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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과 식육산업의 역사 인문학

미국의 육우 산업: 기업가 정신과 유전 개량의 역사

by Meat marketer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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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육우 산업: 기업가 정신과 유전 개량의 역사

Beef cattle in the United States: A story of entrepreneurship and genetic advancement

 

현대 미국 쇠고기 산업의 빠른 발전 속도는, 그 산업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멀리 발전해 왔는지를 쉽게 잊게 만든다. 오늘날 미국 쇠고기 산업은 대부분 잘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과학, 유전학, 기술의 발전 덕분에 생산성 향상과 일관된 품질의 쇠고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일부 품종은 선호도가 높아졌고, 각 품종은 전국적인 협회를 중심으로 조직과 발전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소는 1400년대 후반부터 북미 대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탐험 과정에서 미국으로 데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은 오늘날의 육우와는 매우 다른 형태였다. 당시 소는 주로 우유와 고기 생산에 이용됐지만, 효율성이나 선택적 번식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초기 정착민들은 생존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611년 플리머스의 필그림들은 영국에서 수소 한 마리와 암소 세 마리를 들여온 기록이 있다. 이후 이주민들과 함께 미시시피강 동쪽 지역으로 소 사육이 확산됐고, 쇠고기는 주요 단백질 공급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쇠고기 수요가 공급을 크게 초과했던 것으로 보고된다.

서부 지역에서는 스페인을 통해 멕시코로 도입된 소가 텍사스로 들어왔고, 방목 상태로 풀어져 있었다. 최초의 ‘목장(ranch)’은 1700년대 초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조나 지역에서는 아파치 부족과 평화 협정을 맺은 시기에 보다 조직적인 목장이 운영됐지만, 이후 갈등으로 목장은 붕괴됐고, 약탈로 인해 소 떼가 다시 방목 상태로 풀려나기도 했다. 일부 소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의해 포획돼 사육됐다. 예를 들어, 피마(Pima) 부족이 소를 사육하고, 소를 이용해 농경용 소(oxen)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스페인 선교 시설에서도 소가 사육됐다.

텍사스 롱혼(Longhorn) 소는 당시 서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품종으로, 1800년대 초반 미국 평원 전역으로 퍼졌다. 1830년경 텍사스에는 약 10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소 떼를 활용하기 위한 필요로 미국 카우보이가 탄생했다. 1835~1836년 텍사스 독립 전쟁 이후, 카우보이들은 소유주가 없는 소 떼를 모아 텍사스 공화국의 자산으로 삼았다. 남서부 지역의 이 소들은 야생성이 강하고, 크기가 작고, 비육 효율이 낮으며, 젖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골드러시와 이로 인한 정착민 유입은 식량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1850년대에는 동부 소가 서부로 이동했고, 기존 캘리포니아 소와 함께 사용돼 쇠고기 생산이 증가했다. 당시에는 쇠고기를 철도까지 운송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냉장 시설이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육류를 건조, 훈제, 소금에 절이는 방식으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커넥티컷 출신의 올리버 휠러(Colonel Oliver Wheeler)는 캘리포니아로 이동해 고기 가공업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매 육류 시장을 설립했다. 그는 쇠고기 수요를 사업 기회로 인식한 많은 기업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철도가 서부로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쇠고기 역시 함께 확산됐다.

동부 지역에서도 인구 증가와 함께 쇠고기 수요가 지속적으로 존재했지만, 냉장 기술이 없었던 당시에는 공급이 쉽지 않았다. 수많은 소들이 가죽과 지방(tallow)만을 위해 도축됐다. 1860년대 냉장 철도 차량(refrigerated rail car)의 도입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으며, 쇠고기 유통의 혁신적 전환점을 만들었다.

 

댄 케이글(Dan Kagel)의 5,000마리 소 떼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텍사스에서 몬태나로 이동했다. 이 사진은 몬태나의 한 숙소 지붕에서 발견됐다.

이 시기 정착민들도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텍사스에서 몬태나로 향한 최초의 소몰이는 1866년에 이루어졌다. 골드러시 시절 앨더 걸치(Alder Gulch)에서 금을 캐어 부를 얻은 광부 넬슨 스토리(Nelson Story)는 소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텍사스에서 롱혼(Longhorn) 소를 구입했다. 정확한 마릿수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600마리 내외로 알려져 있다. 스토리는 보즈먼(Bozeman)의 주민이었고, 마을 최초의 백만장자로 기록된다. 그는 카우보이들을 고용해 소 떼를 북쪽으로 몰고 갔다. 이 소몰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마찰, 겁 많은 소들의 탈주, 악천후 등 다양한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경험 많은 카우보이들은 결국 몬태나 동부에 도착했고, 이후 수많은 소몰이 행렬이 뒤따랐다. 곧 몬태나에도 목축업이 자리 잡게 되었고, 광부나 사업가들도 소에 투자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 소몰이 문화는 텍사스 카우보이 문화를 몬태나 동부로 전파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의 장비와 작업 방식은 스페인 바케로(vaquero)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캘리포니아 서부 지역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북부 지역에 육우 산업을 정착시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1880년과 1881년의 혹독한 폭설로, 당시 전체 소 떼의 약 50%가 폐사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헤리퍼드(Hereford) 품종이 쇼트혼(Shorthorn)보다 더 강인하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이후 헤리퍼드가 주요 품종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 시기 발명된 철조망(barbed wire)은 목장 경계 구획과 소 떼 관리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 시기 미국 전역에 가축 시장(stockyard)이 설립돼 목장주들이 소를 공정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예를 들어, 1871년에 설립된 캔자스시티 가축 시장(Kansas City Stockyards)은 1991년까지 운영됐다.

 

서부의 야생 텍사스 롱혼(Longhorn) 소 외에도 다양한 품종의 소들이 미국에 도입됐다. 미국에 처음으로 도입된 '개량 품종'은 1783년에 들여온 쇼트혼(Shorthorn) 품종이었다. 당시에는 쇼트혼과 텍사스 롱혼을 교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열병 진드기(fever ticks)로 인해 대부분의 도입 소들이 폐사했다. 이후 질병 원인이 밝혀지고 상황은 다소 개선됐지만, 외국 품종을 미국의 기존 소 떼에 도입하는 과정은 여전히 많은 건강상의 문제를 동반했다.

1817년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영국에서 헤리퍼드(Hereford) 품종을 미국으로 들여왔다. 1881년에는 오늘날의 미국 헤리퍼드 협회가 설립됐다. 헤리퍼드는 쇠고기 생산 방식과 경제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인기도가 변화했지만, 현재까지도 미국 쇠고기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곧이어 앵거스(Angus) 품종이 도입됐다. 조지 그랜트(George Grant)는 스코틀랜드에서 캔자스로 앵거스 수소 4마리를 가져왔고, 이들은 텍사스 롱혼 암소와 교배돼 미국 쇠고기 산업에 폴드(polled, 무각) 유전자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수년간 약 1,200마리의 앵거스 소가 스코틀랜드에서 직수입되어 미국 앵거스 품종의 기초가 형성됐다.

이러한 외래 품종 도입과 교잡은 한때 원래의 텍사스 롱혼 품종을 거의 멸종 위기까지 몰아넣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내무부(Department of Interior)가 이 품종 보존을 위한 예산을 책정했고, 이를 기반으로 오늘날의 텍사스 롱혼 품종이 유지되고 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농업과 목축업이 더욱 발전했고, 쇠고기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개선됐다. 1900년대 초반에는 쇠고기용 소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이는 현대 종축(seedstock)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헤리퍼드와 같은 품종 내에서 선택적 개량이 이루어져 최종 제품의 품질이 크게 향상됐다. 소의 체형은 중간 크기로 조절됐고, 젖 생산량과 도체 수율과 같은 형질 개선이 중점적으로 진행됐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지방(tallow)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빠른 성장과 성숙 속도를 지닌 소 선발이 강조됐다. 그러나 이 과정도 과도하게 진행돼 당시에는 체구가 지나치게 넓고 짧은 형태의 소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과도한 선발 집중은 왜소증(dwarfism)과 같은 유전적 결함을 포함해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모든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소 역시 항상 유전적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특정 형질에 대한 극단적인 선발은 유전적 다양성을 감소시켰고, 특정 혈통에서 유전적 결함이 누적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헤리퍼드(Hereford) 품종은 왜소증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았다. 현재는 번식에 사용되기 전 모든 동물에 대해 알려진 유전적 결함을 검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결함이 표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당 혈통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많은 종축가들은 자신의 소 떼에서 상당수를 도태시켜야 했고,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 시기 산업은 많은 교훈을 얻었다. 1954년 레드 앵거스 협회(Red Angus Association)가 세계 최초의 성과 중심 품종 협회로 설립됐다. 이후 종축가는 과거의 극단적인 선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동결 정액 기술이 도입됐고, 인공수정(AI) 기술이 대중화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후 최고의 유전 형질을 보다 효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는 유럽 대륙 품종이 미국으로 도입됐다. 여러 품종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수입됐고, 종축가들은 기존의 헤리퍼드와 앵거스 소에 이러한 품종을 교배하기 시작했다. 시멘탈(Simmental)도 이러한 품종 중 하나였다. 트래버스 스미스(Travers Smith)는 북미로 들여올 시멘탈 수소를 찾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1966년 ‘파리지앵(Parisien)’이라는 붉은색과 흰색 반점 무늬의 송아지를 발견해 캐나다로 수입했고, 이후 검역 절차를 거쳤다. 스미스는 시멘탈이 미국 쇠고기 산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곧 미국 시멘탈 협회가 설립됐고, 이 품종은 미국에서 자리 잡게 됐다. 시멘탈과 기존 영국계 품종을 교배한 결과, 이유 체중(weaning weight)이 크게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안타깝게도 산업은 여전히 유행에 휘둘리고 있었고,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의 체형 크기가 과도하게 커졌다. 이로 인해 큰 송아지 출생 체중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많은 수의사들은 시멘탈(Simmental)과 같은 대륙계 품종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 품종들은 교잡 강건성(hybrid vigor)으로 인한 장점이 있었지만, 송아지 출생 체중을 낮게 유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 앵거스 협회(American Angus Association)와 다른 품종 협회들이 문제 해결에 나섰고, 비육업자와 도축업자들이 원하는 송아지를 생산할 수 있도록 상업용 종축(seedstock) 개발에 집중했다. 이 시기부터 미국 쇠고기 산업은 전시용(show cattle), 성과 중심(performance cattle), 클럽 송아지(club calves)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유전 기술, 데이터 수집, 성과 측정이 종축 산업을 이끌고 있으며, 상업 생산자들이 각자의 사육 환경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앵거스 품종은 여전히 산업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흑모(black-hided) 소가 가장 흔하다. 그러나 상업 농장에서는 교잡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시멘탈과 앵거스를 교배한 시맹거스(SimAngus), 앵거스와 헤리퍼드를 교배한 블랙 볼디(black baldy)가 있다. 유전자 선발 기술은 매우 정교해져, 미국 남부의 더운 페스큐(fescue) 지역에서도 해당 환경에 적합한 품종을 선택할 수 있다. 여러 품종의 장점을 결합해 출생 체중은 낮고, 이유 체중은 크며, 도체 품질이 뛰어나고, 면역력이 강하며, 전반적으로 수익성이 높은 소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쇠고기 산업의 초기 역사 속 텍사스 롱혼의 왜소하고 각진 체형과 기형적 쇼트혼을 떠올려 보면, 오늘날의 소가 얼마나 정밀하고 효율적으로 개선됐는지 실감할 수 있다. 쇠고기는 미국 초기부터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도 그 위치는 지속될 것이다.

 

릴리 플랫츠(Lilly Platts)는 몬태나에 거주하며, 미국 시멘탈 협회(American Simmental Association)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여러 농업 전문 매체에 프리랜서로 기고하고 있다.

 

American Bee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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