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농우 품앗이와 우시장, 공동목장
[마을공동목장 톺아보기](4) 근대 조선의 개항과 공동목장 형성
조선 후기 축산정책과 공동목장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 남아있는 ‘마을공동목장’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는 남한 면적의 2%에 불과하지만, 전국 초지 면적 중 48%를 갖고 있다. 대부분 마을공동목장에 위치한 초지는 탄소를 흡수‧격리하고 지하수를 보전하며 토양침식 방지 등의 생태적 기능을 하고 있다.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 역할은 물론, 해안과 산간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생태축 역할을 하는 등 마을공동목장은 각 마을의 공동자산이자 청정 제주의 생태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공동자원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축산업 쇠퇴, 관광산업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마을공동목장이 빠르게 매각되기 시작하면서 면적도 급격히 줄고 난개발로 인한 마을공동체 붕괴 현상까지 나타났다. <제주의소리>와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지속가능사회연구센터, 양용찬열사 추모기념사업회, 제주생태관광협회 등 언론‧시민단체‧학계로 구성된 ‘탐나는가치 맵핑(mapping)’ 마을공동목장 보존 프로젝트팀은 지난 2021년 8월부터 제주도내 마을공동목장 현장조사를 3년여간 이어오고 있다. 마을공동목장의 해체는 초지를 상실하고 지하수 오염과 생태적 다양성 축소, 고유의 목축경관자원 훼손, 마을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청정 제주를 유지하는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은 제주도 마을공동목장을 보전하고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마을공동목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탐나는가치맵핑팀’을 대표하여 김평선 시민기자가 마을공동목장의 탄생 배경부터 쇠퇴 과정, 생태적 가치와 보전 과제까지 총 10회에 걸쳐 아래 순서로 톺아보는 기사를 격주 연재한다. ※ 표시된 각주와 참고 문헌은 기사 마지막에 설명을 달았다. / 편집자
조선은 고려 후기 빈부 격차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태종이 토지 분배를 위해 관료를 지방에 파견할 정도로 빈부 문제는 국가 중대 사안이었다.※1 그리고 소빙하기 기후로 기근과 흉년이 발생하자 조선 군왕과 관료들은 농우를 빈부 격차 발생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세종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말과 소를 명나라에 진상하여 부족한 공사의 농우를 공급하기 위해 국영 목장에 소를 방목했다. 그러나 성종 시기 사림파가 대지주가 된 훈구파 재상들이 백성의 토지와 농우를 수탈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로 생산 수단의 불평등이 문제가 되었다.
조선 경국(經國, 국가 경영)의 기본은 안보(安保)였다. 건국 초기부터 조선 조정은 소빙하기 기후로 동북아 정세가 불안해지자 북부 국경과 남해안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조선 조정은 국경 지역의 우마 거래를 통제했다. 1485년(성종 16년) 왜구 침입 위기감 속에서 국영 우장(牛場)이 폐장되었다. 4개 도(경기, 경상, 충청, 전라)의 순찰사 홍응이 초지가 부족하며, 소를 경우(耕牛)로 길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 우장(牛場)을 폐장하여 마 목장으로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2 이에 사복시에서 소가 국가경영에 긴요하지 않다는 이유가 제시하자 우장이 폐장되었다.※3
조선 조정은 기근 대응 역량이 취약해지자 장시(향시)를 허용하여 분배 문제를 해소했다. 장시(외방의 시장) 논의는 1433년(세종 13년) 화폐(저화) 유통 목적에서 시작되었다.※4 조선 건국 초기부터 발생한 한재와 수재로 기근과 흉년이 심각해지고 물가가 상승하자 1470년(성종 원년) 전라도 무안과 나주 등 전라도에서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 장시(장문)가 개설되었다. 당시 조정의 의견은 이익이 적은데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등 폐단이 많다는 부정론※5과 마을 공동체가 보전되고 화폐가 유통될 계기가 된다는 긍정론※6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조정은 흉년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역량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흉년에 장시 개설을 허용했다. 16세기에 장시가 경상도와 충청도로 확대 개설되었다. 1546년(명종 1년) 도적 폐단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매월 동일한 날에 장시를 운영하는 방안이 선택되었다.※7 18세기 장시는 8도 주요 읍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1595년(선조 28년) 식량 문제 해결과 병영의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목사의 관리하에 소금과 같은 특산물과 농산물 등을 판매하는 병영 시장 개설이 논의되었다.※8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중앙군)과 지방 상비군이 마련되고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효종 시기 병영 시전(軍兵市廛)이 허용되었다. 처음엔 중앙군 진영의 경기도 송파진에서 지방군 진영인 함경도의 4군 6진, 경상도 부산진, 전라도 강진으로 시장이 개설되었다.
영·정조의 농우 품앗이 제도
17~18세기 기근과 우역(소 역병)이 재발하면서 농업 위기가 증대되어 갔다. 임진왜란 이후인 1636년 5월부터 우역이 발생해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에 우역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639년(인조 17년) 제주에 우역이 발생했다. 1665년(현종) 8도에 우역이 발생했고 제주의 피해가 극심했다.※9 1670년 제주에 기근이 발생했고, 역병이 창궐했다. 1693년(숙종 9년) 함경북도에 역질이 발생해 인명 피해가 컸으며, 제주에 우역으로 수만 두의 소가 사라졌다.※10
영조 시기 전국에 우역이 재확산되었다. 결국 1734년(영조 10년)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농우가 부족해졌다. 전라도는 평안도 둔전(屯田: 진의 군인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경작지)의 소를 공급받아야 할 정도였다.※11 전라도에서 1747년 우역이 발생해 농우가 죽어 이듬해 봄 농사가 우려되었다.※12 1763년 전라도에 다시 우역이 발생해 1만여 마리의 소가 죽었다.※13 제주에 우역이 고종이 친정을 하기 시작한 1874년에 재발하기도 했다.※14
부족한 농우를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방안이 필요했다. 18세기 마계(馬契)가 조직되어 운영되었다. 하지만 1745년(영조 11년) 부유한 농민 중심으로 마계를 운영하면서 말을 빌려주고 대신 과도한 대금을 받는 폐단이 발생했다.※15 조선 사회는 농우를 소유한 농민이 농우를 빌려주고, 노동과 그 밖의 물품으로 대신하는 농우 품앗이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에서 농우 품앗이를 요구했고, 1767년(영조 43년) 농우 품앗이 도입이 논의※16되면서 절목이 제정되었다.※17 1777년 정조는 농우가 있는 부유층이 농우 품앗이를 하도록 지시하며 농우 품앗이를 위기 극복 수단으로 추진했다.※18 정조시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던 단원 김홍도의 <밭갈이>는 농푸 품앗이 시책 효과를 풍속화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시장과 우장(牛場)
1583년(선조 16년) 국가 시책으로 조정의 소를 마을주민에게 공급하고 그 수를 기록하여 관리하는 시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소가 죽을 경우 대가를 지급하도록 했기 때문에, 곤궁한 농민에게 부채로 다가왔다. 이런 이유로 부채를 탕감할 수밖에 없었다.※19 이 시책은 우역이 공사 소유의 소를 급습했기 때문에 공급이 부족하거나, 마을 공동체와 농민의 부담이 가중된다면 지속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공급을 늘리는 방안이 필요했다.
조선 후기 경작지(화전과 목장 토지)가 증대되었지만, 농우가 부족했다. 이런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은 장시(시장)를 기반으로 우시장을 통해 공급을 늘리는 것이었다. 19세기 장시를 따라 우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경기도 장시에 20개 우시장이 운영되고 있었다.※20 제주의 경우, 개설 연도를 알 수 없지만, 송당리 장기동에 장시와 우시장이 형성되어 마을로 변화된 것으로 추측된다.※21 전라남도 함평에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장시에 1903년 우시장이 개설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제주의 일부 마장이 우장으로 기능이 전환되었다. 조선 후기 지속된 기근으로 제주목장의 경작지 증대와 화전 개발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만큼 농업 용도의 경우(耕牛) 역시 중요해졌다. 1863년 10살의 고종이 26대 왕으로 즉위한 후부터 1872년까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했다. 1872년 대원군의 지시로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제주삼읍전도>와 이전 지도를 비교하면, 2개 마장(모동장과 천미장)이 우장(牛場)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천미장은 현재 성산읍 신천리 해안가에 존재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 신천리 공동목장으로 이용되었다.
고종의 축산정책과 공동목장
19세기 말 조선의 개항과 통상조약 체결로 조선의 소 수요가 더욱 증대되었다. 18세기 중반 조선의 주요 수출 물품은 소가죽(牛皮), 면포, 말린 해삼, 쌀, 인삼이었고, 일본의 대조선 수출품 중 면직물과 구리가 대부분이었다.※22 메이지 정부는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도시 노동자에게 공급한 저렴한 식량 등이 필요했고, 조선에서 쌀과 쇠고기 등을 공급받기 시작해 일본 자본의 진출이 이루어졌다. 작은 포구에 불과하던 함경도 원산포구가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되면서 1879년 원산항이 되었다. 청일전쟁(1894-95) 이전에는 청과 일본에 매입 가격에 따라 소가죽과 생우(生牛)가 수출되었지만, 청일전쟁 이후 일본에 생우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산진 우시장은 1908년 일본인 자본에 의해 설립된 한국척식주식회사가 조선 소를 일본으로 이출할 목적으로 개설되었고 1926년 확장되었다.※23 조선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육로 통상을 위해 의주, 경흥, 회령에 개항장을 개설했다. 개항장에 설치된 감리서는 개항장의 우시장 설치와 관리도 담당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 직후 11월 함경북도 경흥의 개항장 감리서가 경흥강 변에 우시장 개설을 대한제국에 요청했다.※24
토양이 척박한 제주에 밭갈이 가축이 중요했다. 고득종의 구상에 따라 중산간으로 제주목장이 신설 확장되면서 공사의 말이 공동 방목되고 경작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주목장에 경작이 금지되고 사마 방목도 금지되면서 제주사회에 경작과 방목이 충돌하는 문제가 종종 발생했다. 그럼에도 많은 소를 방목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공동체에 기반한 계 조직을 통해 소득을 얻는 현상이 나타났다. 19세기 미경지를 개척하여 많은 소와 말을 소유한 ‘소 영감’ 이야기가 안덕면 상천리에 전해진다. 제주목장 목양위원 윤행구는 1천 마리의 소를 왕실에 상납할 정도로 많은 소를 길렀다. 그리고 제주에 마소를 공동으로 관리 생산하여 소득을 얻는 조직인 마계(馬契)가 존재했다. 마계에 대한 보고는 1930년대 후반 제주 문화를 기록한 이즈미 세이치(김종철 옮김)의 『제주도 濟州島』 에 확인할 수 있다. 이즈미 세이치는 “마계(馬契)가 와산리 눈미마을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25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농·상업 진흥을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다. 1884년 고종은 “농상과 직조하는 일, 도자기와 벽돌을 굽는 일, 목축, 종이 만들고 차를 만드는 일”이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업무를 담당할 행정기구 설치를 지시했다. 그리고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이 설치되었다.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이 설치되고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가축, 농기구, 종자를 수입하여 새로운 농업과 축산방식을 개발하는 실험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농업의 상업화를 위해 회사 설립을 촉진했다. 민부(民富)와 부국(國富)를 위해 전통적인 계 또는 향약에 기반한 서구 사회의 회사(기업, 조합) 설립을 독려했다. 1896년 포사 규칙(푸줏간 경영 규칙)이 공포되어 고기 판매와 도축장(허가제) 운영이 정비되었다. 조선 후기 소빙하기 기후 영향으로 중단되기도 했던 공마진상 제도가 1894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제주목장은 일시적으로 소를 방목하는 황실 목장으로 운영되었다. 고종은 제주목장을 황실 재산으로 이관했고, 윤행구가 황실에 상납한 소를 방목하여 목양위원이 관리하도록 조치했다.
개항과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공동목장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조선 왕실과 일본 왕실도 평양 주변에 공동목장을 조성하려고 했다. 당시 신문에 강원도 동해안에 공동목장을 설립하려고 참여자를 모집하는 광고도 등장했다. 심지어 1930년대 여성들이 공동 육아와 공동목장을 만들려는 운동도 전개했다. 함경도에 마을주민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재덕산성 공동목장이 형성되었다.※26 조선시대 재덕산성은 명천과 길주로부터 1식(息) 거리에 위치했는데, 성 밖 지형이 가파르고, 성 내부는 바둑판 같이 평평했고, 깊은 못이 있었다. 재덕산성은 2개 읍(명천과 길주)과 가까우며 지형이 목축에 유리했다. 제주도의 경우 1900년대 초 상가리 공동목장과 조직체가 등장했다. 상가리 주민들이 소를 공동 방목하기 시작하여 1912년 목축 조직이 결성했다. 수망리 외 7개 마을 주민들은 1914년 이전부터 녹산장 일대 일부 지역(물영아리오름 주변)을 공동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1926년 목축 조직을 결성했다. 1919년 하도리 주민들이 송당리 높은오름(하도리 리유지)에 공동으로 방목하기 시작했다.
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까지 조선총독부는 전쟁물자 생산 기반 확충(축우와 사료 증산)을 목적으로 함경도, 충청도, 평안도, 그리고 제주도에 공동목장 설치를 종용했다. 제주도 마을 공동목장 설치는 다른 지방에 비해 늦은 1930년대에 이루어졌다.
▶ 참고문헌 및 자문
※1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3월 28일 계해 2번째기사 ‘칭간 칭척자에게 토지를 주어 생업을 돕자는 사헌부의 상소문’.
※2 성종실록 176권, 성종 16년 3월 17일 무술 1번째기사 ‘사도 순찰사 홍응이 와서 복명하니 삼포의 왜인 등 여러 가지를 묻다’.
※3 성종실록 176권, 성종 16년 3월 17일 무술 2번째기사 ‘사복시 제조 윤호·이철견이 소 목장의 폐지를 아뢰니 시행케 하다’.
※4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1월 18일 임신 1번째기사 ‘임금이 이만주·임합라·심타납노 등을 힐책할 말을 아뢰라고 하다’.
※5 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27일 임술 6번째기사 ‘호조에서 전라도의 상인의 장문에 대해 아뢰다’ ;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 10월 25일 갑인 3번째기사 ‘대사간 최숙생 등이 국정 등에 관한 12가지의 일을 상소’; 중종실록 38권, 중종 15년 3월 21일 기유 1번째기사 ‘장시의 일과 문근·윤구에 관하여 남곤 등이 아뢰다’.
※6 성종실록 27권, 성종 4년 2월 11일 임신 3번째기사 ‘철장에게서 세를 거두는 것과 화폐 등의 일을 원상들이 의논하여 아뢰다’.
※7 명종실록 3권, 명종 1년 2월 23일 경술 3번째기사 ‘삼공이 정사룡의 가자, 형장의 개정, 장시, 회맹제의 연기 등에 대해서 아뢰다’.
※8 선조실록 70권, 선조 28년 12월 18일 병진 1번째기사 ‘연해 지역의 어염을 수령 책임하에 생산·판매하여 군량에 보충하도록 하다’.
※9 현종실록 11권, 현종 6년 12월 25일 병자 1번째기사 ‘8도에 우역이 치성하다’.
※10 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 윤6월 10일 경술 2번째기사 ‘함경북도에서 역질로 백성들이 많이 죽고, 제주에서 우역으로 소가 수만 두가 죽다’.
※11 영조실록 37권, 영조 10년 1월 20일 정유 5번째기사 '조현명이 도내의 농우(農牛)의 부족함을 상소하다'.
※12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0월 18일 을해 3번째기사 ‘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복명하니 호남의 사정에 대해 묻다’.
※13 영조실록 102권, 영조 39년 12월 2일 갑신 4번째기사 ‘호남에 우역이 발생하여 죽은 소가 1만 마리나 되다’.
※14 고종실록 11권, 고종 11년 7월 18일 무오 2번째기사 ‘전라 감사 조성교가 제주목에 소의 전염병이 돌아 진상하는 숫자를 채울 수 없다고 보고하다’.
※15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윤4월 15일 갑신 2번째기사 ‘한강변의 마계에서 돈을 징수하는 문제를 논하다’.
※16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 2월 28일 임술 1번째기사 ‘남단에 행행하여 성경하고 농민에게 농사지을 양식이 있는지 묻다’.
※17 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1월 5일 기유 6번째기사 ‘8도에 역질이 치성하여 죽은 자가 즐비하다. 이에 대한 하교’.
※18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1월 2일 기사 2번째기사‘함경·강원도의 도신과 북도의 감진 어사에게 어려운 백성을 진제하라고 하유하다’.
※19 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4월 1일 甲申 2번째기사 ‘선조 때의 국가시책으로 민폐가 있어 탕감해 줄 것을 암행 어사 이행언이 고하다’.
※20 경기도문화원연합회, 2017. 『수원 우시장』 pp.17-19.
※21 한라산인문학 연구가 한상봉 자문.
※22 정성일. 2021. “조・일간 무역 통계의 비교(1874년, 1880년)”, 한일관계사연구, 72, pp.149-179.
※23 동아일보 1926년 01월 15일 4면 기사.
※24 外部日記, 광무7년 11월 9일, ‘경흥강변의 우시장 설치여부를 묻는 경흥감리의 보고 외 2건’.
※25 이즈미 세이치 지음 김종철 옮김. 2014. 『제주도』 여름언덕 p.124.
※26 咸北縱橫四十有七日 개벽 제43호 1924년 01월 01일.
출처 : 제주의소리(https://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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