, **그 새로운 변화는 미국의 ‘하트랜드(Heartland, 중서부)’**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한 ‘장소’의 전환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와 처리 방식의 등장이었다. 철도에 의한 가축 운송은 변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1868년, 조지 해먼드(George Hammond)**가 냉장 철도 화차(refrigerated train car)를 도입하면서, 이제는 살아있는 동물이 아닌 고기가 도시로 운송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의 정육업자들과 육류 가공업자들은 처음에는 이 변화에 반발했고, 생체 동물 운송과 고기 가공으로 부를 쌓았던 이들 역시 반대했다. 시카고에서 **스위프트 형제(Swift Brothers)**가 신선한 고기를 철도로 보내기 시작하자, 뉴욕의 **밴더빌트 가문(Vanderbilt family)**은 그들을 “망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 도시 한복판을 가득 메우던 동물들과, 동네마다 있던 도축장이 사라지면, 도시는 훨씬 더 깨끗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국 스위프트 형제가 승리했다.
프론티어의 고립성은 사라졌다. 1800년대 말까지 미국에는 20만 마일이 넘는 철도가 전국을 연결했다. 철도는 **농촌, 도시, 항구, 가축 시장(stockyard)**을 연결하는 거대한 상업의 거미줄로 확장되었다. 이제는 어떤 것이든 운송이 가능했고, 실제로 엄청난 양의 가축이 철도를 통해 이동했다. 미국의 식량 공급지는 점차 ‘하트랜드’로 집중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