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서 목축업으로의 전환, 전쟁과 소고기 그리고 목장
[마을공동목장 톺아보기](3) 마을공동목장 탄생 배경
19세기 후반 자유무역과 소고기 무역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 남아있는 ‘마을공동목장’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제주도는 남한 면적의 2%에 불과하지만, 전국 초지 면적 중 48%를 갖고 있다. 대부분 마을공동목장에 위치한 초지는 탄소를 흡수‧격리하고 지하수를 보전하며 토양침식 방지 등의 생태적 기능을 하고 있다.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 역할은 물론, 해안과 산간지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생태축 역할을 하는 등 마을공동목장은 각 마을의 공동자산이자 청정 제주의 생태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공동자원으로서의 성격을 띤다.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축산업 쇠퇴, 관광산업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마을공동목장이 빠르게 매각되기 시작하면서 면적도 급격히 줄고 난개발로 인한 마을공동체 붕괴 현상까지 나타났다. <제주의소리>와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지속가능사회연구센터, 양용찬열사 추모기념사업회, 제주생태관광협회 등 언론‧시민단체‧학계로 구성된 ‘탐나는가치 맵핑(mapping)’ 마을공동목장 보존 프로젝트팀은 지난 2021년 8월부터 제주도내 마을공동목장 현장조사를 3년여간 이어오고 있다. 마을공동목장의 해체는 초지를 상실하고 지하수 오염과 생태적 다양성 축소, 고유의 목축경관자원 훼손, 마을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청정 제주를 유지하는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은 제주도 마을공동목장을 보전하고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마을공동목장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탐나는가치맵핑팀’을 대표하여 김평선 시민기자가 마을공동목장의 탄생 배경부터 쇠퇴 과정, 생태적 가치와 보전 과제까지 총 10회에 걸쳐 아래 순서로 톺아보는 기사를 격주 연재한다. ※ 표시된 각주와 참고 문헌은 기사 마지막에 설명을 달았다. / 편집자
19세기 유럽은 20세기 질서를 탄생시킨 역사의 무대였다. 공화정이 정치 질서로 확고한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신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유럽의 강대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변부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두고 새로운 식민지 건설을 위해 경쟁했다. 그 결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 탄생한 자유무역 질서는 19세기 말 조선의 비자발적인 개항, 20세기 초 마을 공동목장 형성, 20세기 후반 마을 공동목장의 거버넌스 해체에 영향을 끼친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세 말기 이후 나타난 소빙하기 기후 불안정으로 인한 가뭄과 홍수, 냉해 등 자연재해가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다. 파커(Parker)의 ‘17세기 일반 위기’에 대한 연구가 지적하듯이, 소빙하기 기후가 환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식량 위기와 식량 가격 상승으로 인한 사회불만과 정치적 불만이 폭발했다. 25년간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 종결과 파리 조약 체결(1814년)로 유럽에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1817년 유럽 기근 여파로 프랑스와 유럽에 혁명의 파도가 다가오고 있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정치 혼란은 16세기 말부터 반복된 밀 가격 급등과 식량 폭동(food riot)의 정치 현상이었다. 1788년 가뭄으로 프랑스는 식량 위기를 맞았고, 빵 가격의 폭등으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파리 조약 체결로 인한 왕정복고(1820년)가 이루어졌지만, 프랑스 7월 혁명(1830년), 2월 혁명(1848년)이 발발했다. 이처럼 식량 위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유럽은 경제, 정치 등 체제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
16세기 말과 17세기 중반까지 종교개혁 운동과 30년 전쟁을 추동시킨 프로테스탄트들이 절대군주의 수입(재정)과 상업 이익을 공유하면서 중상주의(상인의 특권 부여) 질서가 형성되었다. 17세기 초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이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교환한 물품은 모피(fur)였다. 모피 무역이 활성화된 이유는 소빙하기 기후로 인한 추위 때문이었다. 17세기(1683년) 말 겨울부터 영국 템즈강이 얼기 시작했고, 18세기 초 유럽은 가장 추운 겨울을 경험해야 했다. 귀족들 사이에 모피 패션이 유행하면서 모피 무역(the fur trade)이 프랑스와 인디언들과의 안정적인 무역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년) 자화상에 모피가 등장하는 이유이다.
중상주의 시대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쟁을 벌이며 격돌했다. 7년 전쟁(1756~1763)이 대표적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렌치-인디언(프랑스 vs 영국) 전쟁이 발발하며 프랑스-스페인, 그리고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 영토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미래의 수입에 의존해서 국가재정을 꾸려나가는 위험한 길’로 접어들었다.※2 영국은 해상봉쇄로 대응했다. 낭트 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던 항구 도시들이 타격을 입었다. 전쟁의 종식 후 3각 무역(노예무역-영국 면직물 제조업-프랑스 상공업)이 흔들려 프랑스 기업가들의 활동이 쇠락했다.※3
유럽 제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로 인한 설탕 등의 재배가 이루어졌지만, 노동집약적인 특징으로 인해 유럽의 이주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체 노동력이 필요했다. 서아프리카에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노예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40년 교황의 노예무역 금지 조치로 가톨릭 국가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되었고, 1792년 프랑스에서 노예무역이 금지(이후 나폴레옹이 부활시켰고, 3공화국에서 금지됨)되었고, 1803년 영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로 삼각무역의 핵심축이 사라졌다. 미국의 독립과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가 폐지되고, 19세기 초부터 중남미에 독립 국가들이 나타났다.
중세 이후 17세기까지 프랑스의 시장은 공정가격을 통해 분배적 정의가 실천되는 공간이었다.※4 그러나 중상주의 시대 프랑스 제조업의 원료 제공과 노동자의 저가 식량 제공을 위해 수출과 지역간 곡물 유통이 금지되었다.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나타난 중농주의 학파는 프랑스의 시장 정책과 농산물의 수출을 금지하는 통상정책에 반대하며 laisser faire, laisser passer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1764년 기근이 발생하자 토스카나 공국(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에 수립된 공국)이 프랑스 곡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다.※5 18세기의 잦은 소빙하기 기후로 인한 가뭄과 기근으로 프랑스와 영국은 1786년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6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대륙봉쇄령을 통해 보호무역을 추진했다.※7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과 자유무역, 그리고 신제국주의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과 프랑스 7월 혁명 이후 정치적 안정이 찾아왔지만, 기후(습한 날씨)가 프랑스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하고 7월 혁명 이후인 1836년 알제리를 식민화했다. 병합 기념 연설을 한 법률가 외젠 레르미니는 노예 없는 식민지 건설을 축하하면서“자유인들이 땅을 경작하고, 프랑스와 유럽의 식민자들은 우리들의 군대의 보호 속에서 노동을 영위하며 생활할 것이다. 새로운 식민지는 인류 이상의 가장 고귀한 세 가지, 즉 자유, 농업, 전쟁을 꽃피울 것”이라며 자유무역과 제국주의의 서막을 알렸다.
15세기 아메리카의 감자가 유럽에 소개되었지만, 300년 동안 감자 재배는 확대되지 않았다. 척박한 토양에 적합하고 안전하고 빠르게 자라는 작물을 찾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감자를 17세기에 재배하기 시작했다.※8 그리고 17세기 소빙하기 건조하고 추운 기후로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자 1800년까지 유럽으로 확산 재배되기 시작했다.※9 그러나 18세기 전반에 습한 기후(폭우)가 나타났다.※10 폭우와 홍수가 유럽을 급습하자 감자 생산(식량 안보)이 위협받았다. 그 시작은 아일랜드였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감자 잎마름병이 발생했고, 곧이어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확산되어 소위 ‘굶주린 40년대’가 나타났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영국에 재정위기가 발생했다.※11 그러나 1847년 영국은 아일랜드 식량난을 구제하기 위해 자금을 차입해야만 했다.
19세기 초부터 새로운 수익처를 찾기 위해 무리한 투자가 이어졌다. 저렴한 양모를 얻기 위해 호주에 양모 목장 설치에 투자되기 시작했다. 영국 은행들이 호주에 은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식량 생산 악화,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영국에 1836년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영국의 금융위기 이후 1840년대 호주와 캐나다에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량 위기와 경제·재정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는 점차 양국의 무역 관세를 줄여나가는 자유무역 협정(코브덴-슈발리에 조약)에 동의했다. 이 조약의 특징은 최혜국 대우에 있다.※12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유럽에서 자유무역이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보호무역을 유지하던 국가들도 존재했지만, 유럽에서 자유무역이 유행했다.※13
19세기 유럽 국가들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아시아 태평양으로 눈을 돌렸고, 2차 아편전쟁(1857년)이 발발했다. 그리고 1862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코친 차이나(Cochin China) 동부 3성을 할양받았다. 1866년 조선에서 병인양요가 있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의회에서 식민지 건설을 놓고 논쟁을 한 직후인 1883년 식민지 확보를 위한 예산안이 통과되었다.※14 식민지 건설 지지자들은 ‘문명화 사명’으로 이를 정당화시켰다. 1884년 베를린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이 서아프리카 분할 점령을 위한 회의(베를린 회담)가 시작되었고, 이 회의에서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 침략이 승인되었다. 미국도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 대한 동등한 국제무역과 산업 기회를 받아야 한하며 대외정책으로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을 1899년 공식화했다.※15
19세기 자본가들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만 했다. 영국 자본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부채 채권에 눈을 돌렸고, 통행료 수익을 위해 이집트 수에즈 운하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상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비누와 기계 윤활유의 원료인 팜 오일(Palm oil)을 수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서아프리카 분할로 유럽 국가들이 이익을 독점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불황과 소고기 무역
그러나 세계는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무역 이익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고리가 끊어지면 경제 위기가 초래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1873년–1896년) 유럽과 미국에 장기 불황(Long Depression)이 찾아왔다. 미국의 면화 수입 가격 상승, 영국의 노동 임금 상승, 독일과 같은 후발 산업 국가의 수입 증대, 인도와 같은 수출시장의 침체가 점철되면서 불황의 그늘이 찾아왔다. 인도의 면직물 수입 대체 산업으로 성장한 영국 면직물 산업도 위기를 맞았다. 면직물 산업은 노동 임금의 상승으로 저렴한 노동 집약 산업 이점이 사라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불황이 찾아오면서 무리한 해외 투자는 금융위기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으로 면화가 영국에 공급되지 않아 영국 면직물 산업이 위축되었고, 다수 노동자가 실직했다. 1880년대 호주의 부동산 투기 붐으로 1890년대 영국 은행들이 파산하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재건과 서부 개척을 위해 철도와 도로가 개설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황금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불평등 심화와 철도 개설 투기 과열로 인해 미국에도 불황이 찾아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중국 등 극동에 접근하여 개항을 요구했고, 이익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중세 이래 유럽과 미국(식민지 시대)은 양과 젖소 중심으로 옷과 우유를 의류와 식량을 공급받았다. 육 고기는 보관의 문제로 일부 귀족만 식용으로 섭취했다. 18세기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영양(nutrition)이 중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이때 육 고기가 대체 식량으로 각광받았다. 19세기 말 통조림과 냉동 기술, 그리고 증기선 등장하자 유럽으로 값싼 고기가 유입되었다. 대기근을 경험한 아일랜드 농업이 목축업으로 전환되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 양과 소의 가축이 증대되었고, 후발 산업 국가인 독일은 중국에 도축장을 개설했다. 러시아도 조선의 소(牛)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소고기 소비가 촉진되었다. 목축을 통해 자가 소비하던 문화가 남북전쟁 이후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 당시 군용 식량으로 남부군에게 소고기가 공급되었고※16, 남북전쟁 이후 소고기 선호가 증대되었다. 대도시 인근에 도축장이 개설되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규모 목축업이 활성화되면서 텍사스의 카우보이 문화가 서부 개척과 함께 서부로 확대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도 소고기 수요가 증대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보어전쟁 이후 영국에서 소고기 수요가 증대되었다. 영국은 보어전쟁에서 식량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또 다른 무기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및 자문
※1 Louise A. Tilly. 1971,“The Food Riot as a Form of Political Conflict in France”, The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 Vol.2, No.1, pp.23-57.
※2 월러스타인, 2013 『세계체제론 Ⅲ』, p.112.
※3 월러스타인, 2013 『세계체제론 Ⅲ』, p.111.
※4 푸코, 2012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pp.56-58.
※5 C.P. Kindleberger, 2012. The economics of free trade, p.116.
※6 영국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국가들과도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기계화롤 통해 만든 면직물을 프랑스에 저렴한 가격에 수출하면서 이득을 보았지만, 프랑스의 포도주 수출은 큰 이익을 주지 못했다. 반면 프랑스 제조업자들의 이익이 감소하면서 불만이 증대되었다. 포도주 가격은 1771년 이래 계속 하락해 1786년에 최저점에서 지속되었다. 1788년과 1789년 곡물 가격의 상승으로 구매 여력이 떨어지자, 포도주 판매는 감소했고 포도 재배와 포도주 양조업자들의 소득이 하락했다.
※7 이후 프랑스 중농주의 학파는 명맥을 잃게 되었고, 스콜틀랜드 철학자 아담 스미스가 프랑스 중농주의 학파의 이념을 계승했다.
※8 Muiris O'Sullivan and Liam Downey, 2022. “The potato in Ireland”, Archaeology Ireland Vol. 36, No. 1 (Spring 2022), pp.36-37.
※9 감자는 영양학적으로 유럽인들의 식단에서 부족했던 비타민C를 보충해 줄 수 있었다. Vincent J. Knapp, 1989. “Major Dietary Changes in Nineteenth-Century Europe” Perspectives in Biology and Medicine Vol.31, No.2, pp.188-189.
※10 19세기 전반의 기후는 아래 홈페이지를 참조. https://premium.weatherweb.net/weather-in-history-1800-to-1849-ad/
※11 Charles Read 2022. The Great Famine in Ireland and Britain’s Financial Crisis.
※12 조선이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도 최혜국 조항이 나타난다.
※13 Antonio Tena-Junguito: et al. 2013. “How Much Trade Liberalization Was There in the World Before and After Cobden-Chevalier?”, December 2013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Volume 72(3), pp.708-740.
※14 우무상. 2022. “프랑스 제3공화국의 식민주의 이념 - 1885년 7월 하원에서의 논쟁을 중심으로”. 한국프랑스학논집, 117(0), pp.179-214.
※15 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899-1913/hay-and-china
※16 A. Taylor, 1988. “Rebel Beef: Florida Cattle and the Confederate Army, 1862-1864 Robert”Florida Historical Quarterly, Vol.67, No.1 pp.15-31.
출처 : 제주의소리(https://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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