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언 스톡야드(Union Stock Yards)의 역사
Chicago Tribune, December 29, 1865
지난 한 해 동안 시카고에서 건설된 많은 대규모 사업들 가운데, 상업의 승리라 불릴 만한 사업으로 정당하게 손꼽히는 것이 바로 시 외곽, 할스테드(Halsted)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유니언 스톡야드(Union Stock Yards)이다. 이 시설은 최근 완공되었으며, 그 건설은 작년 6월 초에 시작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이곳은 습지이자 거의 쓸모없는 대초지였으나, 지금은 시카고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동산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구상과 실행에 헌신한 인사들의 진취성과 에너지에 그 공이 있다.
현재 이 가축시장이 차지하고 있는 부지 면적은 345에이커에 달하며, 부지 매입과 각종 시설물 건설에 투입된 비용은 이미 100만 달러를 초과했다. 이곳에는 축사를 비롯해 각종 헛간, 울타리, 우리, 가축병원, 펌프와 물탱크, 철도, 도로, 전면 목재 포장된 지면, 직원 숙소 등이 갖추어져 있다.
특히 부지 내에는 ‘하우 하우스(Hough House)’라 불리는 6층 규모의 호텔이 위치해 있으며, 크기는 130×144피트, 건축비만 12만 5천 달러에 이르며, 서부 지역에서도 가장 안락하고 우아한 호텔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외에도 환전소, 은행, 식당, 전신실, 중개사무소 등이 입주한 복합건물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유니언 스톡야드는 시설의 규모와 체계, 전반적인 설비 면에서 세계 어느 곳의 가축시장보다 뛰어난,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가축시장이라 할 수 있다.
유니언 스톡야드 (Union Stock Yards)
출처: Chicago Illustrated, 1866년 9월 / The Land Owner, 1873년 12월
1863년부터 1867년까지 **시카고 & 알턴 철도(Chicago & Alton Railroad)**의 수석 엔지니어로 재직한 **옥타브 샤누트(Octave Chanute)**는, 이 기간 동안 시카고 유니언 스톡야드 설계 공모전에 도면을 제출하였다. 그의 설계안은 수십 개의 경쟁안을 제치고 최종적으로 채택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유니언 스톡야드의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되어 전체 건설 과정을 감독하였다.
샤누트는 단순한 철도 엔지니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라이트 형제(Wright brothers)**의 멘토가 되어 비행기의 원리를 함께 연구한 인물로, 오늘날 **"항공의 아버지(Father of Aviation)"**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 짧은 기록은 19세기 중반 시카고 산업 인프라와 공학 기술의 집약체였던 유니언 스톡야드가 단순한 가축시장이 아니라, 이후 미국 기술사와 항공사에도 영향을 미친 지점임을 보여준다.
The Land Owner, December, 1873
세계 시장을 위한 시카고의 돼지고기 및 쇠고기 포장 산업 –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 주요 식육 품목의 가공 과정
시카고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식육 가공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아래는 **유니언 스톡야드(Union Stock Yards)**에 위치한 **아머 앤 컴퍼니(Armour & Co.)**의 대규모 가공 공정을 단계별로 소개한 구성이다.
- 통 제조 부서(Coopering Department)
- 햄, 라드, 염장육 등을 담는 **목제통(barrel)**을 제작하는 부서. 포장과 수출에 필수적임.
- 아머 사의 포장 공장 조감도(Bird’s Eye View of the Great Packing Houses of Messrs. Armour & Co.)
- 유니언 스톡야드 내 거대한 공장군의 항공 시점 이미지. 산업화된 식육 시스템의 규모를 시각적으로 보여줌.
- 라드 탱크(The Lard Tanks)
- 돼지기름(라드)을 가열·정제하여 저장하는 대형 탱크. 라드는 당시 주요 식용유와 비누 원료로 널리 사용됨.
- 햄 냉각실(Cooling Room for Hams)
- 훈연 또는 절인 후의 햄을 저장해 균일한 숙성을 유도하는 냉장 공간.
- 소고기 숙성실(Hanging Room for Beeves)
- 도축된 쇠고기를 걸어두고 숙성과 건조 과정을 진행하는 공간.
- 햄 저장고 내부(Interior of Ham House)
- 소금에 절인 햄들이 겹겹이 쌓여 숙성 중인 모습. 고온 다습한 조건을 조절함.
- 지하 저장실 및 벌킹실 전경(General View of Cellar and Bulking Rooms)
- 햄이나 라드 등을 대량 저장하거나 혼합 가공하는 공간.
- 돼지 절단 작업(Hog Cutting)
- 도축된 돼지를 절단하고 부위별로 분리하는 핵심 공정. 효율적 작업을 위해 컨베이어나 고정식 칼날 사용.
- 돼지 숙성실(Hanging Room for Hogs)
- 도축 후의 돼지를 걸어두어 체액을 빼고 위생적 숙성 상태로 전환.
- 증기 동력 소고기 절단(Beef Cutting By Steam Power)
-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증기기관식 커터기를 활용한 쇠고기 분할. 대량 작업의 효율성을 높임.
- 훈연실 외관(Exterior View of Smoke Houses)
- 햄, 베이컨 등 훈연육 가공을 위한 건물 외형. 나무칩 연기를 이용해 향미와 보존성을 부여함.
이 전체 시스템은 산업혁명 이후 식육산업의 기계화, 대량생산, 세계화를 상징하는 모델이었으며, 시카고는 이를 통해 세계 식품 유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The Land Owner, January, 1874
시카고가 곡물, 목재, 돼지고기 가공 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면, 축산업 분야에서도 그 어떤 도시보다 훨씬 앞서 있다. 이전 호 『랜드 오너(The Land Owner)』에서 시카고에서 진행되는 육류 가공 과정을 생생하게 소개한 바 있고, 이번 호에서는 이에 보완하여, 모든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거대한 유니언 스톡야드(Union Stock Yards)**를 일련의 스케치와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엄청난 규모의 가축시장은 시카고 남서부 경계에 인접한 이건 애비뉴(Egan Avenue)와 핼스테드 스트리트(Halsted Street)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
유니언 스톡야드의 건설은 1865년 6월에 시작되어, 그해 12월 35일(31일을 의미함)에 정식으로 개장되었으며, 이 모든 작업은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완료되었다. 시공은 시카고의 오랜 거주자인 **R. M. 허프 대령(Col. R. M. Hough)**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회사가 보유한 부지 면적은 총 345에이커이며, 현재 그중 **140에이커가 실제 가축 사육장과 우리(pens)**로 사용되고 있다. 호텔과 부속 시설이 45에이커를 차지하며, 나머지 160에이커는 향후 가축 거래가 더 확대될 경우를 대비해 추가 펜 시설용으로 확보된 상태이다. 현재의 거래량만 보더라도 머지않아 이 예비 부지들이 반드시 필요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삽화를 담당한 화가는 **트랜짓 하우스(Transit House)**의 돔 위에서 바라본 시점을 바탕으로, 스톡야드의 배치와 주요 건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감도 형식으로 그려냈다. 이 그림을 통해 현장 전체의 광대한 규모와 사방에서 철도가 진입하여 대초원의 가축들이 이 세계 최대의 식품시장으로 운반되는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시카고의 거대한 유니언 스톡야드 조감도 — 세계에서 가장 큰 가축 시장.
시카고 유니언 가축시장 – 세계 최대의 가축 시장
1871년 1월, 『The Land Owner』는 시카고의 유니언 스톡 야드(Union Stock Yards)를 조명하였다. 이 시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가축 유통 허브로, 시카고의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인 사우스사이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지 중앙에는 웅장한 Transit House 호텔이 묘사되어 있다. 이 호텔은 유니언 스톡 야드를 방문하는 상인, 가축 거래인, 철도 관계자들이 머무는 중심 숙소 역할을 했다.
화면 하단에는 두 명의 인물이 인물 초상화 형태로 소개되어 있다.
- 왼쪽 인물은 John B. Sherman으로, 유니언 스톡 야드의 **총책임자(Superintendent)**였다.
- 오른쪽 인물은 Geo. T. Williams로, **비서 겸 재무 담당(Secretary and Treasurer)**을 맡고 있었다.
화면 아래쪽에는 **텍사스 소 떼(Texas Cattle)**가 몰려오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이 시장이 미국 전역의 가축을 한곳에 모으는 거대한 허브 역할을 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이미지는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미국 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가축 시장과 육류 가공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수용 능력 및 운영 설비, 사무소 등
현재 유니언 스톡 야드의 수용 능력은 소 25,000두, 돼지 100,000두, 양 22,000두이며, 말은 500두를 수용할 수 있는 마구간이 마련되어 있어 총 147,500두의 가축을 수용할 수 있다. 이곳에는 32마일의 지하 배수관, 8마일에 이르는 도로 및 골목길, 다양한 우리에 설치된 3.5마일의 급수통, 10마일의 사료통이 있으며, 총 2,300개의 문, 1,500개의 개방형 소 우리, 800개의 덮개형 돼지·양 우리가 있다. 이러한 모든 시설을 짓기 위해 2,500만 피트의 목재와 80만 파운드의 못과 스파이크가 사용되었다. 주요 도로 중 하나는 니콜슨 블록 포장 방식으로 포장되어 있으며, 다른 도로와 골목은 재와 자갈로 포장되어 있다. 모든 우리 바닥은 3인치 두께의 판재로 되어 있어 하수 시스템 덕분에 마르고 청결하다.
이 야드들은 시카고로 향하는 모든 서부 철도 노선과 연결되어 있으며, 회사 자체적으로도 강철 레일로 포장된 철도 노선 20마일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100개의 프록(frog, 철도 분기기)과 스위치가 설치되어 있다. 급수 시스템은 방대한 저장 탱크를 통해 이뤄진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탱크들은 각각 114,000갤런, 총 342,000갤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으며, 이는 아르테시안 우물에서 끌어온 물이다. 이 물은 배관을 통해 모든 우리에 공급되며, 각 구역마다 대형 소화전이 설치되어 있어 화재 시 호스를 연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평상시에도 항상 1,000피트의 호스가 준비되어 있으며, 야드 전역에 12대의 배브콕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다. 또한 화재 발생 시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조직된 인력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까지 이 야드 건설에 소요된 총 비용은 2,500,000달러에 달한다. 별도의 경찰력이 상시 배치되어 있어 이곳은 하나의 자치구처럼 운영된다. 야드는 오전 6시에 문을 열고 오후 6시에 폐쇄되며, 이 시간 외에는 경비원이나 출입 허가를 받은 자를 제외하고는 출입할 수 없다.
200명의 직원이 야드 각 부서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작업조는 담당 반장의 지휘 아래 차량의 상·하차, 계측, 배치, 급식, 출하 등의 실무를 담당한다. 야드의 임원진은 제임스 M. 워커 사장, 존 B. 셔먼 총책임자, 조지 T. 윌리엄스 비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존 셔먼과 윌리엄스가 실제 운영을 맡고 있다. 이 두 사람의 초상화는 본 간행물 표지에 실려 있다.
또한, 본지의 다른 지면에 광고를 게재한 W.H. 뱅크스 컴퍼니는 본 회사 및 이곳의 고객들에게 대량의 기계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들의 카탈로그를 요청해보는 것이 좋다. 이 회사는 시카고 북서부 지역에서 최대 규모의 창고와 설비(스팀 엘리베이터, 철도 트럭 등)를 갖추고 있으며, 빠르게 성장 중인 사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거대한 거래 규모
다음 표는 1865년 유니언 스톡 야드가 개장된 이래 1873년 12월 1일까지의 소, 돼지, 양, 말의 반입 수량을 신중하게 집계한 것이다. 이 수치는 어떠한 설명보다도 이 시장에서 이루어진 거래의 방대한 규모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유니언 스톡 야드가 세계 최대 규모이자 가장 활발히 이용되는 가축 시장임을 명백히 입증한다.
이곳은 미국 전역에서 가축 거래에 가장 접근성이 좋은 지점으로, 그 규모와 운영 설비는 지금까지 그 어떤 곳에서도 필적한 사례가 없다. 또한, 미국 북서부 및 남서부의 주와 준주(準州)에서 온 가축 출하자들이 이곳에서 가장 빠르고 만족스러운 판매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기도 하다.
거래소 건물 (The Exchange Building)
시카고 트리뷴, 1874년 11월 29일
우리는 미국 서부의 축산업, 특히 시카고를 기점으로 한 생축의 처리 및 운송과 관련된 산업을 다룰 것이며, 이 산업이 가지는 상업적·재정적 중요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 한다. 그 경이로운 규모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시카고의 역사 속 페이지를 1825년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때의 시카고는 아직 습지와 늪지대에 불과했으며, 상업적 중요성은 거의 태동 단계로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 당시의 거래 활동은 모피를 취급하는 몇몇 상인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해, 시카고는 처음으로 생축(소)의 통과 운송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윌리엄 해밀턴(W. Hamilton)이라는 인물이었다. 이어서 1826년에는 고든 S. 허버드(Gordon S. Hubbard)가 시카고에 최초로 돼지 떼를 몰고 들어왔다. 이 시기의 곡물 시장에는 '풋 옵션(put)'이나 '콜 옵션(call)'이란 개념도 없었고, ‘황소파(bulls)’와 ‘곰파(bears)’가 가격 등락을 유도하는 일도 없었다. 생축 시장은 아직 발전되지 않았으며, 열성적인 기자들이 거래 상황을 묻거나, 수취, 출하, 판매 실적 등의 건조한 통계 수치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그 후 7~8년 동안 이 상업 분야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1832년, 도시 연대기에 중요한 사건이 하나 기록되었고, 그 업적은 조지 W. 데일(George W. Dale)에게 돌아간다. 그가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 시카고 축산업의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식육 가공(packing)' 산업이었다. 이후 몇 년간 이 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우리는 1832년부터 1856년까지의 구간은 지면 절약을 위해 생략한다.
하지만 1856~1857년에는 축산업에 엄청난 추진력이 생겼고, 그 시점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 산업은 미국 내 다른 상업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비약적인 확장을 거듭해왔다. 그 성장 속도는 세계 어느 국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빠르며, 어제로 표현되던 미미한 규모는 오늘날 거대한 규모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이 자본 흐름의 엄청난 규모가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1857년과 현재 간의 수치 비교를 통해 쇠고기(육우)의 입고량 및 출하량을 제시하고자 한다.
쇠고기의 입고 및 출하량은 특히 최근 몇 년간 돼지에 비해 그 증가 폭이 크지 않았다. 따라서 다음의 표는 1865년 유니언 가축시장(Union Stock Yards) 이 설립된 이후부터 생축 거래가 실제로 얼마나 증가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공되었다.
1865년 당시 돼지의 월평균 입고 수는 40,235두였던 반면, 1873년에는 361,479두로 증가했다. 한편, 올해(1874년)의 경우 10월까지의 데이터를 보면 299,928두가 입고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도축 및 육가공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올해의 연간 평균 입고량은 1873년의 수치를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유니언 가축시장이 미국 내 생축 유통과 가공의 중심지로서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를 입증해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1866년의 말 입고 두수는 1,553두였던 반면, 1874년에는 16,359두로 증가하였다.
위 표는 생축 교역의 막대한 증가를 수치로 명확하게 보여주며, 이 분야에 투입된 자본의 확장 또한 공식적으로 입증해 준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거대한 사업체’로 성장한 유니언 가축시장의 세부적인 발전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1826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에는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거칠게 만든 몇 개의 축사(pens)
— 이것이 시카고 축산업 초기의 전부였다. 강 근처에 간단한 우리(pen)들이 지어졌는데, 이는 오늘날 농촌 지역의 소규모 축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다음 단계는 1836년 **레이크쇼어 축사(Lake Shore yards)**의 등장이다. 그 직후, 윌러드 F. 마이릭(Willard F. Myrick)은 29번가 인근에 한 ‘여관(tavern)’을 지었는데, 당시에는 시골 호텔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 여관 바로 동쪽, 현재의 사우던 호텔(Southern Hotel)이 있던 트웰브스 스트리트(State & Twelfth Streets) 모퉁이 근처에 몇 개의 가축 우리를 설치하였다.
이 두 지점은 상당수의 가축들이 입고되어 처리되던 장소였으며, 이후 1848년이 되어 잘 알려진 “불스 헤드(Bull’s Head)” 축사가 현재 워싱턴 홈(Washington Home)이 자리한 매디슨 스트리트와 오그던 애비뉴 모퉁이에 문을 열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곳은 과거 술집이었지만 이후 술을 끊고 금주자들을 위한 요양원으로 변모했다.
이 불스 헤드 야드는 라플린(Laflin), 루미스(Loomis), 호레이스 홉킨스(Horace Hopkins), D. K. 벨딩(Belding), 존 B. 셔먼(John B. Sherman) 등이 운영하였으며, 1856년까지는 당시 교통수단이 마차(stage-coach)였던 점을 감안하면, 거래량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철도가 개설되기 전이라 대부분의 가축은 걸어서 도시에 반입되었고, 소비 역시 시카고 현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처럼 한가롭고 고전적인 방식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서부 철도망이 대초원(Prairie)을 가로지르며 상업적 흐름이 급속히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전례 없는 발전이 시카고를 중심으로 서부 자원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당시 시카고, 벌링턴 & 퀸시 철도(Chicago, Burlington & Quincy), 시카고 & 노스웨스턴(Chicago & Northwestern), 시카고, 록 아일랜드 & 퍼시픽, 일리노이 센트럴, 시카고 & 올턴, 밀워키 & 세인트 폴, 시카고, 댄빌 & 빈센스 등은 시카고로 들어오는 주요 철도 노선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이 거대한 가축 시장으로의 생축 운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동부로의 출하는 미시간 센트럴, 레이크 쇼어 & 미시간 서던, 피츠버그 & 포트 웨인, 피츠버그, 신시내티 & 세인트루이스, 캐나다 서던,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존 B. 셔먼은 불스 헤드 야드가 몰락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고, 그의 일관된 사업 통찰력으로 해당 야드를 매각한 뒤 유니언 스톡 야드에 지분을 투자하게 된다.
**머릭 야드(MYRICK YARDS)**는 1856년 미시간 센트럴 철도(Michigan Central Railroad)에 의해 임대되었으며, 이후부터 해당 시설이 폐쇄될 때까지 “셔먼 야드(Sherman Yards)”로 불렸다. 이 야드는 약 5,000두의 소와 80,000두의 돼지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보다 약 4년 전, 미시간 서던 철도(Michigan Southern Road)가 완공되면서 증가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해 “서던 야드(Southern Yards)”가 건설되었는데, 위치는 클라크(Clark) 서쪽 22번가였다.
1859년에는 조셉 맥퍼슨(Joseph McPherson)이 ‘포트 웨인 야드(Fort Wayne Yards)’를 개장하였으며, 위치는 미첼가(Mitchell Street)와 스튜어트 애비뉴(Stewart Avenue)의 교차점이었다. 이 야드는 ‘서던 야드’와 비슷한 규모였다. 이후 1862년에는 T.C. 루미스 앤 컴퍼니(T.C. Loomis & Co.)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셔먼 야드 남쪽의 코티지 그로브 애비뉴(Cottage Grove Avenue)에 새로운 야드를 열었으나, 재정적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3년 내에 폐쇄되었으며, 해당 시설의 자재들은 셔먼 야드로 매각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우리(pens), 시설물들, 야드들이 형성된 후, 우리는 이제 왜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유니언 가축 시장(Union Stock Yards)을 건설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한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1865년, 축산업 교역은...
가축시장의 원래 계획
당시 가축 산업은 상업적으로 매우 중대한 규모로 성장했으며, 그에 따라 당시 과밀하고 불충분했던 기존의 시설을 개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셔먼 씨를 포함한 몇몇 인물들은 이 산업이 초기 단계부터 성장해온 과정을 면밀히 관찰해온 이들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에 대해 가장 적합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산업이 지닌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과거의 성장 속도를 토대로 미래의 확장을 가늠한 결과, 대규모 유니언 야드(Union Yards) 건설을 최초로 주장하게 되었다.
이 야드에서 거래된 축산물의 지난 한 해 동안의 총 가치가 9,200만 달러에 달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다른 산업 분야에서 필요한 자금보다도 3,600만 달러나 더 많았으며, 서부 전역의 상업 전반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규모였다. 이 지역의 축산업은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금융계에도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돈육 및 쇠고기 가공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이 시기에는 막대한 양의 통화가 유입되었다.
이와 같은 필연적이고도 명백한 결과를 예측한 관계자들은, 기존 시스템의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대규모 가축 시설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기존 시스템은 다양한 야드로 가축을 운송하기 위해 수많은 전환 작업(switching)이 필요했고, 판매 우리(pens)까지 가축을 옮기는 데 과도한 시간과 인력, 비용이 소모되었다.
이에 따라 **가축시장의 중앙집중화와 통합(centralization and consolidation)**이 결정되었으며, 시카고, 벌링턴 & 퀸시 철도(Chicago, Burlington & Quincy Railroad)와 노스웨스턴 철도(Northwestern Railroad)가 존 도어(John Dore)와 여러 자본가들과 협력하여 도시 서쪽 경계 인근에 ‘웨스턴 유니언 드로버스 야드(Western Union Drovers’ Yards)’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야드는 맥퍼슨(McPherson)과 앨러턴(Allerton)에게 운영이 맡겨졌으나, 같은 해 유니언 스톡 야드의 공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드로버스 야드는 불과 3개월 만에 폐쇄되었고, 자재는 유니언 스톡 야드로 매각되었다.
이제 1865년까지의 가축 산업과 다양한 야드의 위치 및 운영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 살펴본 후, **유니언 스톡 야드 & 트랜짓 컴퍼니(Union Stock Yards and Transit Company)**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주제는 이미 여러 차례 다루어졌을 수 있지만, 이 기업이 보여준 성공의 규모는 창립 당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도 다시 한 번 그 역사를 살펴보는 데 흥미를 느낄 것으로 본다.
1864년 가을, 회사는 사업 계획서를 발행했고 100만 달러의 자본금이 모집되었으며, 이 중 92만 5천 달러는 여러 철도 회사들이 출자하고 나머지는 민간 투자자들이 맡았다. 이후 회사는 정식 인가를 받아 조직되었고, T. B. 블랙스톤(T. B. Blackstone) 씨가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65년 6월 1일, 첫 삽이 뜨였고, 그해 12월 25일, 유니언 스톡 야드는 완공되어 북서부 지역의 가축 교역을 공식적으로 개시하였다. 이 사건은 곧 도시 내 기존의 모든 야드가 폐쇄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회사가 소유한 부지는 총 345에이커로, 이 중 140에이커는 가축 우리, 약 40에이커는 익스체인지(Exchange), 유니언 스톡 야드 은행 등 주요 건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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