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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와 소고기 이야기

서울 지역 한우 소비문화의 역사와 특성

by Meat marketer 202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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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 한우 소비문화의 역사와 특성

1. 서론: 연구 목적과 범위

서울시는 전통적으로 소고기 소비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 이를 토대로 서울의 향토음식으로 한우 요리를 지정하여 한우 소비를 촉진하고자 합니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제안의 기초자료로서 조선 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한양·경성 포함) 지역 한우 소비문화의 역사·문화·사회경제적 흐름을 종합적으로 정리합니다. 조선왕조 시기의 법제와 사회 인식, 일제강점기의 변화, 해방 이후의 유통 체계와 현대 한우 문화 형성까지를 살펴보고, 서울만의 독자적인 한우 소비문화가 형성된 맥락과 특징을 분석합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 역사적 자료와 문헌, 제도적 근거를 함께 제시합니다.

본 보고서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조선 시대 서울(한양)의 소고기 소비 관련 정책과 사회상, 제도적 구조를 살펴보고, 일제강점기 경성 시기의 소비 확산과 외식문화 변화를 다룹니다. 이어 해방 이후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마장동 축산물시장 중심으로 구축된 소고기 유통체계와 현대 한우 문화의 전개를 고찰합니다. 아울러 서울 지역 주민들의 한우 소비 패턴상의 특징을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문화적 차별성을 분석하고, 끝으로 이러한 논의를 뒷받침하는 주요 역사자료와 문헌을 정리합니다.

2. 조선시대 서울의 한우 소비문화

2.1 조선 전기의 소고기 소비 금지와 예외

조선 전기에는 농경 사회의 기반인 소의 노동력(축력) 보호를 위해 소 도살 및 쇠고기 판매를 엄격히 금지하는 법제가 시행되었습니다​

. 태조 이래 제정된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 및 이후 *《경국대전》*에는 “함부로 소를 잡지 말라”는 우금령(牛禁令)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농사에 필수적인 **역용우(耕牛)**를 보호하려는 국가 정책으로, 조선 건국부터 국가 이념으로 강조되었습니다​

. 왕실과 관청에서는 죽은 소의 고기만 관허를 받아 팔 수 있도록 했고, 일반 백성이 임의로 소를 잡는 것은 중죄로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금지령으로 인해 한양 도성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일반인의 쇠고기 식용이 제한되었고, 소 도살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쇠고기 식용 문화가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국가의 법령에도 불구하고 지배계층인 양반과 관료들부터 쇠고기를 즐겨 먹는 풍조가 있었고​

,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도 소고기에 대한 기호가 존재했습니다. 조선 전기 15세기 후반 경에는 이미 쇠고기 식용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어, 엄격한 법령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이에 따라 정부는 완전한 금지보다는 예외적이고 제한적인 관허 도살 체계를 마련하게 됩니다.

조선 전기부터 국가 제례 등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소를 도살하였는데, 예컨대 종묘나 사직 등 국가 제사에는 희생으로 소를 바쳤고, 그런 의례 때는 합법적으로 도살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자연사한 소의 고기는 관청의 허락 하에 판매를 허용하였으며​

, 일부 관청이나 기관에서는 자체적으로 소를 잡아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경로 이외에 **몰래 소를 잡는 사도(私屠)**도 성행하여, 적발되지 않은 채 은밀히 쇠고기를 유통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 심지어 관원이 도살사업에 직·간접 가담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도 빈번했을 정도로, 쇠고기에 대한 수요와 이윤은 꾸준히 높았습니다​

.

왕실 차원에서도 소 보호를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조는 농민경제 안정을 위해 **“식용으로 잡는 소는 돼지로 대체하라”**고 명하여 백성들이 가급적 돼지고기를 먹도록 권장하였는데​

, 이는 소의 번식을 독려하고 도살을 줄여 **축우(蓄牛)**를 보호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법으로는 소고기 식용을 막으려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예외와 위반이 속출하며 서울 도성 내에도 은밀하게 쇠고기 소비문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2.2 조선 후기의 쇠고기 공급 체계: 현방(懸房)과 백정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도시 인구 증가와 상업 발달로 쇠고기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금지만으로 통제를 하기보다 관허 도축 및 판매체계를 제도화하였습니다​

. 그 핵심이 된 것이 한양의 “현방(懸房)” 제도입니다. 현방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성균관에 소속된 관허 푸줏간(정육점)**으로, 국가로부터 소 도살과 쇠고기 판매의 독점권을 인정받은 곳이었습니다​

. ‘고기를 걸어 놓고 판다’는 의미에서 “현방”이라 불렀으며, 오늘날의 푸줏간과 유사한 역할을 했습니다​

. 현방 운영권은 일반 상인이 아닌 **성균관의 노비 출신 하층 계층인 반인(泮人)**들에게만 부여되었습니다​

. 이들은 성균관에서 제례에 쓸 희생용 가축을 잡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는데, 국가가 그들에게 쇠고기 판매권을 주어 생계를 잇게 하는 대신 일정 세금을 거두는 구조였습니다​

.

조선 중기 이후로 도살업은 이러한 반인, 나아가 백정 계층의 전업이 되었고, 이들은 신분제 사회에서 천민으로 취급받았습니다​

. 원래 조선 초에는 양인 신분의 전문 도살업자(거골장)도 있었으나 중기 이후 사라지고, 도살은 전적으로 백정의 몫이 되어 최하층 신분으로 고착된 것입니다​

. 그러나 이들이 운영한 현방은 국가 공인 사업이었기에 조선 후기 서울에서 쇠고기를 공급하는 공식 창구로 기능했습니다. 현방에서 도축된 쇠고기는 걸어서 파는 형태로 시장에 공급되었고, 거기서 나온 수익 일부는 조세(贖錢)로 거두어져 성균관 유생들의 학업 지원 등 공적인 목적에 쓰였습니다​

. 《한경지략》 등에 따르면 한양 도성 안팎(성저십리) 모두 23곳의 현방이 존재했고,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에는 서울에 24개의 푸줏간이 있다는 언급이 있어 시기별로 10여 개에서 20여 개 현방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러한 현방은 육의전처럼 국가가 지정한 주요 시전은 아니었지만, 우금령 속에서 예외적으로 허가된 독점적 시전으로서 통공정책 이후에도 그 독점권을 유지했습니다​

.

현방 운영자(반인)들은 국가에 세금(속전)을 바치는 대신, 자체적으로 쇠고기 판매 이익을 추구하며 도성 내 쇠고기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 이들은 관청의 공식 가축 공급망(우전 牛廛)을 통하지 않고 직접 지방에서 소를 들여와 도축하는 등 나름대로 경쟁력을 키워나갔습니다​

. 그 결과 조선 후기 서울에는 관의 관리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쇠고기 유통망이 형성되었고, 서민들도 시장에서 돈만 있으면 공식적으로 쇠고기를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다만 이 공식 시장 가격이 부담되거나 공급이 달릴 경우, 불법 도축과 암시장도 여전히 병존하여 서민들의 수요를 충족시켰습니다​

.

조선 후기의 기록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쇠고기 소비가 크게 늘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북학파 학자 박제가는 1778년경 “우리나라에서는 나날이 소 500두가 도살된다”고 적어, 연간 약 18만 마리 규모의 도축이 이뤄진다고 추산했습니다​

. 실제 *영조 51년(1775년)*에 인천의 유학자 이한운은 전국적으로 연 39만 마리의 소가 도살된다고 기록했는데​

,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 조선의 쇠고기 소비가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양을 비롯한 조선사회 전반에 쇠고기 식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특히 서울은 공인된 현방을 통해 비교적 풍부한 공급이 이루어지는 쇠고기 소비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

2.3 소고기의 사회적 인식과 활용: 제례·궁중음식

조선시대의 쇠고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중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를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백정에 대한 천시로 인해 도축업은 천한 일로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쇠고기 자체는 귀한 보양식이자 제례에 빠질 수 없는 재물로 인식되었습니다. 양반 지배층은 유교적 명분론을 내세워 소 도살을 금지하면서도 실제로는 궁중과 잔치에서 쇠고기를 즐겼고​

, 제사용 음식을 준비할 때 소고기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주자가례》 등 유교 의례서에 따르면 큰 제사에는 희생으로 **“첨모(팔다리가 온전한 큰 짐승)”**를 바치는데, 일반적으로 소가 가장 윗급 희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국가 차원의 종묘제례사직대제에는 반드시 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올렸고, 지방의 향교에서도 큰 제향 시에는 소를 희생으로 사용하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고기는 의식 후에 나누어 먹거나 하사하여, 결국 음식 문화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궁중음식에서도 쇠고기는 귀한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 왕실의 궁중요리에는 탕, 전골, 구이, 전유어 등 다양한 메뉴에 소고기가 포함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궁중 전골요리인 신선로에는 양지머리 등 쇠고기 고깃국물이 들어갔고, 너비아니라 불린 양념구이(오늘날 불고기의 전신에 해당)는 임금과 상궁들의 입맛을 돋우던 별미였습니다. 또한 **육포(肉脯)**와 같이 쇠고기를 얇게 저며 말린 음식은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릴 정도로 귀히 여겨졌습니다. 궁중 연회상이나 진연에도 쇠고기 산적과 편육 등이 올라갔으며, 임금이 병이 났을 때 보양식으로 소고기 국물(곰탕)을 먹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쇠고기는 제사의 제물이자 왕실·양반가의 별미로 쓰이며 문화적으로 중요한 식재료였고, 이는 서울 한양의 음식문화 전통에 반영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한우 소비문화는 **“금지 속의 허용”**이라는 이중 구조를 띠고 있었습니다. 법제상으로는 엄격히 금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현방 등의 공인 시스템을 통해 도성 내 소비가 이루어졌고, 제례와 궁중을 통해 문화적으로 쇠고기가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훗날 서울이 한우 요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한우를 활용한 서울의 향토음식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습니다.

3. 일제강점기 경성의 소고기 소비 확대와 외식문화

3.1 경성부립도축장의 설치와 육류 공급 확대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울(당시 경성)의 쇠고기 유통 구조는 근대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제 당국은 위생과 세금 징수를 명분으로 도축 작업을 중앙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17년 서대문구 현저동에 경성부 영립도축장(경성부립 도축장)**이 설립되어, 이전까지 한성부 내 여러 곳에 분산되었던 도축 기능을 한 곳으로 통합했습니다​

. 이어 1925년에는 해당 도축장을 종로구 숭인동(동묘 인근)으로 확장 이전함으로써 경성 시내의 유일한 공설 도축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가축 도살은 공식 도축장에서만 시행하도록 법적으로 규제되었고, 개인이 임의로 도축할 경우 처벌받았습니다​

. 이는 조선시대의 현방이나 암도축을 근절하고 근대적 도축 검사 및 세금 부과 체계를 확립하려는 식민당국의 정책이었습니다.

이 시기 쇠고기 공급량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공식 도축장이 운영되면서 경성부 내에서 도축되는 소의 마릿수 통계가 집계되었는데, 예컨대 1923년 경성부 도축장에서 도축된 소는 22,260마리에 이르렀고 돼지는 8,330마리가 도축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같은 해 전국 도축두수는 소 27만5천여 마리, 돼지 13만9천여 마리였는데, 이 중 경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소 약 8%에 달했습니다​

. 이는 서울이 전국에서 생산되는 쇠고기의 상당 부분을 소비하는 주요 소비시장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1918년 경성에서 소 도축 13,643마리였던 것이 불과 5년 만인 1922년에는 23,625마리로 늘었다는 통계도 있어​

, 1920년대에 들어 도시 인구 증가와 식생활 서구화에 따라 육류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경성의 도축장에서는 전기(電氣) 도살 설비 등을 도입하여 위생적이고 효율적인 작업을 지향했습니다​

. 도축장에서 도살된 소고기는 경성부 내 지정된 정육점(일명 “현옥(懸屋)”이라 불림) 다섯 곳을 통해 시중에 판매되었습니다​

. 이는 조선시대의 현방에 대응하는 식민지 시대의 공식 유통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식민당국은 이렇게 한정된 판매점을 통해 품질과 가격을 통제하고, 판매고에 세금을 부과하여 도축세 수입을 경성부 재정의 중요한 부분으로 활용했습니다​

. 실제로 1920년대 경성부는 소 도축세로 연 5만 원가량, 돼지·말·개 등을 합쳐 총 7만5천 원 상당의 세입을 얻었다고 하며​

, 이는 도시 행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3.2 식문화 변화: 설렁탕과 불고기, 신문명의 등장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도시화와 함께 외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한우 소비문화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서민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음식으로 설렁탕을 들 수 있습니다. 설렁탕은 뼈와 고기를 장시간 고아낸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음식으로, 값싸고 영양가 있어 서울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미 대한제국기인 1900년대 초에 서울에 설렁탕 집이 문을 열었고 (예: 1902년 영업을 시작한 이문설렁탕 등), 1910~20년대에는 도성 곳곳에 설렁탕 식당이 성행했습니다. 경성 사람들은 설렁탕을 우리나라 최초로 배달시켜 먹은 음식으로 즐겼는데, 큰 솥에 끓인 국밥을 그릇째 배달해주는 서비스가 나와 편리하게 쇠고기 국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 이는 오늘날 배달 문화의 시초로 평가되며, 서울 특유의 서민 음식문화로 기록됩니다.

반면 상류층이나 신문물에 호기심을 가진 도시민들은 고급 요리점에서 한우 요리를 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일본식·서양식 조리법을 도입한 근대적인 요릿집들이 번성하였는데, 이들 레스토랑에서는 한우고기를 이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선로(神仙爐)**나 전골요리는 고급 요릿집의 단골 메뉴로, 맑은 육수에 한우 고기와 채소를 넣어 끓이는 일종의 전골로서 일제시대 경성의 양반 출신이나 부유층이 즐겼습니다​

. 서양식 경양식당에서는 스테이크 형태의 비프스테이크를 팔기도 했고, 경성의 최고급 호텔 식당(조선호텔 등)에서도 양식 코스요리에 한우 스테이크가 포함되어 식민지 지배층과 상류층에게 선보여졌습니다​

.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한우 요리인 “불고기”가 등장하여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불고기”라는 용어는 1920년대 중반부터 문헌에 보이는데, 1922년 현진건의 소설 「타락자」에 *“불고기 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사례입니다​

. 이는 이전 시대에 궁중이나 양반가에서 너비아니라 불리던 양념 쇠고기구이가 대중 음식점 메뉴로 전환되며 붙은 새로운 이름으로 해석됩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경성 시내에 불고기를 전문으로 파는 음식점들이 속속 생겨났고,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양념된 한우 고기를 구워내는 불고기집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불고기라는 음식의 대중화는 1920년대 들어 급증한 음식점 창업 붐과 맞물려 이루어졌고, 불고기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업소도 등장했다고 합니다​

. 이는 한우고기가 더 이상 일부 계층만의 음식이 아닌 대중적인 외식 메뉴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합니다.

경성의 도심지였던 종로, 본정(현 충무로 일대) 등에는 유명한 정육식당과 불고기집, 갈비구이집들이 성업했습니다. 특히 마포나루 인근은 전국 각지에서 소가 한강을 건너 모여드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마포 우시장과 도살장이 형성되었고, 그 주변으로 선지해장국집이나 숯불갈비집이 생겨 노동자들과 상인들의 발길을 끌었습니다. 마포의 한우 숯불갈비는 맛이 좋아 소문이 났으며, 이는 훗날 “마포갈비”라는 서울 향토음식 브랜드로까지 이어집니다. 또한 종로 칠패 일대와 남대문 시장 주변에는 육회(생고기 회무침)로 유명한 골목이 있었는데, 신선한 소고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자 이러한 날고기 음식 문화도 발달하였습니다. 1930년대 경성 부민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설렁탕으로 속을 달래고, 불고기와 갈비로 외식의 즐거움을 누리며, 육회와 탕탕이(육회에 노른자와 참기름 등 양념)로 별미를 즐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우 요리를 소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지역의 한우 소비가 양적·질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통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쇠고기가 유통되었을 뿐 아니라, 가정 내 소비뿐 아니라 음식점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외식문화가 활성화되면서, 한우 요리가 서울 사람들의 일상 식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도시 서울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소고기 소비 “핫플레이스”**가 되었고, 이는 서울이 훗날 한우 요리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4. 해방 이후 서울의 한우 유통체계와 현대 한우문화 형성

4.1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의 영향

1945년 광복을 맞이하면서 경성은 서울로 지명이 환원되었고 행정이 이양되었으나, 곧이어 6·25 한국전쟁(1950~1953)을 겪으면서 서울의 축산 기반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전쟁 중 많은 가축이 희생되고 유통망이 붕괴되어, 1950년대 초반 서울에서는 쇠고기가 극심한 품귀를 보였습니다. 정부는 전쟁 직후 **1954년 ‘가축보호법’**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소 등 가축자원의 보호와 증식을 도모하였고​

, 무분별한 도축을 억제하며 사육 장려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시기 서울 시민들의 쇠고기 소비는 배급이나 군납 등 공적 경로에 의존해야 했고, 일반 시장에서는 값비싼 귀한 식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서울 도심의 시설들이 파괴되어, 일제시대에 세워졌던 숭인동 도축장도 한때 기능이 마비되었다가 전쟁 후 복구되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 사정과 가축 두수 부족으로 인해 서울에서 쇠고기는 특별한 날에나 맛보는 사치품에 가까웠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유통 체계가 재정비되고 소비도 정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4.2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형성과 서울 푸줏간 체계

서울의 한우 유통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은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마장동 지역에 축산물 도매거점이 형성된 것입니다. 서울시는 도심 인구 증가와 식육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노후화된 숭인동 도축장과 분산된 우시장(소시장)을 보다 넓은 외곽 지역으로 옮겨 현대화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1958년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새로운 우시장(가축시장)이 개설되었고, 뒤이어 1961년 마장동에 제1시립도축장이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 이로써 일제강점기 이래 서울 도심에 위치했던 도축장과 우시장 기능이 동부 외곽이던 마장동으로 이전 통합되며, **“마장동 축산물시장”**이라는 오늘날의 거대 식육 단지가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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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동 일대는 1960년대부터 사실상 서울 시민들의 ‘푸줏간’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전국의 한우가 서울로 모여들었는데, 특히 경기 북부와 강원도, 충청도 등지의 산지에서 사육된 소떼들이 매일 새벽 마장동 가축시장에 운송되어 거래되었습니다​

. 마장동 가축시장은 새벽부터 소상인들과 정육업자들로 붐볐고, 하루에 취급되는 소·돼지의 수가 엄청나 도축장과 시장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갈 정도였습니다​

. 마장동 시립도축장에서는 최신 도축시설을 도입하여 대량 도축을 소화했고, 도축된 고기는 곧바로 인근의 축산물시장으로 공급되어 정육점과 식당, 소비자에게 넘겨졌습니다. 1960년대 마장동은 그야말로 **“숨 쉬는 것 빼고 다 고기와 관련된 동네”**라 불릴 만큼 활력이 넘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전통 현방 출신 푸줏간들은 마장동으로 집결하거나, 각 상권에서 마장동 고기를 받아 판매하는 구조로 개편되었습니다. 즉, 과거에는 도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정육점들이 이제 마장동 도매시장으로부터 소고기를 공급받는 근대적 유통망을 구축한 것입니다. 이로써 서울은 산지-도축-도매-소매-외식으로 이어지는 한우 공급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 정부는 축산물 유통 효율화를 위해 경매제를 도입하였고, 1974년 마장동 가축시장에 경매방식이 적용되면서 전통적인 우시장 형태의 현장 거래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또한 1970년대 중반에 시립 도축장이 민간에 불하(불하: 매각)되는 등 운영 주체가 변화하여, 이후 마장동 도축장은 민간 업체가 인수하여 계속 가동하였습니다​

. 그럼에도 마장동은 변함없이 서울 최대의 축산물 집산지로 기능하며, 1980년대까지도 서울에서 소비되는 한우의 상당 부분이 이곳을 통해 유통되었습니다.

마장동 시장의 형성은 서울 한우 소비문화의 기반을 현대적으로 재편한 사건입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전통시장이나 동네 정육점에서 질 좋은 한우고기를 손쉽게 살 수 있게 되었고, 식당들도 매일 신선한 고기를 대량 공급받아 설렁탕집, 갈비집, 육개장집 등 다양한 한우요리 전문점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 서울로 몰려든 근로자 계층에게 값싸고 든든한 소고기 국밥과 탕 요리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1960년대 왕십리 지역에 유명했던 *‘대중옥’*이라는 해장국집은 소뼈와 선지를 푸짐히 넣은 해장국(뼈해장국)으로 힘든 노동자들의 배를 채워주었는데, 이 역시 마장동 시장의 부산물 공급으로 가능했던 서울 서민 음식문화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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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현대의 한우 산업과 서울의 한우문화

1980년대 이후 현대에 들어서면서 한우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급 식재료로 자리잡았고, 서울은 그 소비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 정부는 한우 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외래 종과의 교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이후로는 한우 순종 보호와 품질 향상 정책으로 선회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쇠고기 수입이 개방되기 전까지, 한국의 쇠고기 시장은 사실상 한우가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시기 서울의 한우 소비는 명절 선물세트회갑연 및 결혼식 잔치 음식 등으로도 확대되어, 한우고기가 곧 부와 정성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한우 등심이나 갈비 세트를 고급 선물로 주고받는 문화는 특히 서울의 중산층 사이에서 뿌리내렸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 수입 쇠고기가 개방되고 대형마트를 통해 값싼 수입육이 들어왔지만, 서울 시민들의 한우 선호 경향은 여전히 강하게 남았습니다. 정부와 농가에서는 한우 브랜드화에 힘써, ‘한우 자조금’ 사업을 통해 품질 인증 마크를 도입하고 유통 이력제를 실시하는 등 소비자 신뢰를 제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우”는 단순한 산품이 아니라 문화적 브랜드로 부각되었습니다. 서울의 유명 음식점들은 “100% 한우만 사용”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한우암소 불고기, 한우 갈비구이 등을 차별화된 메뉴로 홍보했습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소비자 불안(예: 2008년 광우병 사태 관련 촛불시위) 등이 불거지면서, 서울 소비자들 사이에 한우에 대한 신뢰와 애호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는 한우를 서울 음식문화의 중심에 놓이게 한 사회경제적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울의 한우 음식문화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한편으로 서울 곳곳에는 100년 가까운 전통을 잇는 **설렁탕 노포(老鋪)**들이 성업 중이며, 남대문시장과 종로 지역에는 한우 육회 골목이 자리잡아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끕니다. 또 한편으로는 젊은 세대 입맛에 맞춘 한우 스테이크하우스, 한우 버거, 퓨전 한식당 등이 등장하여 한우를 새로운 방식으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은 여전히 서울 신선육 유통의 핵심 거점으로, 많은 식당과 정육점들이 마장동 경매를 통해 한우를 조달하고 있습니다. 비록 2010년대 이후 마장동 도축시설이 일부 이전되고 도심형 식육시장은 환경 개선을 요구받고 있지만, **“마장동 한우”**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서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한우 유통=마장동이라는 인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해방 이후 서울은 전국 최대의 한우 소비시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습니다. 2020년 현재 서울은 인구 10명 중 7~8명이 주기적으로 쇠고기를 섭취하는 고소득 도시로서, 연간 한우 소비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현대의 한우문화 형성에는 마장동 시장의 구축, 정부의 한우산업 육성, 소비자의 선호 변화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서울은 한우요리 전문식당들의 경연장으로서, 타 지역에 새로운 메뉴와 트렌드를 전파하는 한우 음식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5. 서울 한우 소비문화의 특징 및 타지역과의 비교

서울의 한우 소비문화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특유의 도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지역과 비교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첫째, 지속적이고 높은 소비량입니다. 조선후기부터 현재까지 서울(한양)은 일관되게 전국 최고 수준의 쇠고기 소비가 이루어진 지역이었습니다​

. 전통시대에도 한양과 평양이 특히 쇠고기 소비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 일제강점기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서울은 전국에서 도축된 쇠고기가 대거 집산·소비되는 거대 시장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지역, 특히 농촌 지역은 소를 주로 농경에 활용했기에 일상적으로 쇠고기를 먹는 문화가 약했고, 소비도 서울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산업화 이전까지는 지역 간 경제력 및 필요의 차이에서 기인했지만, 현대에도 인구 집중과 소득 수준의 격차로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경기도(서울 중심)**와 **평안도(평양 중심)**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이 타 지역보다 높았다는 연구가 있으며​

, 오늘날에도 서울 주민의 소고기 지출비는 농촌 지역 주민보다 높은 편입니다.

둘째, 발달한 한우 외식문화입니다. 서울은 일찍부터 다양한 한우요리 전문점이 생겨난 곳으로, 집에서만 먹던 쇠고기를 식당에서 사먹는 문화를 개척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설렁탕, 불고기뿐 아니라,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 전역에 갈비집(숯불에 구운 한우갈비를 파는 식당)이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종로, 을지로, 마포 등지의 노포 갈비집들은 “서울 한우갈비”의 대명사가 되었고, 1980년대에는 가족외식으로 갈비구이가 각광받았습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영남이나 호남 등 타 지역에서는 잔칫날에나 소를 잡아 먹는 정도였고, 돼지고기 위주의 식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즉 쇠고기를 외식으로 즐기는 문화는 서울 및 몇몇 도시권에 국한되었고, 이는 지역적 차별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에는 전국 어디서나 한우구이를 먹을 수 있지만, 메뉴의 다양성이나 전통있는 노포의 존재 면에서 서울은 여전히 타 지역을 앞섭니다. 또한 서울은 세계 각국의 요리가 밀집한 국제 도시답게, 한우를 퓨전이나 파인다이닝으로 재해석한 시도들도 많아 한우 조리법의 발전과 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셋째, 유통문화와 소비자의 인식 차이입니다. 서울은 마장동 축산물시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통해 시민들에게 신선한 한우를 공급해왔고, 이는 시민들의 신뢰를 높였습니다. 예컨대 과거 서울 주부들은 이른 아침 마장동에 직접 가서 도축된 지 얼마 안 된 따뜻한 한우고기를 싸게 사 오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러한 도매시장 직접 구매 경험은 서울 소비자들을 한우 감별에 까다롭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는 한우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 양념갈비나 국거리로 포장된 상태로만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서울은 전국 각지의 한우 브랜드가 경쟁하는 시장으로, 소비자들이 산지별 한우의 특징과 등급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횡성 한우”, “장흥 한우” 등 지역 브랜드 한우가 서울에 진출해있고, 서울 소비자들은 가격이 비싸도 품질만 좋다면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이러한 높은 안목과 지불의사는 서울 한우 소비문화의 또 다른 면모입니다.

넷째, 문화적 측면에서 전통과 현대의 융합입니다. 서울의 한우 음식들은 많은 경우 전국구 음식으로 성장했습니다. 서울에서 발전한 설렁탕, 불고기, 갈비, 육개장 등은 현재 전국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한국의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는 서울의 한우요리 문화가 지역성을 넘어 전국적 표준으로 자리잡았음을 뜻합니다. 그만큼 서울이 한우 조리법과 식도락 문화의 발신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지역에 따라 독특한 쇠고기 조리법(예: 개장국의 소고기 대체인 육개장, 제주도의 돼지고기 문화 속 소고기 회인 ‘섭삭’ 등)이 있었으나, 대체로 서울 음식의 영향력이 더 컸습니다. 또한 서울은 현대에 들어 한우를 매개로 한 다양한 문화 이벤트(한우 축제, 고메 행사 등)가 열리는 곳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지역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시대 흐름에 맞게 문화 콘텐츠로 승화시키는 서울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서울의 한우 소비문화는 높은 소비량과 다양한 요리, 조직화된 유통망과 까다로운 소비자층, 그리고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음식 문화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이 주로 제한된 행사나 특수한 문맥에서 쇠고기를 소비해온 것과 달리, 서울은 일상 속의 한우 소비를 오래 전부터 이어온 지역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서울의 한우문화는 한국 음식문화의 발전사에서 독자적이고 선도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6. 서울 한우 음식문화 관련 주요 자료 및 제도

서울 지역의 한우 소비문화를 조명하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와 문헌, 제도는 다양합니다. 아래 표는 시대순으로 중요한 자료와 제도적 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上述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서울의 한우 소비문화는 법령의 금지→공인된 현방 제도→근대 도축 인프라 도입→현대 유통시장 확립으로 이어지는 연속성 있는 발전 과정을 거쳤습니다. 또한 각 단계마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맥락(농경사회, 식민지 근대화, 전쟁과 복구, 산업화와 세계화)에 따라 서울만의 독특한 대처와 문화 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현방 제도와 20세기 마장동 시장의 등장은 서울의 한우문화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제도적 기반으로 평가됩니다​

.

이상에서 살펴본 역사적 고찰과 자료들은 서울이 왜 한우요리의 본고장으로 불릴 만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법으로 금하고 천시받던 고기를 시민들의 식탁 위로 끌어올린 힘, 근대적 도시환경 속에서 한우요리를 산업과 문화로 발전시킨 동력,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서울 사람들의 한우 사랑이 어우러져 서울만의 향토음식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울의 향토음식으로 한우 요리를 지정하려는 노력은 충분한 역사·문화적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7. 결론: 서울 한우 소비문화의 가치와 전망

서울 지역의 한우 소비문화는 6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법과 금기의 대상에서 시작해, 오늘날 도시민의 일상 미식으로 자리잡기까지 독자적인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 시대 국가 정책과 사회 구조, 일제강점기의 도시화와 산업화, 해방 이후의 경제 발전과 식생활 변화 속에서 서울만의 한우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이는 타지역과 구별되는 서울 음식문화의 정체성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서울은 한우 요리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조리법과 문화를 선도해왔기에, 이러한 유산을 향토음식 자원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서울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온 설렁탕 한 그릇, 불고기 한 점에는 그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마장동 시장과 같은 공간은 단순한 시장을 넘어, 도시민의 식생활을 지탱해온 산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향후 서울의 한우 소비문화는 전통과 혁신을 겸비하여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한우 요리의 세계화 추세 속에서 불고기와 갈비 등은 K-푸드로 각광받고 있으며, 서울의 식당들은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 미식계에 내놓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우 농가와 유통업계, 문화계가 협력하여 서울 한우 음식의 브랜드를 강화한다면, 서울을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미식 경험을 제공하고 지역 경제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서울의 향토음식으로 한우 요리를 지정하는 일은 이런 맥락에서 단순히 하나의 음식을 선정하는 것을 넘어, 서울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을 잇는 상징을 재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서울 한우 소비문화의 깊이와 풍부함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충분한 근거를 갖추고 있으며​

, 이를 바탕으로 서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이 탄생하리라 기대합니다.

출처: 본 보고서에서는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 북학의, 한경지략 등의 역사 자료와 한겨레신문·조선일보 등 언론 기사​

, 학술 논문​

, 서울역사편찬원 사료​

등을 참고하여 서울 지역 한우 소비문화의 변천을 정리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각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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