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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g Fat Surprise - Why Butter, Meat & Cheese Belong in a Healthy Diet 3. The Low-Fat Diet Is Introduced to America

by Meat marketer 202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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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g Fat Surprise - Why Butter, Meat & Cheese Belong in a Healthy Diet

3. The Low-Fat Diet Is Introduced to America

3. 미국에 도입된 저지방 식단

1961년은 앤셀 키스(Ancel Keys)와 그의 식이-심장병 가설(diet-heart hypothesis)에게 있어 중요한 해였다. 그는 세 가지 주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첫 번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심장병 단체인 미국심장협회(American Heart Association, AHA) 내에서, 두 번째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인 *타임(Time)*의 표지에서, 세 번째는 미국에서 최고의 과학 권위기관이자 연구 자금의 최대 공급처였던 국립보건원(NIH)에서였다. 이 세 기관은 영양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들이었고, 이들이 식이-심장병 가설에 호의적인 편향을 갖게 되자, 마치 한 팀처럼 움직이며 키스의 이론을 제도화하고 수십 년에 걸쳐 확산시켰다.

그중에서도 AHA는 마치 항로를 유지하며 식이-심장병 가설을 밀어붙이는 대형 선박과 같았다. 1924년, 심장병 유행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창립된 이 단체는, 처음에는 새로운 질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자 했던 심장병 전문의들의 학술 단체였다. 수십 년 동안 AHA는 규모가 작고 재정적으로도 빈약하여 사실상 수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1948년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식품 대기업 프록터 앤 갬블(Procter & Gamble, P&G)이 라디오 방송 “진실 혹은 결과(Truth or Consequences)”의 수익금 전액을 AHA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금액으로 1,740,000달러(오늘날 가치로 약 1,700만 달러 수준)를 기부한 이 사건은 AHA의 공식 역사에 따르면 “갑자기 금고가 가득 차고 연구, 공공 보건 활동, 지역 지부 개발을 위한 자금이 마련되어, 그야말로 꿈의 조건이 충족된 순간”이었다. 이 거액의 기부는 AHA를 “출범시킨 빅 머니의 일격”이었다. 실제로 이듬해, AHA는 전국에 7개의 지부를 개설했고, 265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금했다. 1960년까지는 300개 이상의 지부를 갖게 되었고, 연간 3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P&G를 비롯한 식품 대기업들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에 AHA는 미국 최고의 심장병 단체로 부상했고, 미국 내 최대 규모의 비영리 단체가 되었다.

1948년에 확보한 자금 덕분에 AHA는 처음으로 전임 이사를 고용할 수 있었고, 그는 이전까지 미국성서공회에서 모금 활동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례 없는 전국적 모금 캠페인을 전개했다. 버라이어티 쇼, 패션쇼, 퀴즈쇼, 경매, 영화관 내 모금 등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졌고, 이 모든 활동은 기금 마련과 함께 미국인들에게 심장병이 국가의 주요 사망 원인임을 알리는 목적이었다. 1960년경, AHA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연구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대중은 물론 정부 기관과 전문가들, 언론에 이르기까지 심장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권위 있는 출처가 되었다.

식단이 심장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AHA는 1950년대 후반, 중년 남성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마련하고자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미 AHA 창립자 폴 더들리 화이트(Paul Dudley White)의 지도 아래 “신중한 식단(prudent diet)”을 따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심장병을 겪은 이후에도 다시 집무에 복귀한 사실은, AHA의 조언이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AHA의 위상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모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이젠하워의 심장마비 이후, AHA는 전년 대비 40% 증가한 기부금을 받아냈다.

 

새롭게 구성된 미국심장협회(AHA)의 영양위원회는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조기 심장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고 위원회는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는 이러한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며 조심스러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해당 보고서는, 고콜레스테롤 수치가 개인의 심장마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지조차 명확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식단을 “급격하게” 바꾸라고 권고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다만 위원회는 체중 과다자의 경우 칼로리 섭취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지방 섭취를 전체 열량의 25~30% 수준으로 줄이는 것을 권장했다.) 위원회 구성원들은 심지어 앤셀 키스(Ancel Keys)와 같은 식이-심장병 가설 지지자들에게도, “비판적 검토를 견디지 못하는 증거에 근거하여 지나치게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당시의 증거는 그러한 “경직된 입장”을 뒷받침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AHA 정책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키스는 시카고 출신 의사이자 동맹이 된 제레마이아 스탬러(Jeremiah Stamler)와 함께 영양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키스와 스탬러 모두 영양학, 역학, 또는 심장학을 전공한 이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전 보고서 이후로도 키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전혀 강화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위원회 내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AHA는 식이-심장병 가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그 결과 1961년 발표된 보고서는 “현재 이용 가능한 최선의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식단 내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을 줄임으로써 심장마비와 뇌졸중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포화지방을 옥수수유나 대두유 같은 다불포화지방으로 “합리적으로 대체”할 것도 권고했다. 이른바 ‘신중한 식단(prudent diet)’은 여전히 지방 함량이 꽤 높은 편이었으며, 사실 AHA가 전체 지방 섭취량의 감소를 강조하게 된 것은 1970년에 들어서 제리 스탬러가 해당 방향으로 단체를 이끌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 전까지 약 10년간 AHA는 주로 육류, 치즈, 전유, 기타 유제품에 포함된 포화지방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61년의 AHA 보고서는 세계 최초로 포화지방이 적은 식단을 심장병 예방 수단으로 권장한 국가 차원의 공식 발표였다. 이는 앤셀 키스의 이론을 요약한 문서에 다름없었다.

이것은 키스 개인에게 있어서는 물론, 그의 직업적·이념적 입장에서도 막대한 승리였다. AHA는 과거에도 지금도 심장병 관련 분야에서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기관이다. 관련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AHA 영양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매우 영예로운 일이며, 이 위원회가 발행하는 식이 가이드라인은 곧 영양 조언의 ‘황금 기준’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키스가 자신의 가설을 이 가이드라인에 집어넣은 것은 마치 AHA라는 생물체의 DNA를 교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가설은 AHA의 성장 방향을 규정했으며, 이후 AHA는 지난 반세기 동안 키스의 식이-심장병 이론이 실현되는 데 있어 방향타이자 추진 엔진이 되어 왔다.

 

키스 자신은 자신이 작성에 참여한 1961년 미국심장협회(AHA) 보고서가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가 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고위험군에게만 식단을 권고한 점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불평할 필요는 없었다. 그로부터 2주 후, 『타임』지는 당시 57세였던 키스를 표지 인물로 실었다. 그는 흰색 실험실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모습으로 표지에 등장했으며, 뒤에는 혈관이 퍼져 나오는 심장 그림이 배경으로 삽입되었다. 『타임』지는 그를 “콜레스테롤 씨(Mr. Cholesterol)”라 부르며, 식이 지방 섭취량을 전체 열량의 평균 40%에서 극단적인 수준인 15%까지 줄일 것을 권고한 그의 조언을 소개했다. 포화지방에 대해서는 더 강경한 입장을 제시했으며, 전체 열량의 17% 수준이던 것을 4%까지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조치야말로 고콜레스테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기사에서는 식이-심장병 가설과 키스의 개인적인 이력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키스는 자유롭고 날카로운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그러한 성격이 오히려 권위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단호한 처방을 내리는 인물로 그려졌다. “사람들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고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식사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두라”고 그는 말했다. 기사에 따르면, 정작 키스 본인은 자신의 권고를 철저히 따르지는 않았다. 그가 마가렛과 함께 집에서 촛불과 브람스 음악을 배경으로 즐기는 저녁 식사의 ‘의례’에는 일주일에 세 번 이하로 스테이크, 찹, 로스트 등 육류가 포함되었다. (그와 스탬러가 학회에서 스크램블드 에그와 베이컨 다섯 조각을 먹는 장면이 동료에게 목격된 적도 있다.) “죽 같은 음식만 먹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는 말했다. 『타임』 기사에서는 그의 이론이 여전히 “일부 연구자들”로부터 의문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관상동맥질환의 원인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잠시 언급될 뿐이었다.

식이-심장병 가설을 추진하는 또 하나의 엔진은 언론이었다. 대부분의 신문과 잡지는 키스의 이론에 초기에 설득되었다. 예컨대, 『뉴욕 타임스』는 폴 더들리 화이트에게 1면을 할애했고, 키스의 견해도 일찍부터 다뤘다. “중년 남성, 지방 섭취에 주의하라”는 제목의 기사(1959년)는 그 예시 중 하나다. 연구계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심장병 유행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고, 식이 지방과 콜레스테롤은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키스는 홍보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직설적이고 확신에 찬 언어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에 기자들에게 훨씬 매력적이었다. 반면 록펠러 재단의 피트 아렌스(Pete Ahrens)와 같이, 충분한 과학적 증거의 부재를 조심스럽게 지적하는 과학자들의 신중한 의견은 덜 주목받았다. 언론은 AHA의 권고안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이 단체가 ‘신중한 식단(prudent diet)’ 가이드라인을 발표하자 『뉴욕 타임스』는 “최고의 과학 기관이 식단의 지방을 줄이거나 조정하면 심장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견해에 권위를 부여했다”고 보도했다.

 

 

이 이미지는 1961년 1월 13일 자 『타임(TIME)』지의 표지로, 앤셀 키스(Ancel Keys)가 등장한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표지에는 키스 박사가 실험복을 입고 있으며, 그의 뒤에는 심장과 동맥의 삽화가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이미지 상단에는 “Diet & Health(식이와 건강)”라는 배너가 걸려 있다.

아래 설명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앤셀 키스는 포화지방이 심장병을 유발한다는 이론을 제창했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양학자로 평가된다.

이 표지는 그가 대중과 과학계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장면은 '식이-심장병 가설'이 미국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년 후, 뉴욕타임즈는 새로운 식이 패턴에 대해 마치 피할 수 없는 흐름인 듯한 인상을 주었다.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미국에서 우유의 매력이 사라진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사람들이 한때 유제품을 건강과 활력의 상징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콜레스테롤과 심장 질환을 연상한다”고 보도했다. 언론은 거의 일치된 태도로 앤셀 키스의 가설을 지지했다. 신문과 잡지는 그의 식단 이론을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렸고, 여성 잡지들은 이를 주방으로 끌고 들어가 지방과 고기를 줄인 요리법을 소개했다. 영향력 있는 건강 칼럼니스트들도 이 이론의 확산에 기여했다. 하버드대학교의 영양학 교수 장 메이어(Jean Mayer)는 미국 내 주요 신문 100개에 주 2회씩 실리는 칼럼을 연재했으며, 해당 신문들의 총 발행부수는 3천5백만 부에 달했다. 그는 1965년에 저탄수화물 식단을 “대규모 살인 행위”라고 표현한 바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뉴욕타임즈의 건강 전문 기자인 제인 브로디(Jane Brody)가 식이-심장병 가설의 가장 강력한 홍보자로 자리잡았다. 그녀는 AHA(미국심장협회)의 발표나 지방 및 콜레스테롤이 심장병 또는 암과 연관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충실히 보도했다. 그녀가 1985년에 작성한 「미국, 더 건강한 식단으로 기운다(America Leans to a Healthier Diet)」라는 기사에서는 지미 존슨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그는 “예전에는 아침이면 베이컨 굽는 냄새로 잠을 깨곤 했다”고 말했고, 그의 아내는 베이컨 기름을 모아 달걀을 부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침 식사에서 나는 냄새는 사라졌지만, 그 덕분에 우리 모두 건강해졌다”며 다소 아쉬운 듯 말한다.

 

 

기자들은 생생한 묘사를 통해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말한 내용은 보건 당국이 권고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언론과 영양 전문가들 모두에게 앤셀 키스가 제안한 인과 관계의 고리는 매우 타당하게 느껴졌다. 즉, 식이 지방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올리고, 이것이 결국 동맥을 경화시켜 심장마비로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너무 단순해서 거의 자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저지방 식이요법, 이른바 '신중한 식단'이 널리 퍼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증거는 그 뒤를 따라가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이 인과 고리의 모든 단계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포화지방이 가장 해로운 형태의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킨다는 증거는 없으며, 총 콜레스테롤 수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장마비 위험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도 입증되지 않았다. 심지어 동맥의 협착이 심장마비를 예측한다는 사실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960년대 당시에는 이러한 과학적 반론이 대중적으로 드러나기까지는 아직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공식 기관들과 언론은 이미 키스의 매력적으로 단순한 아이디어에 열렬히 동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아이디어에 충분히 설득당한 나머지, 반대되는 증거에는 눈을 감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무시되었던 여러 증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일부, 특히 『세븐 컨트리 연구(Seven Countries Study)』는 식이-심장병 가설을 지지하는 듯 보였지만, 같은 시기에 진행된 다른 많은 연구들은 이 가설에 쉽게 협조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런 몇 가지 연구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앤셀 키스의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았던 초기 관찰들

1950년대, 미국 공중보건국의 요청으로 연구자 윌리엄 주켈은 노스다코타 주 북동쪽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심장마비나 관상동맥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조사했고, 1년간 총 228건의 사례를 파악했으며 이 중 162명에 대해서는 식이와 생활습관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수집했다. 흡연자가 심장 질환에 더 많이 걸렸다는 점은 확인되었으나, 포화지방, 불포화지방, 총 열량 섭취량 측면에서는 질환자와 비질환자 간에 어떠한 차이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연구진은 60세 이하 심장마비 환자 100명의 식단을 수년 동안 동일 연령·성별의 대조군과 비교했으나, 섭취한 지방의 양이나 종류 면에서 두 집단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팀이 이듬해 50명의 중년 여성에게 동일한 연구를 시행했을 때도 결과는 같았다. 이들은 미국 임상영양학 저널(AJCN)에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당시 키스가 국제 통계를 근거로 포화지방과 심장병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본 연구는 그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인도 봄베이 서부철도의 최고 의료 책임자 S. L. 말호트라는 식이 차이를 발견하긴 했지만, 이는 오히려 키스의 가설에 반하는 결과였다. 그는 1960년대 중반, 100만 명이 넘는 철도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인도 남부 마드라스의 철도 미화원들이 북부 펀자브 지역의 미화원보다 심장 질환 발병률이 7배나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식단이었다. 펀자브 사람들은 대부분 유제품에서 기인한 지방을 훨씬 더 많이 먹고 있었던 반면, 마드라스 지역은 불포화 지방인 땅콩기름을 소량 섭취하는 식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 지역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12년 더 짧았다. 말호트라는 논문 결론에서 요거트, 버터와 같은 발효 유제품을 더 많이 먹을 것을 권했다. 그의 논문은 역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중 하나에 실렸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고 거의 인용되지도 않았다.

같은 시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로세토 지역을 조사한 연구도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이탈리아계였으며, 이웃 마을에 비해 심장 질환 사망률이 절반 이하로 “놀랍도록 낮았다.” 지방 섭취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지방이 두껍게 붙은 프로슈토를 자주 먹었고, 대부분의 요리를 라드(돼지기름)로 했다. 179명의 남성을 추적한 결과, 대부분 식사량이 많고 와인을 즐겼으며, 과체중인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도 1955년부터 1961년까지 50세 이하 남성 중 단 한 명도 심장마비로 사망하지 않았다.

이 연구는 1964년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발표되었고, 키스는 이 논문이 “전 세계적으로 과장된 주목을 받았고 일부 의학계에서 즉각 받아들여졌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66년 같은 학술지에 3쪽짜리 비판 글을 실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보통은 짧은 '독자 서한' 형식으로만 반론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키스는 연구 대상이 무작위가 아니라 자발적 모집이었다는 점, 그리고 식이 정보가 평생 식습관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결국 “로세토 데이터는 식이 중 칼로리와 지방이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반론 이후 이 연구는 거의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지방 섭취와 심장병 사이의 연관성이 불분명하다는 연구 결과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1964년 세계보건기구(WHO) 소속 F. W. 로웬스타인은 심장병이 거의 없는 남성들에 관한 연구를 모두 수집한 결과, 이들의 지방 섭취 비율은 매우 다양했다. 베네딕트 수도승과 일본인은 총 섭취 칼로리 중 약 7%만을 지방에서 얻었지만, 소말리아인은 무려 65%에 달했다. 이 외에도 마야인은 26%, 필리핀인은 14%, 가봉인은 18%, 세인트키츠 섬의 흑인 노예는 17%였다. 섭취한 지방의 종류도 다양했는데, 불교 승려는 식물성 지방인 목화씨유와 참기름을 먹었고, 마사이족은 대부분 동물성 지방인 우유를 대량 섭취했다. 대다수 집단은 식물성과 동물성 지방을 혼합하여 섭취했다. 이러한 사실은 식이 지방과 심장 질환 사이의 연관성이 있더라도 그 관계는 약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연구들은 대부분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게재되었고, 일부는 학계에서 논의되기도 했지만, 식이-심장병 가설의 지지자들은 언제나 그 연구들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할 이유를 찾아냈다. 연구가 잘못 해석되었거나, 무의미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에 기반했다는 식이었다.

사실, 연구자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연구를 선택하고 어떤 연구를 배제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본능인 '확증 편향'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이는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으로, 심리학 연구들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마음의 우상'이라 부른 이 편향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가설을 끊임없이 반박하려 노력해야 하며, 20세기의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이를 “대담한 가설과 정교하고 엄격한 반증의 시도”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로세토에서 노스다코타까지 이어진 초창기 연구들이 외면되거나 무시된 것을 보면, 식이-심장병 가설의 역사 속에서 ‘선택적 편향’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런 연구들 중 상당수는 결국 잊히거나, 그 결과가 왜곡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들은 비교적 작고 초기의 것들이지만, 이후 무시되거나 의도적으로 오해된 연구들은 영양학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야심 찬 실험들이었다.

 

대안 이론과 반대 의견

선택적 편향(selection bias)의 특징 중 하나는, 심지어 이를 인지하고 주의해야 하는 과학자들조차도 자신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식이-심장병 가설이 형성되던 시기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영향을 받았던 원인 중 비교적 순진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앤셀 키스는 자신의 편향을 경계하지 않았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고, 칼 포퍼가 조언했듯이 자신의 가설을 반박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의 우상(idol of the mind)’을 주저 없이 밀어붙였으며, 그 가설은 미국 전체 국민에게 적용되고 널리 알려져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는 건강상 이익이 너무나도 커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 섭취를 줄일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거의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을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피트 아렌스(Pete Ahrens)였다. 아렌스는 처음부터 키스의 주장—총 지방에서 시작해 포화지방으로 이어지는—이 확실하지 않으며, 심장병의 원인에 대한 대안적 설명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1957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마치 사실인 양 열렬히 주장될 때, 우리는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성찰할 시점임을 인식해야 한다.”

아렌스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전혀 다른 방향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곡물, 밀가루, 설탕 등 탄수화물이 비만과 질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지방을 줄이면 사람들이 이 탄수화물을 더 많이 섭취하게 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당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에만 집착할 때, 아렌스는 중성지방(triglyceride)에 주목했다. 그는 실리카산 크로마토그래피(silic acid chromatography)라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혈액에서 중성지방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척했다. 그는 1951년부터 1964년까지 액체 형태의 식사를 통제한 실험을 반복적으로 수행했고, 탄수화물이 지방을 대체하면 중성지방 수치가 급격히 상승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달걀과 베이컨 대신 시리얼로 아침을 먹는 것이 그러한 변화를 유도한다.)

그는 예일대학의 젊은 의사 마거릿 알브링크(Margaret Albrink)와 함께, 심장병 환자와 건강한 공장 근로자의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비교했다. 결과적으로 심장병 환자들 사이에서는 높은 콜레스테롤보다 높은 중성지방 수치가 훨씬 더 흔했으며, 두 연구자는 심장병의 더 나은 지표는 중성지방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가설은 당시 대세는 아니었지만, 이후 10여 년 동안 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아렌스는 실험관에 담긴 혼탁한 흰색 혈액 샘플을 청중에게 보여주면서, 그것이 고탄수화물 식단을 섭취한 사람의 혈액이라는 사실을 밝혀 청중을 놀라게 했다. 반면 선명한 투명 혈장은 고지방 식단을 섭취한 사람의 것이었다.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 반대 결과도 있었지만, 아렌스는 이를 드문 유전 질환의 사례로 보았다. 그는 “이 현상은 고탄수화물 식단을 섭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정상적인 화학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아렌스는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거나 전체 칼로리를 제한하면 혈액이 맑아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전후 일본의 시골 빈곤층이 쌀을 많이 먹었음에도 중성지방 수치가 낮았던 이유를 ‘총 열량 부족’에 있다고 보았다.

당시 당뇨병 환자에게서도 높은 중성지방 수치가 흔히 발견되었고, 이들이 심장병 고위험군이라는 점에서 알브링크는 이 두 질환의 공통 원인을 ‘과체중’이라고 가정했다. 즉, 사람들을 살찌게 만든 원인이 중성지방을 증가시키고, 그로 인해 심장병과 당뇨병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원인으로 탄수화물을 지목했다. 이는 오늘날 점점 많은 연구 결과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아렌스와 알브링크가 처음 이 주장을 제기했던 1960년대 초에는 대단히 새로운 발상이었다.

이러한 가설이 함의하는 바는, 키스가 제시한 방향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아렌스 모델에 따르면 심장병의 원인은 지방이 아니라 탄수화물이다. 저지방 식단은 필연적으로 고탄수화물 식단이 되기 때문에(육류와 유제품을 줄이면 대체로 곡물과 채소를 더 먹게 됨), 두 가설은 서로 양립할 수 없었다.

아렌스는 미국 대중에게 권장되고 있는 저지방 식단이 오히려 중성지방 수치를 높이고, 그로 인해 비만과 만성 질환 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하지만 영양학계의 ‘카산드라’였던 그는 끝내 대세를 바꾸는 데 실패했다. 그는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는 과학자였고, 많은 영향력 있는 이들이 그의 조언에 귀 기울였지만, 아마도 충분히 공격적이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반면 키스와 그의 핵심 동료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지지하고 퍼뜨리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들은 또 다른 전략을 사용했다. 바로 반대자들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영양과학의 피의 스포츠’를 실천했다. 그들이 이런 방식을 창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전략의 가장 효과적인 실천자였던 것은 분명했다.

 

영양학계의 날카로운 충돌

2009년, 예리마이아 스탬플러(Jeremiah Stamler)를 만났을 때, 나는 영양학이라는 분야가 정치적 전쟁터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89세였지만 놀랄 만큼 정정했다. 그는 시카고 노스웨스턴 대학의 심장병 전문의였고, 1950년대 후반부터 앤셀 키스(Ancel Keys)의 중요한 동료로 활동해 왔다. 나는 식이-심장병 가설을 확립하는 데 사용된 주요 연구들에 대해 질문했는데, 스탬플러는 이들 대부분의 연구를 주도한 인물일 뿐 아니라, 미국심장협회(AHA)와 국립보건원(NIH)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연구적 기여는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대화 도중 얼마나 자연스럽게 반대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는가이다. 이는 당시 영양과학이 얼마나 치열한 대결의 장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말이야, 피트 아렌스(Pete Ahrens) 얘기를 해보자고,” 그는 자청해서 말했다. “피트 아렌스! 그는 늘 모든 일에 걸림돌이었어! 나랑 아주 격렬한 토론을 했었지.”

스탬플러는 아렌스를 흉내 내며 조롱하듯 말했다. “‘아니, 우리 아직 연구 중입니다. 5년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균형 잡힌 연구를 해야 합니다. 아직 모릅니다.’ 이런 식이지.” 이에 반해 스탬플러와 키스는 보다 긴급하게 대중 보건을 위한 식이 권고를 추진하고자 했다. 이들은 당시 영양학계의 중심 논쟁을 대표하는 한 축이었다. 즉, 역학 연구에서 발견된 상관관계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식이 권고의 근거로 충분한가 하는 문제였다. 키스와 스탬플러는 그 근거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물론 이들도 그 증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인 선택의 문제 속에서 역학적 데이터는 충분히 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규모 임상시험의 결과를 기다리자면 십 년이 걸릴 수도 있고, 그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심장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아렌스가 보인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는 스탬플러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피트는 항상 성명을 반대했지. 내가 ‘피트, 당신 말은 지금 미국인의 식단이 건강에 가장 이상적이라는 뜻이잖아’라고 하면, 그는 ‘아니! 아니!’ 하며 부정했지. ‘그럼 논리를 따져보자고!’ 뭐 어쨌든, 이제 그는 세상을 떠났으니.” 스탬플러의 말을 듣는 동안, 마치 그가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리고 유드킨(Yudkin) 말이야!” 스탬플러는 거의 고함을 치듯 말했다. 그는 설탕을 심장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던 영국의 의사였다. “내가 그 사람을 무너뜨린 팀에 있었지!” 그리고 식이-심장병 가설의 또 다른 비판자였던 영국 심장병 전문의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에 대해서는, 스탬플러는 반복해서 “사기꾼”이라고 표현했다.

스탬플러처럼, 키스 역시 반론의 여지를 거의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에게 보인 반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1973년 미국임상영양학회지(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에 실린 텍사스 A&M 대학 레이먼드 라이저(Raymond Reiser) 교수의 포화지방 가설에 대한 매우 철저하고 정교한 비판에 대해, 키스는 무려 24쪽에 달하는 반박문을 작성하며 이렇게 시작했다. “라이저의 분석은 마치 지방축제의 유머관에 있는 왜곡된 거울을 연상시킨다.”

키스는 줄곧 조롱조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건 전형적인 왜곡이다”, “16단어 문장에 이 정도로 부정확함을 담기는 어렵다”, “라이저는 거만하게 말한다…”, “그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라이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라이저는 식이-심장병 가설의 기초가 된 주요 연구들을 재검토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론적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특히 고기에서 주로 발견되는 스테아르산(stearic acid)과 같은 포화지방산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키스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박하면서, 스테아르산은 “중립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다른 종류의 포화지방이 콜레스테롤을 높인다는 기존 주장을 고수했다. 라이저는 짧은 반론문을 학술지에 기고했는데, “나는 내가 리뷰한 과학자들을 중상하려 했고,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는 비난에 대한 반론은 반드시 해야 할 것 같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과학은 복잡하기에 항상 논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키스와 스탬플러가 택한 공격적인 스타일은 분명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둘의 공세를 당해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식이-심장병 가설이 점점 더 많은 추종자와 제도적 권위를 얻어감에 따라, 반론을 제기하려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조지 V. 맨(George V. Mann)

피트 아렌스(Pete Ahrens)와 레이먼드 라이저(Raymond Reiser)와 함께, 식이-심장병 가설에 공개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몇 안 되는 저명한 과학자 중 한 명은 밴더빌트 대학의 생화학자 조지 맨(George V. Mann)이었다. 그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마사이족(Masai)의 식생활과 건강을 연구했다. 맨은 초기 경력에서 몇 차례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1955년에는 트랜스지방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최초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고, 동맥경화증의 원인으로 단순한 막힘이 아니라 플라크(plaque, 동맥 벽의 지방 침착물)의 갑작스러운 박리가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맨은 고기, 피, 우유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즉 마사이족—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총콜레스테롤 수치를 가지고 있으며, 심장병이나 기타 만성질환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이러한 발견은 식이-심장병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기에, 영양학계는 이를 반증하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의 여러 대학은 공동으로 과학자 팀을 꾸려 케냐로 보내 맨의 데이터를 검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결국, 그의 결과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한 해명을 찾기 위해, 일부 연구자들은 마사이족이 수천 년에 걸쳐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는 특이한 유전자를 진화적으로 획득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나이로비로 이주한 마사이족 집단이 발견되며 곧 무너졌다. 도시로 이주한 마사이족의 콜레스테롤 수치는 시골에 사는 동족보다 25%가량 높았고, 이는 그들의 생활환경이 콜레스테롤 수치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했다. 유전적 요인보다는 환경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키스는 맨의 연구를 주변부로 밀어내려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원시 유목민들의 특이성은 다른 인구 집단에서의 심장병 이해에 전혀 관련이 없다.” 키스 자신은 『일곱 나라 연구(Seven Countries Study)』에서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을 비교하여 식이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찾고자 했지만, 이후에 그는 이러한 비교가 대부분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유럽인이 미국인을 비교하기에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키스는 북극의 이누이트족(Inuit)에 대한 관찰 역시 같은 방식으로 깎아내렸다. 조지 맨과 마찬가지로, 빌야무르 스테판손(Vilhjalmur Stefansson) 역시 고지방 식단과 건강한 삶이 공존할 수 있음을 직접 경험한 인물이었다. 이누이트족의 식단은 최소 50% 이상이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테판손은 1929년 1년간 고기와 지방만 먹는 식이 실험을 수행했고, 낙관적으로는 이러한 결과가 고지방 식단의 길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실각했다. “그 실각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보인 먹구름은 손바닥만 한 것이었고, 그건 바로 앤셀 키스 박사로부터 받은 짧고 개인적인 편지 한 통에 불과했다.” 키스는 1954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후 그는 스테판손의 연구를 공공연히 경시하기 시작했다.

키스는 스테판손의 연구를 맨의 사례처럼 ‘이국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누이트의 괴이한 삶의 방식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지방을 배불리 먹는다는 대중적 이미지를 기반으로, 이 사례가 식이-지방-심장병 가설에 반하는 예외로 작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반박이 이뤄졌다. 바로 ‘칭찬을 가장한 무시’다. 키스의 지지자였던 하버드 공중보건대학 영양학과장 프레드릭 스테어(Fredrick J. Stare)는 스테판손과 친구였고, 그의 이누이트 관련 책 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테판손 연구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가볍게 취급하며 독자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농담조로 물었다. “고기 위주 식단이 건강에 좋을까, 나쁠까? 당연히 우리가 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다면, 곧 ‘고급 부위’는 모자라게 될 것이다.”

이러한 농담 섞인 말투로 과학적 본질에 접근하지 않은 채, 스테어는 해당 책을 “재미있는 책”이라며 독자에게 권하는 말로 서문을 마무리했다. 스테판손은 196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이디어는 이후 영양학계의 주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프레이밍햄 연구

조지 맨(George Mann)은 1960년대 초반 심장병 연구 분야에 발을 들이며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사이족에 대한 연구로 논란에 휘말리기 전,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심장병 연구 중 하나인 **프레이밍햄 심장 연구(Framingham Heart Study)**의 부책임자였다. 프레이밍햄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1948년부터 심장병 연구의 일종의 ‘페트리 접시’로 기능해 왔다. 현재 3세대 연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처음에 약 5,000명의 중년 남녀를 대상으로 시작되었고, 참가자들은 심장병 발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조사받았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신체검사, 면담, 추적 검사를 2년마다 받았고, 이는 심장병의 위험요소를 장기적으로 추적한 최초의 대규모 연구였다.

1961년, 연구가 시작된 지 6년 만에 프레이밍햄 연구팀은 첫 번째 주요 발견을 발표했다.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심장병의 신뢰할 수 있는 예측지표라는 것이었다. 이 결과는 당시까지 콜레스테롤이 나쁘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었지만, 뒷받침할 확고한 증거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결정적 발견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발견은 심장병 연구의 핵심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연구자들은 질병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죽음"이라는 결과를 연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데이터로서 가장 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하드 엔드포인트(hard endpoint)”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험 참가자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사망 이전에 측정할 수 있는 **“중간지표(soft endpoint)”**를 찾으려 했고, 총콜레스테롤 수치는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즉, 특정 음식이 총콜레스테롤을 올린다면, 이는 심장마비 위험도 높인다는 결론을 보다 빨리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식이-심장병 가설(diet-heart hypothesis)**의 정당성을 대폭 강화해주었다. 당시 연구 책임자였던 윌리엄 캐넬(William Kannel)은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관상동맥 경화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30년 후, 더 많은 사망 데이터가 누적된 프레이밍햄 후속연구에서는 이 믿음에 큰 균열이 생겼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205~264 mg/dL 사이인 남녀의 경우, 심장병 위험과의 관련성이 없었다. 심지어 심장마비를 경험한 사람들 중 절반은 정상치로 간주되던 220 mg/dL 이하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48~57세 남성의 경우, 콜레스테롤 수치가 **중간 범위(183–222 mg/dL)**인 사람이 **더 높은 수치(222–261 mg/dL)**를 가진 사람보다 오히려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더 컸다는 점이다.
결국, 총콜레스테롤은 심장병의 신뢰할 수 있는 예측 지표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프레이밍햄 팀은 수십 년 동안 총콜레스테롤을 최고의 위험지표로 홍보해왔기 때문에, 1980년대 후반 이와 같은 약한 데이터를 공개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대신, 그들은 대화를 **HDL과 LDL 같은 콜레스테롤 아형(subfractions)**으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더 나은 예측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훗날 부분적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프레이밍햄 데이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30년 추적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문장이 담겨 있었다.

“콜레스테롤이 1mg/dL씩 감소할 때마다 관상동맥 및 전체 사망률이 11% 증가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공식 입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어떤 과학적 리뷰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다른 대규모 연구들 역시 유사한 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이 외에도 프레이밍햄에서 나온 여러 중요한 결과들은 무시되었는데, 특히 식이요인에 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조지 맨은 영양사와 함께 1,000명의 참가자로부터 2년에 걸쳐 식이 정보를 수집했고, 1960년 최종 결과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포화지방 섭취와 심장병 발생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보고서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관상동맥 심장병과 식이의 관련성에 대해 아무런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맨은 이렇게 말했다.

“이 결과는 국립보건원(NIH) 고위 관계자들이 원하는 내용과 반대였기에, 완전히 외면당했다.”
그는 NIH가 이 데이터를 발표하지 못하게 했으며, 해당 결과는 거의 10년 동안 NIH 지하에 묻혀 있었다고 말했다.
“과학적 데이터를 고의로 숨기는 것은 일종의 부정행위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비록 1968년에 이 데이터가 결국 발표되긴 했지만, 너무나 깊숙이 묻혀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이 내용을 찾으려면 28권에 이르는 보고서를 뒤져야만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명확했다.

혈청 콜레스테롤 수치의 변화는 섭취한 지방의 양이나 종류와는 관련이 없었다.

사실상 1992년에 이르러서야 프레이밍햄 연구 책임자 중 한 사람이 식이 지방에 관한 연구 결과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프레이밍햄의 책임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P. 카스텔리(William P. Castelli)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사추세츠주 프레이밍햄에서는 포화지방을 많이 섭취할수록 혈청 콜레스테롤 수치는 더 낮았으며, 체중도 더 적게 나갔다.”

이 발언은 정식 논문이 아닌, 대부분의 의사들이 읽지 않는 학술지의 사설(editorial)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카스텔리는 이 결과를 명확하게 믿지 못했던 듯하며, 인터뷰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식이 데이터 수집의 부정확성 때문일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 데이터를 수집한 조지 맨의 조사 방식은 당시 기준에서 매우 꼼꼼하고 체계적이었기에, 카스텔리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콜레스테롤 논쟁에서 비주류에 서 있었다는 사실은 조지 맨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는 1970년대 말 은퇴를 앞두며 논문 곳곳에 고통스러운 심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7년에 발표한 한 논문은 다음 문장으로 시작된다.

“식이-심장병 가설에 대한 한 세대의 연구는 혼란 속에 끝났다.”

그는 이 가설을 “잘못된 방향의, 그리고 무의미한 집착”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가 90세였을 때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한 적이 있다. (그는 2012년에 사망했다.) 기억력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키스의 이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겪은 불이익에 대해서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경력에 꽤 큰 타격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고, 자신이 식이-심장병 가설에 반대 의사를 밝힌 이후로는 AHA의 주요 저널인 『Circulation』 등에도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니하(NIH)에서 자신의 오랜 연구 보조금이 취소된 것도 키스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연구 심사위원회에서 일하던 여성이 나에게 잠깐 복도로 나와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키스에게 반대하는 바람에 연구 보조금이 끊길 거예요.’ 그리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지.”

어떻게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이렇게까지 학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맨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이 이해해야 할 점은, 키스가 얼마나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인물이었는지다. 그는 당신에게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면, 당신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식이-심장병 가설이 지배적 이론으로 자리잡다

조지 맨이 AHA(미국심장협회)와 NIH(미국국립보건원)로부터 소외된 이야기는, 식이-심장병 가설이 어떻게 영양학계의 **정설(dogma)**로 굳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더 큰 현실을 드러낸다. 앤설 키스(Ancel Keys)는 확실히 식이-심장병 가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창자였지만, 단지 몇몇 남성 과학자들의 과학적 ‘깡패짓’만으로 전 세계의 지적이고 객관적인 학계 전체를 휘어잡았다고 보는 건 순진한 해석일 것이다.

실제로는, 이 가설이 AHA와 NIH에 의해 채택된 이후, 키스의 편향은 곧 제도화되었다. 이 두 기관은 심혈관 질환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고 대부분의 연구비를 통제했으며, 조지 맨처럼 고립되길 원하지 않았던 과학자들은 그들 기관의 방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AHA와 NIH는 애초부터 서로 얽히고 맞물린 관계였다. 1948년 AHA가 전국적인 자원봉사 조직으로 출범할 당시, 첫 과제 중 하나가 워싱턴 D.C.에 심장질환 로비 조직을 만드는 일이었고, 이 로비를 통해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국립심장연구소(NHI)**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이 기관은 **국립심장·폐·혈액연구소(NHLBI)**로 확대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 두 기관은 설립 초기부터 손발을 맞추며 움직였다. 1950년엔 공동으로 심장병에 대한 첫 국가 회의를 열었고, 1959년엔 “심혈관 질환과의 10년의 싸움”이라는 제목으로 공동 성과 보고를 발표했으며, 1964년에도 워싱턴에서 두 번째 국가 회의를 개최했다. 1965년에는 AHA 회장이 의회와 협력해 **지역의료프로그램(RMP)**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미국 전역의 심혈관 치료 표준을 설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78년, 두 기관은 나란히 30주년을 공동 기념했다. 그동안 NHLBI와 AHA는 수많은 공동 보고서를 발표하고, 공동 회의와 태스크포스를 운영했다. 여기에 상위 심장학 학회들의 활동이 더해지며, 이들 기관이 기록한 내용은 곧 심장병 연구의 공식 역사가 되었다. 다시 말해, 1950년대 이후 이들 기관이 주최하지 않은 연구나 회의는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도 못했다.

이 모든 영향력의 중심에는 소수의 핵심 전문가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소위 **“영양 귀족층(nutrition aristocrats)”**이라 불렸는데, 이 용어는 1989년 『콜레스테롤 가설』을 비판적으로 다룬 언론인 토머스 J. 무어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동부의 의과대학, 대학병원, 연구기관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시카고, 이후엔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의 전문가들도 합류했다. 이 거의 모두 남성으로 구성된 집단은 AHA 및 NHLBI와 밀접하게 협력했다.

이들은 주요 공식 위원회와 자문 패널에 임명되었고, 영향력 있는 논문을 공동 저술했으며, 주요 학술지의 편집위원을 맡고, 서로의 논문을 상호 심사하고, 학회를 장악했다. 여기서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다.

예컨대 AHA의 창립자 폴 더들리 화이트는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NHI의 첫 자문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AHA-NHI 공동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는 공동 교육 및 커뮤니티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이후 그 자리를 앤설 키스에게 넘겼다. AHA의 전임 회장들은 NIH 자문위원회에서 거의 예외 없이 활동했으며, 이들 중 다수가 국제심장학회를 설립했고, 키스와 함께 그 연구위원회를 공동 운영했다.

1961년에는 AHA와 NHI가 공동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식이-심장병 가설 검증 실험인 ‘국가 식이심장 연구’**를 기획하기 시작했고, 이 연구의 집행 위원회에는 키스와 스탬러를 포함해 당대 최고의 영양 과학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AHA와 NHLBI는 미국 내 모든 심혈관 질환 관련 연구 보조금의 대부분을 관리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NHLBI의 연간 예산이 15억 달러에 달했고, AHA는 연간 1억 달러를 연구에 투입했다. 사실상 이 두 자금원이 전체 분야를 지배했다. 식품회사나 제약회사의 후원도 있었지만, 이해 상충을 우려한 연구자들은 이를 기피했다. 조지 맨은 1991년, 대체 견해를 가진 학자들과 소규모 회의를 열며 이렇게 말했다.

“연방 정부로부터 연구 자금을 받을 수 없고, 식품업계로부터는 이해관계자로 오해받기 때문에 후원을 받을 수 없다. 따라서 회의를 여는 일조차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AHA와 NIH가 식이-심장병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쓸수록, 이들 기관이 노선을 바꾸거나 다른 아이디어를 수용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 가설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자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것을 축소하거나 왜곡해야만 했다. 이 가설은 기관의 신뢰와 정체성의 문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 목소리는 점점 사라졌다. 『미국의학협회저널(JAMA)』는 1967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콜레스테롤에 집착한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많아 부끄러울 지경이며, 이로 인해 심장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다른 생화학적 경로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후에도 아렌스, 맨, 그리고 소수의 학자들은 학술지에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조지 맨은 1978년 그의 경력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심장 마피아가 이 정설을 지지하며 연구비를 독점해왔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심장병 연구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정치였다.”

 

 

 

I.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AHA를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AHA의 연례 ‘올해의 심장인 상(Heart of the Year Award)’을 직접 수여했고, 백악관에서 ‘심장 기금 모금 캠페인’ 개막식을 열었으며, AHA 이사회 회의에 참석하고, AHA의 ‘미래 명예 회장(Honorary Chairman of the Future)’ 직함도 맡았다. 그의 내각 구성원들 역시 AHA 이사회에서 활동했다. AHA의 공식 사가는 이렇게 정리했다. “미국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이 모두 적극적인 AHA 심장 캠페인의 활동가였다”(Moore 1983, 85).


II. 당시 심장병의 원인으로 주류 과학자들이 심각하게 고려했던 다른 이론들도 존재했다.
비타민 B6 결핍, 비만, 운동 부족, 고혈압, 그리고 신경 긴장 등이 그 예이다(Mann 1959, 922).


III. 과거 식이 습관을 환자에게 소급해 물어보는 조사를 ‘환자-대조군(case-control)’ 연구라고 한다.
이 방식은 ‘회상 편향(recall bias)’의 위험이 따른다. 환자들이 과거의 식습관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심장병 환자의 경우, 진단 이후 의사로부터 포화지방(그리고 아마도 총 지방)을 줄이라는 권고를 받게 되고, 따라서 응답자들이 마치 이미 지시에 따라 식단을 바꾼 것처럼 기억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1960년대 이후 미국인 전체가 저지방 식단을 권고받아왔기 때문에, 대조군 역시 같은 방향으로 편향될 수 있다. 그러나 주켈(Zukel)의 1950년대 연구는 이런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당시에는 심장병 환자에게 저지방 식단을 권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IV. 키스는 이 점에서 위선적이었다.
그의 ‘7개국 연구(Seven Countries Study)’ 역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식생활 패턴이 극적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했기 때문이다.


V.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글이 1897년에 있었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회장이자 저명한 지질학자였던 T.C. 체임벌린은 이렇게 썼다. “당신이 어떤 생각에 애착을 가지는 순간, ‘지적 자식’이 생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에 기꺼이 머물게 되고, 반대되는 증거에는 자연스러운 냉소를 느낀다”(Chamberlin [1897] 1965).


VI. 스테판손(Stefansson)은 자신이 뉴햄프셔주 하노버에서 지방을 원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 지방이 정육점에서 버려지던 부산물로 무료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큰 이점이었다고 회고했다.
다른 고객들은 이 지방을 개에게 줄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Stefansson 1956, xxxi).


VII. 『내과학 기록지(Archives of Internal Medicine)』는 신뢰받는 학술지이지만, 프레이밍햄 연구 책임자였던 캐스텔리(Castelli)는 사실상 어디에든 논문을 게재할 수 있는 위치였다.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처럼 더 많은 의사들이 읽는 학술지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VIII. 무어(Thomas J. Moore)의 최초 보도는 1989년 『애틀랜틱』지의 커버스토리로 실렸고, 그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호가 되었다.
그는 그해에 해당 주제로 책도 출간했다. 같은 해, 무어의 보도로 인해 미국 의회는 NIH가 수백만 명의 미국인에게 콜레스테롤 저하제를 불필요하게 복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로 청문회를 열게 되었다(Moore, “The Cholesterol Myth,” 1989; Moore, Heart Failure, 1989; Associated Press 보도, 1989).


IX. 현재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1970~80년대에 전문가 패널에 참여했던 피트 아렌스(Pete Ahrens)나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 같은 회의적인 인사들은 이제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이 은퇴한 이후, 영양학계의 엘리트 중 어느 누구도 식이-심장병 가설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을 발표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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