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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에 나타난 한국계 육식 문화 Ⅱ

by Meat marketer 202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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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에 나타난 한국계 육식 문화 Ⅱ

― 외식업계의 야키니쿠 전문점 메뉴를 단서로 ―

김 태호

 

키워드: 육식 문화, 도살 금지, 육식 산업, 야키니쿠, 식문화, 한국 요리


머리말

3.한국계 커뮤니티와 일본 사회의 육식 환경

4.일본 사회의 외식 문화와 재일 코리안

 

3. 일본·한국 사회의 육식 환경

3.1. 전근대 일본의 육식 문화

일본 사회의 도축장과 외식업 내 야키니쿠 전문점에서는 한국어 유래의 고기 부위 명칭이 확인된다. 그 원인을 탐색하기 위해, 한일 양국 사회의 육식 환경과 육식 문화의 역사적 경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아스카 시대인 금명(欽明) 13년(552년)**으로, 백제의 성왕이 석가여래의 금동불상과 경론 등을 헌상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불교가 일본에 유입되어 여러 과정을 거쳐 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육식을 금기시하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의 전래는 일본 사회에 육식을 멀리하게 되는 문화적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천무(天武) 4년(675년)**에는 최초로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지 말라. 이를 어길 시 처벌한다”는 내용의 **‘살생금단령(殺生禁断令)’**이 공포되었으며,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는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후에도 유사한 금단령이 반복적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단지 불교 사상 때문만이 아니라, 농경 사회에서 소와 말이 귀중한 노동력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를 함부로 도축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실용적 이유도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에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로 일본에 체류한 **루이스 프루이스(1532–1597)**가 집필한 『유럽 문화와 일본 문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일본인은 들개나 학, 대형 원숭이, 고양이, 생미역 등을 즐긴다” 그리고 “그들은 소고기는 먹지 않지만, 집에서 기르던 개는 약용으로 훌륭하게 활용한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천무기의 살생금단령이 대체로 준수되고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소고기는 먹지 않았지만 들개나 대형 원숭이, 그리고 가정견은 일부에서 식용 또는 약용으로 섭취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 전체적으로는 육식을 자제하고 금기시하는 환경이었지만, 일부 계층이나 상황에서는 원숭이·개 등의 육류를 섭취하는 문화가 남아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육류 요리를 대접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조선 사회에는 육식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 사절을 접대하기 위한 음식으로 육류 요리를 준비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 접대를 담당했던 쓰시마 번은, 먼 곳에서 오는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사절단의 식성을 미리 파악하고, 각 접대 장소에 이를 알리는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통항일람(通航一覧)』(조선국부 제46권, 연경도)은 “조선인이 좋아하는 음식 목록”에 소고기, 돼지고기, 사슴고기, 가정에서 기르는 돼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네 발 달린 동물은 겉으로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외국 사절단을 접대하기 위해서는 짐승고기를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근대 국민국가가 수립되던 메이지 5년(1872년), 일본은 서구 문명에 대해 개방 정책을 채택하면서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즉, “우리 조정에서는 중세 이래로 육식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황제 폐하께서 더 이상 의례적 금기를 고집하지 않으시고, 이제부터 육식을 하라는 방침을 내리셨다”는 내용의 기사가 확인된다.
이를 통해 일본 사회는 오랜 기간 이어져 온 육식 금지의 문화적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육식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회로 전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고대부터 일본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육식 금지 문화는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의 육식 문화는 상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짧고 얕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일본의 육식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면, 한국어나 서양어에서 유래한 고기 부위 명칭이 쉽게 수용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미 육식 경험을 갖고 있던 타 문화권의 사람들이 일본 사회의 육식 산업에 진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으며, 이는 일본 내 야키니쿠 문화에 외래 명칭이 퍼지는 데에 유리한 토대를 제공했을 것이다.

 

3.2 전근대 한국의 육식 문화

일본 사회에서 한국어 유래의 고기 부위 명칭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밝히기 위해서는, 한국의 육식 환경이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절에서는 전근대 시기의 상황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고대 불교 전래에 대해 언급한다. 고구려(기원전 37년 ~ 서기 668년)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전을 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제(기원전 18년 ~ 서기 660년)에서는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는 이후 일본의 아스카 시대로 불교를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신라(기원전 57년 ~ 서기 935년)에서는 눌지왕(재위 417~458년) 대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 묵호자가 불교를 전파하였으나, 이는 공인되지는 못했고, **법흥왕 14년(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 공인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전근대의 한반도에서는 삼국 시대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육식을 자제하는 문화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시대에는 불교 문화가 더욱 세련되고 정제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육식을 억제하려는 분위기가 강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대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보다 먼저 불교가 전파되었으며, 육식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 또한 일본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고려 시대(918~1392)에도 이어진다. 불교가 사실상 국교 수준으로 자리 잡았던 고려 사회에서는 육식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더욱 강해졌고, 이를 증명하는 자료로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123년에 남긴 『고려도경』이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민족(고려)의 정치는 매우 자비롭고, 불교를 좋아하며 살생을 금한다. 국왕과 대신이 아니면 양이나 돼지를 먹지 않으며, 도살도 잘 하지 않는다.”
이로써 고려 사회가 육식을 꺼려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혀 육식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국왕, 대신, 사절 등에게는 육식이 제공되었고, 다만 일상적으로 육식을 하지 않았던 만큼, 도살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흔적도 확인된다.
같은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네 발을 묶어 맹렬한 불 속에 던지고,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린 후 털을 태워내고 물로 씻는다.
만일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 그 후 배를 가르고 위장과 장기를 꺼낸다.
분변과 오염물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물로 여러 차례 씻는다. 그렇게 국이나 구이로 만들어도 그 악취는 사라지지 않는다. 매우 조악한 방식이다.”
이 기록은 당시 고려의 도살 기술이 비위생적이고 미숙했음을 보여준다.

고려 사회가 육식 문화로 전환하게 된 계기에는 몽골 침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고종 19년(1231년)**에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고, 고려는 저항을 이어갔으나 **고종 46년(1259년)**에 결국 화친을 맺게 되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고,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육식을 금기시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점차 육식 문화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특히 **충렬왕(재위 1274~1308)**은 원(몽골)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国大長公主), 훗날 원성공주라 불리는 왕녀와 혼인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몽골의 풍속이 고려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되었다.
『고려도경』에는 제국대장공주가 어머니의 부고를 접했을 때 슬퍼하면서도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려는 국가적 차원에서는 불교를 신봉하였지만, 몽골 지배 이후에는 육식 문화가 점차 확대되고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1392~1897)**는 ‘숭유억불(崇儒抑仏)’ 정책을 내세워 유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억제하였다. 유교적 통치 이념 아래에서는 육식을 억제하는 분위기는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적 예제에 따라 육류는 제례·혼례·상례 등 중요한 행사에서 필수적인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다만 조선 역시 농경 사회였기 때문에, 소는 귀중한 노동력이자 생계 수단이었으며, 함부로 도살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조선 사회에서의 육식은 상품화된 시장 체계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로 제사나 잔치와 같은 특정한 의례에 맞춰 제한적으로 도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전근대의 일본과 한국은 서로 다른 정치 체제 속에서 육식 문화 또한 상이하게 전개되었다. 한국의 경우, 몽골 지배 이후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근대 국가가 성립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육식의 경험이 누적되어 왔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육식 환경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즉, 일본 사회에서는 육식의 역사 자체가 짧고 얕았기 때문에, 육식이 하나의 식문화 장르(genre)로 정착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이로 인해 한국 및 서양 유래의 고기 부위 명칭이 일본 사회에 도입될 여지가 상대적으로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육식 경험이 풍부한 집단이 일본 내 육류 산업에 진입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4. 일본 사회의 육식 문화와 재일 코리안

4.1 재일 코리안과 야키니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 사회는 육식의 역사 자체가 짧다.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된 메이지 9년(1876년), 한일 양국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 육식 문화를 경험한 이들이 일본에 입국하게 되었다.

이후 1910년부터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였고,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게 됨으로써, 한반도의 육식 문화가 일본 사회에 전파되기 쉬운 환경이 형성되었다. 대체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은 유학생이나 단신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25년경 이후부터는 가족 단위로 일본에 이주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들 대부분은 한반도 출신자들만이 모여 사는 '조선인 부락(朝鮮人部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인과 섞여 살지 않았으며, 일본 사회와의 교류도 미미하였다.
조선인 부락은 주로 강변, 습지대 등 기반 시설(상하수도, 전기 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지역에 형성되었다.

한편, 일부 한반도 출신자들은 일본 사회 내 차별을 받던 ‘피차별 부락(被差別部落)’에 함께 살거나, 그 인근 지역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1997년에 발표된 『니시나리구 재일 코리안 인권의식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재일 코리안은 피차별 부락과 일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보고서에는 재일 코리안이 “인간관계가 편안하며, 이웃 일본인에게 호르몬 구이나 김치를 나눠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재일 코리안이 호르몬 요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목할 점은, 전전(戰前) 시기부터 한반도 출신자들이 피차별 부락과 같은 지역에서 교류하며 호르몬 요리를 나누어 먹었던 사실에서, 전후(戰後) 재일 코리안이 호르몬 구이를 업으로 삼게 되는 흐름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전 일본 사회에서는 한반도 출신자들이 일본 사회 전반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한국 요리 전문 외식업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도쿄에 한정된 조사이긴 하나, 이러한 실태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28년 『도쿄의 음식점 현황』에 따르면, ‘조선 요리점’과 ‘대만 요리점’을 포함하여 총 3곳이 있었다고 하나, 이 3곳의 구체적 분류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일본 사회에서 한반도 출신자가 한국의 육식 문화를 일본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시켰다기보다는, 조선인 부락과 일부 피차별 부락 내부에서 육식 문화를 공유한 수준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전 일본 사회에서는 한국 요리 외식업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육식 문화가 본격적으로 일본 사회에 진출하기 전의 ‘잠복기’였다고 볼 수 있다.

전후(戰後)가 되면, 일본 사회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였고, 한반도 출신자들 중 일부는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남게 된다.
이러한 재일 코리안 가운데 일부는 한국 요리를 중심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식문화가 점차 일본 사회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나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와 같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한국 음식인 김치를 판매하거나, 한국 요리 전문 외식업체를 열어 호르몬 요리를 제공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여기서 한국어 유래 고기 부위 명칭 정리표 (표 2) 중 **⑤ ‘테찐(テッチャン)’의 다른 이름인 ‘호르몬’**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전후 가와사키의 ‘시멘트 거리’ 지역에 있었던 상황을 통해, 재일 코리안이 호르몬을 어떻게 구입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미야즈카 토시오의 현지 취재 내용을 인용할 수 있다.

“호르몬은 시바우라 도축장에서 중개인 같은 사람들이 구입해 와서, 자전거 뒷좌석에 얹은 1되짜리 깡통이나 대나무 채반에 얼음을 넣고 여기까지 운반해 왔다. 그걸 나무판자 같은 곳에 늘어놓고 팔았지요. (…) 중개인이 도축장에서 가져온 내장을, 인근의 재일 한국인들이 자신이 먹을 만큼만 구입해 가서, 모츠니(곱창 찜)나 구이 요리로 만들어, 어머니의 비법 양념장에 찍어 먹었습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개인은 도축장에서 호르몬(내장 부위)을 가져와 판매했고, 재일 코리안은 이를 구입해 모츠니나 구이 요리로 조리하여 가정에서 섭취하였다.
호르몬은 위생적이지 않고 값싼 식재료였으며, 사실상 버려질 뻔한 내장 부위를 아주 저렴하게 확보할 수 있는 식재료로 활용되었다.
재일 코리안의 가정에서는 호르몬 요리는 물론, 육식 자체에 익숙한 생활상이 엿보인다. 추정컨대, 중개인 자체도 육식 경험을 가진 재일 코리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946년, 간토 지역에서 야키니쿠 전문점의 원조로 여겨지는 **‘메이게츠칸(明月館)’**이 도쿄에서 창업하였으며, 당시에는 직원 식사로 호르몬 요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곧, 호르몬이 고급 식재료가 아니라 값싼 식재료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호르몬’이라는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호르몬(hormone)**이란 단어가 원래 생체 내 조직이나 기관의 활동을 조절하는 생리적 물질을 가리키며, 내장을 먹으면 기력이 회복된다는 인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오사카 사투리에서 대장 등 내장을 ‘버리는 것’으로 인식하며, ‘호루모노(ほるもの, 放るもの)’가 변화하여 ‘호르몬’이 되었다는 설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들을 종합하면, 후자의 설이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1977년 2월 7일, 최길성과 유상희1919년생 재일 코리안 M씨를 대상으로 진행한 구술 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확인된다.
전전(戰前) 도쿄 시나가와 지역에 있었던 일인데, 재일 코리안은 도축장에서 버려지던 소 내장 등을 주워 요리하였고, 일본인 손님을 접대하거나, 이웃 일본인에게 한국 요리를 먹여보기도 했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소를 도축한 뒤 대장 등 내장을 폐기하던 관행 속에서, 재일 코리안이 그것을 활용하여 요리한 것을 보여주며, ‘호루모노(放るもの)’ 설이 유효함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호르몬이라는 명칭이나 어원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이 정도로 논의를 제한한다.

호르몬이라는 값싼 식재료에 주목하여 사업화한 음식점도 존재했다.
그 예가 바로 1922년 무렵 오사카에서 창업한 ‘북극성(北極星)’이라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원래 오믈렛을 판매했으나, 1936년부터 프랑스 요리를 모방한 내장 요리로 메뉴를 전환하였다. 당시 북극성의 호르몬 요리는 고가의 메뉴로 책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유럽에서는 내장 요리가 정육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포착해 상업 전략을 구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버려질 뻔한 호르몬을 저렴하게 수급한 후, 프랑스식 조리법을 접목시켜 고급 요리로 탈바꿈시켜 높은 가격에 판매했던 것이다.

반면, 재일 코리안은 일본인들이 먹지 않던 소 내장을 주워 요리하거나 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즉, 호르몬 요리는 처음부터 외식업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재일 코리안의 가정 요리로부터 출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야키니쿠 전문점을 열게 되었고, 이후에는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호르몬 요리는 재일 코리안의 생활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일본의 육식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재일 코리안은 가정 요리로부터 외식업으로 내장 요리를 확장시켜 나갔으며, 한반도에서 육식 경험을 갖고 있었던 재일 코리안이 육식 문화가 미처 자리잡지 못했던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 외식업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갖는 야키니쿠는 전후 일본 외식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다수의 재일 코리안이 야키니쿠 외식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최길성과 유상희는, 당시 재일 코리안이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천시되던 직업일지라도 생계 수단으로 부모의 직업을 계승하여 야키니쿠점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김태호 또한, 재일 코리안이 종사한 직종 중 하나로 ‘한국 요리·야키니쿠 전문점’을 중요한 예로 제시하고 있다.
1988년 전후 시기에는, 야키니쿠 전문점의 운영자 대부분이 재일 코리안이었으나, 이후에는 일본인 경영자도 이 업계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재일 코리안이 야키니쿠 외식업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계기 중 하나는, 고기를 굽는 화로를 실내에 들여왔다는 점이다.
더불어 고기를 굽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기와 냄새가 실내에 남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영업을 감행했다는 점이다.
당시 야키니쿠 전문점에서는, 화로를 실내에 들여오는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연기와 냄새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는 1981년 신포(シンポ) 주식회사에서 개발한 ‘무연 로스터(roaster)’를 통해 해결되었고, 이는 일본 외식업 내 야키니쿠 전문점의 확산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야키니쿠라는 명칭이 일본 사회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1968년에는 에바라 식품공업이 ‘에바라 야키니쿠 소스(조선풍)’를 개발하여 ‘가정의 맛’이라는 컨셉으로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처럼, 식품회사가 가정용 소스를 개발하면서, 야키니쿠는 외식업뿐 아니라 일반 가정에도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야키니쿠 문화가 일본 사회에 정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일련의 전개 과정을 종합해보면, 이 시기는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2 한일 관계와 야키니쿠 요리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일 관계는 점차 우호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한국 내에서는 대규모 국제 이벤트들이 개최되며, 한일 간의 교류는 한층 더 활발해졌다.
많은 일본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음식을 접하게 됨으로써, 일본 사회 내 외식업으로서의 야키니쿠 전문점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한일 관계와 관련된 주요 이벤트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1984년, 일본 NHK 방송에서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한글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같은 해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는 최초로 일본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어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안 게임,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이러한 한국 내 이벤트를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한국 음식에 대한 친밀감을 형성하였고, 귀국 후에는 야키니쿠의 확산에 기여하는 지지 세력이 되었다.
미야즈카 토시오는 1980년대의 한일 관계와 야키니쿠에 대해, 서울 올림픽이 일본에서 야키니쿠 붐을 일으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후 글로벌화 시대가 본격화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사회에서는 **‘한류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더욱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일본 사회에서는 한국의 식문화가 점차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일본에서는 1992년 10월, ‘전국야키니쿠협회’가 임의 단체로 출범하였고, 1998년 5월 28일에는 농림수산대신의 인가를 받은 사업 협동조합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협회는 1993년, 숫자어의 음을 활용한 어감 결합에 기반하여 8월 29일을 ‘야키니쿠의 날’로 제정하였다. 이는 **‘야키(8)–니(2)–쿠(9)’**라는 음의 조합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야키니쿠는 일본 사회에서 외식업의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정착한 음식문화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는 재일 코리안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야키니쿠 업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야키니쿠의 보급에 주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래의 (표 4)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한일 관계의 전개와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 요리가 걸어온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일본 사회에 있어서 야키니쿠 전문점의 야키니쿠는 (표 4)에서 나타난 경과를 거쳐, 중화요리, 프랑스요리, 이탈리아요리에 이어 또 하나의 외국 요리로서 한국 요리가 정착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고찰해온 바와 같이, 외식업 야키니쿠 전문점의 메뉴에 보이는 한국어 유래 고기 부위 명칭, 재일 코리안이 전후 호르몬 구이에서 야키니쿠점 운영으로 진출해온 경위는,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로 간주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만으로 야키니쿠를 한국계 요리로 간주하는 것은 단정하기 어렵다.

 

4.3. 야키니쿠 전문점에서의 한국 요리

일본 사회의 외식업 야키니쿠 전문점에서는 고기 이외에도 한국 요리, 즉 채소류와 식사류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물론 매장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항목도 있지만, 대체로 한국 요리의 채소류로는 김치(김치), 나물(나물), 상추(상추) 등이 대표적으로 제공된다.
여기서 상추는 고기를 싸서 먹는 용도로 제공되는 채소이며, 일본어로는 종종 **서니 레터스(Sunny Lettuce)**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한, 식사류로는 일반적으로 비빔밥(비빔밥), 냉면(냉면), 국밥(국밥), 찌개(찌개), 순두부(순두부), 떡국(떡국), 김밥(김밥) 등이 제공된다.

이러한 **채소류와 식사류를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 5)**이다.
(표 5)에 나타난 **채소류(김치, 나물, 상추)**와 **식사류(비빔밥, 냉면, 국밥, 찌개, 순두부)**는, 일본의 대표적인 국어사전인 『고지엔(広辞苑)』과 『대사림(大辞林)』에도 등재되어 있는 고기 이외의 한국 요리 일품 메뉴들이다.

 

 

※ 주석

  • 『고지엔(広辞苑)』 제2판(1969년), 제3판(1983년), 제4판(1991년), 제5판(1998년), 제6판(2008년), 제7판(2018년)은 “이와나미 서점(岩波書店)” 발행
  • 『대사림(大辞林)』 제1판(1988년), 제2판(1995년), 제3판(2006년)은 “산세이도(三省堂)” 발행

이 표는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 전문점에서 제공되는 주요 한국 요리 중, 채소 및 식사류가 일본의 대표적 국어사전에 어느 정도 수록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일부 한국 요리 항목은 여전히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상태이며, 이 점은 한국 요리가 일본 사회에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자, 아직 문화적 정착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일반적으로 ‘김치’라는 명칭은 상위 개념의 어휘에 해당한다. 야키니쿠 전문점에서는 ‘김치’보다는 일본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하위 개념의 요리명, 즉 배추김치, 깍두기(깍두기), 오이김치 등을 메뉴에 기재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물’ 역시 추상적인 상위 개념 명칭으로, 야키니쿠 전문점에서 제공하는 실질적 내용은 콩나물무침, 고사리무침, 무생채 등을 모둠으로 제공하는 구성이 일반적이다.

특히, (표 5)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본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야채류 요리 중에는 **‘저래기 사라다(チョレギ サラダ)’**라는 일품요리도 있다.
이 요리는 채소를 소금에 절이지 않고 그대로 양념해 무쳐 먹는, 한국 경상도 지역의 전통적인 나물 무침을 가리킨다.
본래 **‘저래기(저레기)’ 혹은 ‘재래기(재레기)’**라고 불리며, 여기에 **서양어 ‘사라다(샐러드)’**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한편, 국어사전에 등재된 ‘비빔밥’은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아우르는 명칭이다. 일반적으로 ‘비빔밥’은 밥과 나물을 섞어 비벼 먹는 요리를 뜻하지만, ‘돌솥비빔밥’은 이를 돌솥에 넣고 가열한 하위 개념의 조리법을 가진 음식이다.

또한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떡국’, ‘김밥’**은 각각 **일본의 ‘오조니(雑煮)’, ‘후토마키(太巻)’**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이러한 한국 요리는 야키니쿠 전문점에서 단품 요리로 제공되기도 하며, 고기·야채·식사를 하나의 세트나 코스로 구성해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야키니쿠 전문점 메뉴에 나타나는 고기 이외의 한국 요리 중 야채류와 식사류일본의 국어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한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그에 따른 일본 사회 내 요리 유행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 이러한 유행이 즉각 사전 등재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일정한 시차(time lag)**가 존재한다.
따라서 향후 한일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음식 문화의 유행이 한층 더 확산된다면, 지금은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야키니쿠 전문점 내 고기 부위 명칭, 야채류, 식사류 또한 국어사전에 추가로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외식업 야키니쿠 전문점 메뉴에 보이는 고기 외 한국 요리인 야채류 및 식사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러한 한국 요리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라는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이들 한국 요리가 일본의 국어사전에 외래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라는 인식을 결정짓는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도 외식업 야키니쿠 전문점에서 한국 요리가 제공되는 한,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라는 이미지가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맺음말

세계에는 선사시대 이래로 고기를 구워 조리한 ‘구이 요리’가 널리 존재해 왔다. 일본 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며, 현재 외식업으로서의 ‘야키니쿠’는 한국계 요리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형성시킨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사회의 육식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인 덴무(天武) 4년(서기 675년)에 내려진 살생 금지령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육식이 금지되었으며, 육식을 기반으로 한 조리 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 이행하면서 서양의 영향을 받아 육식 문화가 유입되었으나, 이미 발달된 외래 육식 문화가 빠르게 스며들 수 있는 문화적 공백이 존재했다. 이로 인해, 고기를 부위별로 해체해 명명하는 명칭은 대부분 서양 유래의 명칭이 채택되었다. 이는 일본 농림수산성이 공개한 ‘소고기 부위 도감’에서도 확인되며, 해당 자료에는 다수의 서양식 부위 명칭이 등장한다. 또한 외식업으로서의 야키니쿠 전문점의 메뉴에는 한국어 유래의 부위 명칭이 다수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육식 문화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기에, 육식 경험이 있는 이들이 외식 산업에 진입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육식으로 전환하던 근대 국민국가 성립기에 한일 간에는 **병자수호조약(1876)**이 체결되었고, 이어 식민지 지배기로 진입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육식 문화 경험이 있던 조선반도 출신 인물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조선인 부락을 형성하거나 일본 내 피차별 부락 및 그 주변 지역으로 유입되어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육식에 익숙했으나, 전전(戰前) 시기에는 일본 사회의 전면에 나서서 야키니쿠 전문점을 경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육식 문화는 주로 조선인 부락, 피차별 부락, 그 주변 지역 내에서 비공식적 문화로 공유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후에 이르러,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잔류하게 된 재일 코리안들은, 혼란기와 식량 부족 상황 속에서 암시장에서 김치를 팔거나 호르몬 요리를 조리해 판매하는 등 생계를 이어갔으며, 이러한 기반에서 야키니쿠 전문점을 경영하게 되었다. 이때 실내에서 화롯불을 들여 조리하는 어려움연기 및 냄새 문제가 있었음에도, 재일 코리안들은 야키니쿠를 일본 사회에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이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기점으로 일본 사회에 야키니쿠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일본 식품회사가 가정용 야키니쿠 양념을 개발함으로써 가정에서도 야키니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화로를 실내에 들이는 문제와 연기·냄새 문제는 1980년대 초 무렵, 산업 기계 메이커에 의해 무연 로스터가 개발됨으로써 해결되었고, 이는 외식 산업으로서의 야키니쿠 업계 성장을 촉진시켰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일 간 우호 관계가 심화되면서 일본 사회에서는 야키니쿠 문화가 폭넓게 확산되었다. 기존에는 대부분의 야키니쿠점이 재일 코리안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나, 이 시기를 경계로 일본인 경영자도 업계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글로벌화 시대가 도래한 이후, 전국야키니쿠협회가 발족되었으며, **‘야키니쿠’를 8월 29일(やきにく)로 정한 ‘야키니쿠의 날’**도 제정되었다. 이로 인해, 야키니쿠는 일본 사회에서 중화요리, 프랑스요리, 이탈리아요리에 이어 하나의 외국 요리 장르로서 확실하게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과 속에서 일본 사회의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로 간주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메뉴에 등장하는 한국어 유래의 고기 부위명, 그리고 재일 코리안이 야키니쿠점을 경영해 온 사실에 있다. 여기에 더하여, 야키니쿠 전문점 메뉴에 고기 외에도 다양한 한국 요리(채소류 및 식사류)가 함께 제공되는 점이 한국계 요리로서의 인식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결정적으로, 이들 한국 요리들이 일본 국어사전에 외래어로 등재됨으로써,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라는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향후, 설령 재일 코리안이 야키니쿠점 운영에서 물러난다 해도, 해당 점포의 메뉴에서 고기 이외의 한국 요리가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한, 야키니쿠가 한국계 요리라는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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