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6장
Pigs, Pork, and Heartland Hogs: From Wild Boar to Baconfest
제6장
콘 벨트/호그 벨트:
콘과 호미니가 어떻게 지역 정체성을 만들었는가
1862년, 아브라함 링컨은 한 연설에서 훗날 ‘중서부(Middle West)’로 불릴 지역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대략적으로 정의했다.
“동쪽으로는 알레게니 산맥, 북쪽으로는 영국령(캐나다), 서쪽으로는 로키산맥, 남쪽으로는 옥수수 재배와 면화 재배가 교차하는 선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내륙 지역.”
링컨은 이전의 토머스 제퍼슨처럼, 이 지역을 미국을 먹여 살릴 생산적인 농장의 땅으로 그려냈다.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은 ‘콘 벨트(Corn Belt)’나 ‘중서부’라는 용어가 생기기 거의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명칭들이 1800년대 후반에 등장했을 무렵에는 이미 지역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더 흔히 사용되는 '미드웨스트(Midwest)'와 '콘 벨트'는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지리적 위치뿐 아니라 역사, 문화, 경제 면에서도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를 논할 때 다른 하나를 배제할 수 없다.
‘콘 벨트’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옥수수를 가축에게 먹였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또 하나의 별칭을 얻는다. ‘호그 벨트(Hog Belt)’, 즉 돼지 벨트. 무엇을 재배하거나 키우든 간에, 옥수수가 있는 곳에는 돼지가 있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돼지를 가장 많이 기르는 10개 주 가운데 8개가 중서부에 있고, 예외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오클라호마뿐이다. 오클라호마는 지리적으로 중서부와 인접해 있다.
**아이오와(Iowa)**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돼지를 키우는 주이자 가장 많은 옥수수를 재배하는 주이다. 아이오와의 돼지 생산량은 2위와 3위 주의 생산량을 합한 것보다 많다.
심장부를 만들다, 1783~1861년
르네상스 시대의 개념인 res nullius(무주물)은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는 정착민들에게 심리적으로는 정당성을 부여했을지 몰라도,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도로도 없었고, 지형은 험하고 울퉁불퉁했으며, 숲에는 곰과 스라소니, 늑대들이 들끓었다. 게다가 1812년 전쟁 이후 무장을 마친 원주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은 비옥했고, 희망을 품은 정착민들에게는 서부로 향하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유럽은 가난, 전쟁, 박해, 기근을 안겨주었고, 동부 주들은 빈곤과 과밀로 고통받고 있었다. 서쪽의 땅은 유럽인들의 눈에 ‘텅 빈’ 것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 정부는 아직까지는 원주민의 법적·정치적 권리를 존중하는 정책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착민들은 원주민에게 분명히 소유권이 있는 땅을 발견하면, 토지를 돈이나 교역품으로 ‘구입’하려 했다. 그들은 토지 거래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이해될 것이라 믿었다. 많은 경우,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정착민의 수가 급증하면서, 특히 돼지들이 원주민의 옥수수 저장소를 자주 찾아내 먹어치우는 일이 반복되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무너져 가는 것을 체감했다.
일부는 이에 저항했지만, 결국 중서부 지역의 원주민들은 돈을 받고 땅을 떠나거나 무력으로 패배하여 서쪽으로 쫓겨났다. 개척지는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희망을 제공했고, 그 희망은 마치 멈출 수 없는 쓰나미처럼 유럽의 “숨 쉴 자유를 갈망하는 군중”들을 끌어들였다.
1800년대 초, 철학자, 학자, 문인들은 개척지를 이상화하며 에덴동산으로의 회귀로 보았다. 노먼 포르스터에 따르면, 랠프 월도 에머슨은 “유럽은 알레게니 산맥까지 뻗어 있고, 그 너머는 미국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동부의 중요성을 간과하기는 하지만, 서부 이주를 통해 어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인식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지어야 했던 만큼, ‘행복 추구’란 땅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소빙기(Little Ice Age)**가 점차 끝나가던 것도 정착민들의 낙관을 부추겼다. 이 시기는 1800년대 중반쯤 마무리되며, 더 짧고 덜 혹독한 겨울이 이어졌고, 이는 곧 생활과 농사 모두를 더 수월하게 만들었다. 철학자들의 기대에 자연이 호응하는 듯한 시기였다.
서부로 이주한 사람들은 단지 이상주의나 절박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 땅 자체의 가능성을 곧바로 인식했다. 넓고 아름다운 계곡, 수많은 강, 울창한 숲으로 가득 찬 이 지역은 심지어 현실주의자들에게조차 ‘농사짓기에 완벽한 땅’이었고, 무엇보다도 돼지를 기르기에 이상적인 곳이었다.
1864년, 수의사 로버트 제닝스는 가축 사육과 관리에 대한 실용서를 출간했다. 그는 “미국 돼지(American Swine)”라는 장에서 중서부 지역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옥수수가 풍부하게 재배되며 비용도 적게 드는 서부의 비옥한 평야에서는 돼지를 가장 많은 수로 사육할 수 있으며, 수익도 가장 크다. 시오토강(Scioto), 마이애미강(Miami), 와바시강(Wabash), 일리노이강(Illinois) 계곡과 켄터키, 테네시, 미주리, 그 외 인접 주들의 넓은 토지는 오랫동안 돼지 생산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이 지역의 기후와 토양은 돼지의 빠른 성장과 주요 사료 작물의 생육에 매우 적합하여, 앞으로도 북미 대륙 최고의 돼지고기 생산지로서의 위치를 지켜갈 가능성이 높다.”
제닝스의 저서는 중서부의 성공 비결 중 또 하나의 핵심 요소인 옥수수를 언급한다.
옥수수를 먹고 자란 돼지는 도시의 골목과 하수에서 자란 돼지보다 맛이 훨씬 좋았다. 그 결과,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돼지는 자연 방목돼지보다 30~60%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돼지가 먹는 사료의 종류는 고기의 맛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숲에서 자란 돼지는 특유의 야생적인 풍미를 갖고 있지만, 농장에서 자란 돼지는 맛이 더 순하고 부드럽다.
옥수수를 먹고 자란 돼지는 살코기가 달콤하고 지방도 달콤한 맛을 내는데, 당시에는 모든 요리에 돼지기름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옥수수는 고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기에, 옥수수 사료를 먹은 돼지 고기가 도토리 사료를 먹은 돼지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이 오하이오 계곡 지역으로 유입된 것은 독립전쟁 이전부터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서부 정착 시기는 미국 독립 이후부터 남북전쟁 이전까지였다.
오하이오는 1803년에 주로 편입되었고, 그 뒤를 이어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주리, 미시간, 아이오와, 위스콘신, 미네소타, 캔자스 등이 순차적으로 주로 편입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콘 벨트(Corn Belt)의 시작이었다.
콘 벨트의 기원은 오하이오주의 시오토강과 마이애미강 계곡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오하이오는 이 지역에 맞는 돼지 품종 개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800년대 초반, 영국은 자국의 필요에 맞는 돼지를 개량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미국은 일부 영국 품종을 수입하여 사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영국 방식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의 광활한 땅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크고, 더 지방이 많은 돼지가 필요했다.
영국은 작고 단단한 체형을 선호했지만, 미국은 몸집이 크고 지방이 풍부한 품종을 원했다.
1840년에서 1846년 사이, 오하이오 마이애미 계곡 지역의 농부들이—정확한 인물은 밝혀지지 않았지만—당시 최고의 돼지로 평가받던 폴란드 차이나(Poland China) 품종을 개발하였다.
1816년에 이 지역에는 **‘빅 차이나(Big China)’**로 알려진 영국산 돼지가 도입되어 기존 품종 개선에 사용되었고,
이 빅 차이나의 유전자에 **수입 버크셔(Berkshire)**와 아이리시 그레이지어(Irish Grazier) 품종을 교배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다.
이 품종의 족보는 1876년에야 공식 등록되었기 때문에 “폴란드(Poland)”라는 이름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일부는 초기 사육자가 폴란드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폴란드 차이나는 몸집이 크고 고기가 풍부했으며, 지방도 많았다.
당시로선 또 하나 중요한 장점이 있었는데, 도축을 위해 먼 거리를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는 것이다.
폴란드 차이나는 미국에서 개발된 첫 돼지 품종이며, 옥수수를 사료로 삼는 콘 벨트 지역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품종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 남아메리카,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돼지를 수입해 유전자 다양성을 확장했고,
동부 지역에서는 **체스터 화이트(Chester White)**가 델라웨어강 연안에서, **듀록(Duroc)**은 뉴욕에서 개량되었다.
옥수수-가축 패러다임의 확산과 돼지 품종 개량이 함께 발전하면서, 새로운 가축 사육 방식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피드롯(feedlot)**이라는 개념이었다.
시오토 계곡 지역에 정착이 진행되며, 돼지뿐만 아니라 소도 함께 사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00년경, 새로운 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즉, 가축을 헛간이 아니라 야외의 울타리 친 부지에서 사육하는 방식이다.
껍질을 벗긴 옥수수, 사일리지(발효사료), 기타 사료들이 8~10에이커 규모의 야외 사육장에 공급되었다.
그런 다음, 소들이 사료를 먹고 일부는 그대로 남기거나 소화되지 못한 상태로 배설하면, 소들을 옮기고 돼지들이 그 사육장으로 들어가 남은 사료와 소 배설물에 남은 섬유질까지 모두 먹어 치우는 방식이었다.
폴란드 차이나 품종이 개발되기 전에도 정착민들은 서부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품종도 곧 그 경로를 따라 확산되었다.
폴란드 차이나는 오늘날 흔한 고기용 돼지가 아니라, **라드용 돼지(lard-type pig)**로 분류되었다.
이 품종은 옥수수를 먹고 빠르게 체중이 증가했고, **수송 수단이 거의 없던 시절, 이 돼지는 곧 '옥수수를 시장에 가져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다.
더불어, 세계적으로 라드(돼지기름)의 수요가 매우 컸고, 이 품종은 기름이 풍부하게 나는 돼지였다.
이와 같은 라드형 품종 덕분에 콘 벨트는 전 세계 라드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라드는 단지 요리용 기름일 뿐 아니라,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최고의 산업용 윤활제이기도 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였다.
또한, 라드는 고기 보존에도 유리했다.
특히 옥수수를 먹은 돼지의 지방은 저장성이 높았지만, 도토리를 먹은 돼지의 지방은 비교적 쉽게 산패되었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돼지고기는 염장한 후 통에 담아 광산 노동자, 선원, 노예 등에게 팔려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하는 노동계층이었다.
그리하여 정착민들은 일리노이와 아이오와로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고, 초지를 옥수수밭으로, 옥수수밭을 돼지고기와 라드로 전환시켰다.
이 빠르게 발전하는 대초원 지대에는 농부뿐 아니라 마을과 도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 정착지는 이 시기보다 앞서 존재했는데, 1700년대 프랑스가 만든 요새나 교역소에서 유래한 곳들이었다.
디트로이트 요새는 1701년에 세워졌고, 세인트루이스는 1764년 모피 교역소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 대부분의 도시는 미국 독립 이후 성장했다.
신시내티는 1788년 작은 마을로 시작되었으며, 오하이오가 주로 편입되기 15년 전이었다.
1820년대에는 콘 벨트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초기 개척은 쉽지 않았지만, 오하이오강의 왕성한 교통 덕분에 수천 명의 정착민이 몰려들었다.
오하이오강은 미시시피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중서부 지역을 뉴올리언스 항구와 연결해주는 주요 수로였다.
이러한 도시에는 언제나 일이 넘쳐났다. 계절성 일자리였지만, 계절도 길었다.
농촌 지역의 농장과 돼지 사육 규모는 급격히 증가했고, 신시내티는 수송에 최적화된 도시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목적지 도착 후 돼지를 비육(fattening)시키는 개념이 오하이오에서 처음 등장했다.
초기에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만 돼지를 몰고 왔지만, 1840년대가 되면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돼지를 몰고 오는 경우가 생겼다.
돼지 사육은 새로 정착한 이주민들이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산업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시작할 수 있었고, 투입 대비 수익이 높았다.
돼지는 키우는 데 돈이 거의 들지 않았고, 빠르게 고기를 제공했다.
소규모 농가에도 적합했지만, 야심 있는 대규모 농장에도 이상적인 가축이었다.
그리하여 오하이오 지역의 정착이 진행되면서, 돼지 떼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신시내티에 돼지가 대규모로 도착하면서, 이들을 비육하기 위한 옥수수가 필요해졌고, 가공을 위한 **포장 공장(packinghouse)**도 필요해졌다. ‘포장 공장’이라는 이름은 대부분의 돼지고기가 통(배럴)에 포장되어 운반되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었다. 이들 돼지고기를 염장하기 위한 소금도 동부의 염전에서 톤 단위로 들여왔다.
신시내티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포장 공장은 1818년에 문을 열었지만, 그 이전에도 규모는 작았지만 돼지를 도축하고 포장하는 활동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20년에는 신시내티에서만 연간 11만 4천 배럴의 돼지고기가 포장되었다.
이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더 정교하고 빠르게 발전했다.
가정에서 돼지를 잡는 데는 하루가 걸렸지만, 신시내티의 **‘분해 라인(disassembly line)’**에서는 돼지를 도축하는 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조경가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신시내티의 포장 공장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기록했다.
“예상보다 훨씬 놀라운 속도였다. 시계를 꺼내 돼지가 도축대에 올라가서 다음 돼지가 올라올 때까지를 재보니 35초였다.”
돼지 가공량은 계속해서 늘었다.
신시내티는 미국 최대의 돼지고기 가공 도시가 되었고, 곧 **‘포크폴리스(Porkopolis)’**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곧 인디애나와 켄터키에서도 돼지들이 신시내티로 몰려들었지만, 여전히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도시는 계속 성장했고, 도시는 고기를 원했다.
미국은 인구 이동보다도 식량 수송을 위한 교통망 구축에 집중했다.
182030년대에는 3,000마일의 운하가 건설되었고, 183040년대에는 7,000마일의 철도가 깔렸다.
1850년대에 이르러 신시내티의 가공업체들은 연평균 33만 4천 마리의 돼지를 처리했지만,
도시 인구 증가 속도에 밀려 정육점에 고기가 떨어지는 일도 발생했다.
돼지고기와 라드만이 신시내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1837년, 영국 출신의 윌리엄 프록터와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갬블은 손을 맞잡고 동업을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기업이 바로 ‘프록터 앤 갬블(Procter & Gamble)’, 즉 오늘날 세계 최대의 소비재 기업이다.
초기에는 양초와 비누를 만들었는데, 이는 모두 근처 돼지 가공장에서 나오는 **지방(라드와 수지)**을 원료로 했다.
프록터와 갬블은 더 좋은 비누와 양초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1840년대에 가장 잘 팔린 제품은 ‘라드 오일(lard oil)’**이었다.
대양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서는 고래기름 대신 라드 오일이 주요 연료가 되었고,
‘초원 고래(prairie whales)’라 불리는 돼지로부터 나온 이 기름은 등잔의 주요 연료로 부상했다.
P&G는 이처럼 신시내티의 돼지로부터 출발한 기업이었다.
신시내티 외에도 돼지를 중심으로 산업을 키운 도시가 있었다.
세인트루이스(St. Louis) 역시 돼지를 가공했으며, 돼지 부산물을 활용하려는 이들을 끌어모았다.
1843년, 독일의 **비누 제조업자 에버하르트 아니하우저(Eberhard Anheuser)**는 유럽을 떠나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그는 나중에 아돌푸스 부시와 협력해 맥주 사업을 시작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세인트루이스 최대의 비누·양초 제조업체로 성공했다.
**시카고(Chicago)**는 1833년에 도시로 공식 설립되었고, 교통 기반 시설의 중심지가 되었다.
1825년 에리 운하가 개통되면서 중서부와 동부 해안 간의 물류 이동이 쉬워졌고,
1848년에는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가 완공되면서 시카고는 미시시피강 및 뉴올리언스 항구로 이어지는 수로를 확보했다.
이후 철도망이 시카고로 집중되었고, 시카고강과 미시간호를 통한 선박 운송도 가능했기 때문에
시카고는 미국 내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철도가 깔리자 **대규모 돼지 몰이(hog drives)**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번식 프로그램의 초점도 ‘내구성’에서 ‘맛’으로 전환되었다.
더 이상 돼지가 시장까지 직접 걸어갈 필요가 없었고, 기차역까지만 가면 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여전히 많은 돼지들이 몰려왔고, 기차에서 도축장까지 이동하는 과정의 소음과 혼잡, 악취는 시민들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도시 정원이나 잔디밭을 파헤치는 길 잃은 돼지들도 큰 골칫거리였다.
시카고는 결국 이 문제를 남북전쟁 이후에야 해결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돼지 수는 계속 증가했다.
1860년까지 일리노이에는 250만 마리 이상의 돼지,
아이오와에는 100만 마리에 가까운 돼지가 사육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그 수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게 된다.
The Civil War and Lincoln’s Legacy
남북전쟁 당시, 신시내티는 기술적으로 북부에 속했지만 남부에 동조적인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탈퇴와 전쟁은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이루어지던 사업과 교통을 방해하게 된다. 신시내티의 가공 산업은 계속되었지만, 돼지고기 산업의 상당 부분과 수백만 마리의 돼지들이 시카고로 우회하게 되었고, 철도가 고기를 계속 이동시킬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시카고는 곧 **‘새로운 포크폴리스(Porkopolis)’**가 될 준비를 하게 된다.
도시 성장보다 더 많은 고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움직이는 군대이다. 남북전쟁 동안, **통조림 돼지고기(barreled pork)**는 군대를 먹이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중서부의 돼지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전선이 옮겨갈 때마다 대규모 **돼지 몰이(pig drives)**도 그에 따라 진행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중서부는 북부에 속해 있었다. (예외는 미주리 주로, 이른바 ‘경계 주(Border State)’ 중 하나였으며, 남북 양측에 자원병과 보급품을 보내고 내부적으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연방을 탈퇴하지는 않았다.)
이미 돼지의 대부분이 중서부에 있었기 때문에, 북군(Union Army)은 풍부한 육류 공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류만이 북군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자원병도 필요했다.
중서부는 폭발적인 속도로 성장했고,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올드 노스웨스트(Old Northwest)’**라 불리던 지역에 7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이들 주는 링컨의 요청에 놀라운 수의 자원병을 제공했다.
미네소타는 링컨의 요청에 응답한 최초의 주로 자원병 연대를 창설했으며,
뉴욕과 펜실베이니아를 제외하면,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가 가장 많은 자원병을 보냈다.
미주리, 아이오와, 미시간, 위스콘신도 대부분의 동부 주들보다 더 많은 병력을 제공했다.
비율로 보면 더욱 놀랍다. 인디애나의 병역 가능 남성 중 57%가 참전했고, 일리노이는 그 다음이었다.
식량과 병력 모두를 제공할 수 있었던 중서부는 전쟁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병력 대부분을 전장에 보낸다는 것은 농부 대부분을 전장에 보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생긴 노동력 부족은 여성과 아이들이 상당 부분을 메웠다.
이민은 전쟁 기간 동안 다소 느려졌지만 멈추지는 않았으며, 전쟁 중에도 중서부 6개 주에서는 43만 개의 새로운 농장이 개간되었다.
또한 전쟁 전부터 진행되어온 가공 속도의 향상, 운송 체계 구축, 농업 현대화 노력은 농민 수가 줄어든 상황에서도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원래 도시의 성장에 대비하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전시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
반면, 남부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확보하지 못했다.
전쟁 이전까지 남부의 많은 돼지고기 소비는 돼지 몰이에 의존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 공급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돼지 부족만이 남부의 문제는 아니었다.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인해 남부는 소금을 확보할 수 없었고,
고기를 보존할 소금이 없으면 도축 후 며칠밖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수급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1862년경에는 소금 기근(salt famine)**이 심각해졌고,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얻거나,
소금광산이나 가공소를 개발했지만, 이는 연합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에이버리 섬(Avery Island)**에서는 다니엘 에이버리와 에드먼드 맥일헨니가 대형 소금층을 발견했는데,
전쟁 후 재건기에는 이들이 이 섬에서 **타바스코 소스(Tabasco sauce)**를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1863년, 이 소금층 확보를 위해 연합군이 에이버리 섬을 점령했다.
소금이 없으면 고기도 없었고, 이는 군대뿐 아니라 남부 주민 모두에게 심각한 기근을 불러왔다.
한편, 남부가 굶주리던 같은 시기, 중서부는 유럽으로 식량을 수출하며
남부를 고객으로 삼을 수 없게 된 경제적 손실을 보완했다.
음식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지만,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전장을 떠난 병사들이 많아지면, 전투력은 자연히 약화된다.
전쟁 말기, 그리고 사실상 전쟁을 종결시킨 이유 중 하나는,
그랜트와 셔먼 장군이 '남부의 굶주림을 이용해 전쟁을 빨리 끝내자'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지옥이다(War is hell)’**라는 말로 유명한 셔먼은 남부가 가능한 한 오래 싸우려 할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다면 싸울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셔먼의 군대는 통행하는 지역의 식량을 소모하거나 파괴하고,
자신들이 먹지 못하는 모든 것—옥수수, 사료, 돼지, 가축—을 불태우고 죽였다.
**‘대서양으로의 진군(March to the Sea)’**이라 불리는 작전에서,
셔먼은 수백만 톤의 곡물과 사료, 무수한 수의 돼지와 가축을 파괴했고,
그 결과 남부는 초토화되었으며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국가를 다시 하나로 통합하고 남부를 재건하는 일은
매우 오랜 시간과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었으며,
남부는 너무도 심하게 파괴되어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쟁의 끝을 목격했지만, 재건 과정은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전쟁 이야기에서 마무리하기 전에,
이 시기 링컨이 겪고 있던 다른 중요한 일들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링컨 행정부는 단지 나라를 남북전쟁에서 구해낸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링컨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여러 중대한 법률들에 서명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대내부 지역(great interior region)’, 훗날 **중서부(Midwest)**라 불릴 지역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미시시피강 동쪽의 물이 풍부하고 농사짓기 쉬운 땅을 우선 정착했으며, 일부는 강을 건너 아이오와와 캔자스를 주로 만들었지만, 비교적 대초원(Great Plains) 지역으로 향한 사람은 적었다. 이에 링컨은 1862년,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서부 확장을 장려하기 위해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에 서명했다.
이 법은 누구든지 땅을 개간할 의지가 있다면 160에이커의 땅을 소액의 등록비만으로 받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단, 5년간 그 땅을 실제로 경작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만약 정착 후 6개월이 지나 땅을 구매하고 싶다면, 1에이커당 단 $1.25에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이 법의 유일한 자격 요건은 21세 이상이며 세대주일 것. 즉, 여성과 흑인에게도 땅이 개방된 법이었다.⁽³⁶⁾

같은 해인 **1862년, 링컨은 ‘모릴법(Morrill Act)’**에도 서명했다. **‘랜드 그랜트 칼리지법(Land Grant College Act)’**으로 불리는 이 법은, 각 주에 그 주의 연방 의석 수에 비례해 3만 에이커의 공공 토지 또는 등가의 토지채권(scrip)을 부여했고, 각 주는 이를 판매해 농업 및 기술 교육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게 했다.⁽³⁷⁾ 그 결과로 69개의 랜드 그랜트 대학이 탄생했으며, 이 중 다수는 현재 중서부 최고 대학들로 성장했다.⁽³⁸⁾
모릴법은 사실 토머스 제퍼슨이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법적 수단이었다.
자유 인문 교육, 과학, 농업을 결합한다는 이념은 매우 획기적인 개념이었고,
무엇보다도 **교육의 대중화(democratization of education)**를 통해 모든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 교육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노동계층, 여성, 이민자, 소수자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³⁹⁾
홈스테드법과 모릴법이 결합되어 만든 결과는, 소농을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유리한 정치적·경제적 환경이었다.
정부는 이 법들을 통해 ‘국가의 성공은 농업에 달려 있다’는 입장을 명확히 드러냈다.⁽⁴⁰⁾
이 두 법은 사실상, 링컨이 1859년 위스콘신 주립 박람회 연설에서 밝힌 비전의 구현이었다. 당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육체적 세계를 가장 잘 경작하고, 그 아래와 주변을 잘 다듬으며, 내면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를 함께 함양함으로써 우리는 개인적·사회적·정치적 번영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발전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 땅이 지속되는 한 그 번영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⁴¹⁾
링컨이 1862년에 서명한 또 하나의 중대한 법률은 **‘퍼시픽 철도법(Pacific Railway Act)’**이었다.
이 법은 국토의 내부를 더욱 개방하고, 동서 해안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철도가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일들을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이는 젊은 시절 직접 돼지를 몰아 시장에 데려가던 경험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퍼시픽 철도법은 ‘유니언 퍼시픽’과 ‘센트럴 퍼시픽’ 철도 회사에 땅과 국채를 제공해 **대륙횡단철도(Transcontinental Railroad)**를 건설하게 했다.
링컨은 이 철도가 완공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1869년 5월 10일, 황금못(Golden Spike)이 마지막 레일에 박히며 동서가 연결되었다.
덕분에 미국 동부에서 캘리포니아까지의 여행 시간은 6개월에서 단 2주로 단축되었다.⁽⁴²⁾
그러나 이 연결은 동시에 프론티어의 종말을 의미했다.
같은 해 링컨은 미국 농무부(USDA, 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 창설 법안에도 서명했다.
1800년대 초반 발명된 식품 통조림 기술, 그리고 가정이 아닌 낯선 기업에서 식품이 대량 가공되는 현상은 일부 소비자들에게 품질과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철도 덕분에 식품이 주 경계를 넘나들게 되면서 문제가 빠르게 전국으로 퍼질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미 농무부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설립되었다.
- 농업인들이 필요한 지식과 기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
- 식품 가공 기준을 정하고 식품 안전을 확보하는 것.
즉, 농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은 식량 산업 전반을 발전시키고, 식품을 더욱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부서가 되었다.⁽⁴³⁾
요약하면, 1861년부터 1865년까지의 이 시기는 미국을 완전히 변화시킨 시기였다.
전쟁은 나라를 분열시켰지만, 철도는 이를 하나로 묶었고,
중서부는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었으며,
새로운 법률들은 중서부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에는 돼지가 많았다.

1865년 12월 25일, 남북전쟁이 끝난 지 8개월 후, 시카고의 기업 엘리트들은 훗날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게 될 대규모 프로젝트의 개장을 축하했다. 그 이름은 **시카고 유니언 가축시장(Chicago Union Stock Yards)**이었다.⁽⁴⁴⁾
전쟁 기간 동안, 시카고 전역에는 소규모의 돼지 도축장이 흩어져 있었지만, 이번에 문을 연 대규모 시장은 이 모든 도축장을 하나의 거대한 통합 시스템으로 묶어낸 사업이었다. 이로 인해, 시카고는 시인 칼 샌드버그가 말한 바와 같이 **“세계의 돼지 도축장(Hog Butcher for the World)”**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이는 과장이 아니었다. 개장 첫 주에만 17,764마리의 돼지가 처리되었으며, 1900년이 되면 미국에서 소비되는 육류의 82%가 시카고에서 가공되었다.⁽⁴⁵⁾
그 시기, “더 야즈(the yards)”라 불린 유니언 가축시장은 매년 약 50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입장료를 내고 가축 가공 현장을 구경했다.⁽⁴⁶⁾ 요즘 기준으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이 도축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 직접 도축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놀라울 만큼 빠르고 효율적인 작업 방식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시카고 유니언 가축시장은 ‘근대(modernity)’라는 개념의 상징이었다.
시카고 유니언 가축시장과 함께 성장한 **미트팩킹타운(Packingtown)**은 단순한 도축의 장소 그 이상이었다.
이들은 세상을 바꿨다.
이전까지는 도시와 농장이 분리되어 있었다 해도, 여전히 도시 안으로 가축이 들어와 도축되고,
도심 속 정육점에서 거리낌 없이 가공되었다.
하지만 기차가 유니언 야드까지 직접 들어오게 되면서, 가축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도,
정육점 앞에 피 웅덩이가 생기는 일도 사라졌다.
가축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가공되었고, 중서부 가족 농장에서 자란 동물은 이 순간 산업화된 상품으로 탈바꿈되었다.⁽⁴⁷⁾
이로 인해 고기의 가격은 내려가고, 접근성은 높아졌다.
하지만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식품 가격이 낮아지고, 소비자가 생산 과정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는 현상 외에도,
시카고는 또 다른 혁신을 이끌어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얼음 수확(ice harvesting)**이었다.
겨울에 호수에서 얼음을 잘라 저장한 후, 이를 저장고 및 냉장 기차를 식히는 데 사용한 것이다.
이 시스템 덕분에 예전처럼 돼지를 늦가을이나 겨울에만 도축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이제 육류는 연중 언제든지 소비 가능했다.⁽⁴⁸⁾
**‘야즈(the Yards)’**는 가축을 모으는 곳이었고,
**‘팩킹타운(Packingtown)’**은 가축을 제품으로 바꾸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필립 아머(Philip Armour)**와 구스타버스 스위프트(Gustavus Swift) 같은 이름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들은 식품 브랜드화(branding)의 개념을 이끌어간 인물들이었다.⁽⁴⁹⁾
1880년대에는 팩킹타운 내에 29개의 대형 가공공장과 여러 소규모 공장이 들어섰고,
그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1880년 기준, 유니언 가축시장은 연간 700만 마리 이상의 돼지를 수용했고,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이곳에서 일했다.
얼음 수확량도 함께 증가했는데, 스위프트 회사만 해도 연간 45만 톤의 얼음을 사용해 육류를 냉장했다.
1900년이 되자, 가축시장은 475에이커의 면적과 총 130마일 길이의 철도 노선을 갖추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한 오염 문제도 발생했다.⁽⁵⁰⁾
이 모든 변화는 산업과 유통, 식문화 전반을 바꿔놓았다.
시카고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근대식 육류 산업의 상징이자, 미국 식량 시스템의 심장이 되었다.

- Swift's Premium
- A&B Sausage
- Toppinback's Fancy Meats
- Morrell’s Pride
- Hormel
- Armour's Pork Tenderloin
- Pork Brains
- Swift’s Brookfield Sausage 등
이 브랜드들은 모두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미국의 육가공 산업 발전과 함께 등장했고,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미트패킹 산업이 ‘브랜드 고기’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주역들
음식이 빠르게 가공되는 속도, 마케팅할 수 없는 동물 부위의 처리 문제, 그리고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식품을 제조하는 ‘신비로운’ 과정에 대한 대중의 이해 부족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당시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식품 가격의 급격한 변동을 단순한 흉작이 아닌 대기업의 조작이라고 의심했다. 루스벨트는 전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의 아들인 제임스 가필드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대규모 보고서의 결과, 가격 변동이 실제로는 농작물 수확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지만, 루스벨트는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던 중 1906년 업튼 싱클레어의 소설 『정글(The Jungle)』이 출간되었고, 이 책은 루스벨트가 원하던 대중의 관심과 우려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싱클레어는 독자들이 이 책을 ‘동물 문제’로 이해한 것에 실망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자의 권리를 다룬 책으로 썼으며, 사람들이 돼지보다 노동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소설은 극적인 허구의 요소를 담고 있었지만, 사회적 반향이 커서 루스벨트는 『순수식품 및 의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과 『육류검사법(Meat Inspection Act)』을 1906년에 제정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법들은 소비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기생충 트리키넬라증(trichinosis)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지만, 중앙집중형 대규모 가공공장이 공적 감독의 표적이 되었다.
이후에도 육류 소비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식생활 트렌드 변화는 소비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미시간 배틀크리크의 건강 전문가 존 켈로그 박사는 콘플레이크를 개발했고, 일부 사람들은 아침 식사로 고기 대신 시리얼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책상 앞에서 일하는 생활 방식이 농장 노동처럼 많은 칼로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실 켈로그보다 수십 년 앞서, 애머스트 대학 총장이었던 에드워드 히치콕은 베이컨은 육체노동자에게나 필요한 음식이며,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이나 문인에게는 해롭다고 경고한 바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고기 없는 월요일(Meatless Mondays)', '돼지고기 없는 날(Porkless Days)' 캠페인, 그리고 1930년대 대공황은 육류 소비를 일시적으로 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적으로 경미한 감소였고, 대공황 기간 동안 미국 정부는 생필품 지원으로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salt pork)를 배급했으며, 이를 요리하는 법을 담은 요리책까지 발간했다. 미국인들에게 저렴하고 풍족한 고기 소비는 일종의 권리로 여겨졌고, 유행이나 전쟁, 경제 침체만으로는 그것을 포기하게 만들 수 없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디젤 트럭과 고속도로망이 확장되면서, 육류 운송이 철도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되었고, 주요 육류 가공 업체들은 시카고에서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일리노이 주 이스트 세인트루이스, 미시간 주 세인트조셉, 위스콘신 주 그린베이 등지로 이전했다. 수십 년간 매년 1,300만 마리 이상의 동물을 처리해 온 시카고 유니언 스톡야드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971년에 문을 닫았다.
한편,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여전히 육류 산업의 중심지였던 시기에도, 일리노이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 지역의 성장세는 뚜렷했다. 1880년, 아이오와는 600만 마리 이상의 돼지를 보유하며 일리노이(500만 마리)를 제치고 돼지 사육 1위 주가 되었고, 이후로도 성장 속도는 빨라져 1900년에는 1,000만 마리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했다.
네브래스카는 1867년에, 사우스다코타와 노스다코타는 1889년에 주로 승격되면서, 이른바 ‘더 큰 중서부(Greater Midwest)’의 지역 구성이 완성되었다. 이들 주 역시 기존 중서부 주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집중했으며, 1883년 오마하는 자체 유니언 스톡야드를 개장했다. 오마하의 규모는 시카고보다는 작았지만, 1955년 시카고의 쇠퇴와 함께 일시적으로 세계 최대의 가축 시장 및 육류 가공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마하 역시 결국 시카고와 같은 길을 걸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시민 생활과는 멀어 보이는 회사들도, 과거에는 돼지와 관련된 사업에서 출발한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1883년 위스콘신주의 기업가 존 마이클 쿨러는 주물 농기구와 마굿간용 장식을 제작하던 중, 금속을 에나멜로 코팅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이 기술을 돼지를 데치는 큰 쇠통에 적용했으며, 이 쇠통에 다리만 달면 실내용 욕조로도 쓸 수 있다는 점을 카탈로그에 표기했다. 이후 쿨러 컴퍼니는 농기구에서 욕실 위생 설비 제 조로 방향을 전환했고, 현재까지도 욕실 제품 분야에서 유명한 기업으로 남아 있다.
쇠고기의 인기가 일부 지역에서 상승하고, 특히 텍사스에서 북쪽으로 소를 운송하는 철도 종착지와 서부 카우보이 마을의 부상으로 인해 주목받는 동안에도, 중서부 농민들에게 돼지는 여전히 인기 있는 선택지였다. 사람들이 무엇을 키우든 간에, 몇 마리의 돼지는 항상 함께 키웠다. 1903년 아이오와 농업연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돼지는 가난한 이의 친구다. 제대로 돌보면 빠르게 반응하고, 올바른 유형일 경우 적절한 관리를 통해 빠르게 수익을 가져다준다.” 돼지를 키우는 일은 생계 유지와 파산 사이의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요소였다. 그래서 1870년대부터 대공황기까지, 돼지는 ‘모기지 리프터(mortgage lifter)’로 불렸다. 다른 어떤 작물이 팔리지 않더라도, 돼지는 반드시 일정한 수익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대출 상환금을 갚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중서부는 '콘 벨트(Corn Belt)'가 되었고, 대부분의 콘 벨트 지역은 곧 '호그 벨트(Hog Belt)'로 전환되었다. 옥수수가 풍부하다는 점 외에도 이 지역이 제공한 가장 큰 장점은 넓고 탁 트인 공간이었다. 이는 돼지를 대부분의 소비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제로 오늘날 돼지는 대도시 중심지로부터 평균 약 150마일(약 24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육된다. 즉, 1800년대처럼 도시 거리 곳곳에서 돼지를 쉽게 볼 수 있었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실제 돼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이후로도 다양한 식생활 유행이 등장하게 된다. 물론 식품 유행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식량이 풍족한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식품에 대한 공포, 보다 정확히는 '지방 공포(fat panic)', 새로운 품종 개발과 품종 개량 목표, 광고 캠페인, 연구개발, 그리고 돼지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들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돼지는 항상 존재할 것이다.

'돼지와 돼지고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듀록(Duroc) – 세계 최고의 단종(터미널) 종돈 (0) | 2025.05.20 |
---|---|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SPAM (0) | 2025.05.04 |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5장 (0) | 2025.05.04 |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4장 (0) | 2025.05.04 |
『돼지, 돼지고기, 그리고 하트랜드의 돼지들 – 멧돼지에서 베이컨 페스트까지』 제3장 (0) | 2025.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