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 콘비프: 요리 문화사
Irish Corned Beef: A Culinary History
초록
이 논문은 요리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모든 요리 관련 종사자들에게 가치를 제공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특히 아일랜드 요리와 문화 속 콘비프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수세기 동안 소가 삶의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원래는 육류보다는 젖소로서의 가치가 더 중시되었다.
그러나 근세 초기, 게일족 영주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소가 경제적 상품으로 전환되었고, 영국으로의 소 수출이 활성화되었다.
1663년과 1667년에 제정된 **Cattle Acts(소 수출 금지법)**으로 인해 살아있는 소의 수출이 제한되었고, 이를 계기로 코크(Cork) 지역을 중심으로 소금에 절인 아일랜드 쇠고기(콘비프) 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산 콘비프는 이후 200년 넘게 영국 해군 함대를 위한 식량으로 공급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도 대량 수출되었다.
이 논문은 콘비프 산업의 성장과,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콘비프와 양배추 요리를 대중화한 과정을 설명한다.
또한, 아일랜드 내에서 콘비프가 축제용 음식으로 소비된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 아일랜드에서의 육류 소비 패턴 변화, 그리고 남미산 통조림 ‘불리비프(bully beef)’의 유입으로 전통 아일랜드 콘비프가 위축된 현상도 다룬다.
마지막으로 전쟁이 식습관 변화와 식품 혁신 가속화에 미친 영향도 논의하고 있다.
주요어:
콘비프(Corned Beef), 아일랜드(Ireland), 아일랜드 요리(Irish Cuisine), 케그(Keg), 소금에 절인 쇠고기(Salt Beef), 노예식(Slave Food), 요리 역사(Culinary History), 이민(Immigration)
서론
지난 30년간 요리 역사와 미식학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Messer 외, 2000).
박사 수준의 요리 역사 연구도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며(Barlösius, 1988; Spang, 1993; Trubek, 1995; Mac Con Iomaire, 2009; O'Gorman, 2010),
2005년 창간된 『Journal of Culinary Science and Technology』 제4권 1호의 창간사에서도 편집진은 다양한 학문 분야 중 요리 역사 연구가 주요 기여 분야임을 명시했다.
특정 식재료나 원재료에 대한 연구는 그 식품이 시간에 따라 과학, 정치, 사회, 경제적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밝혀낼 수 있다.
대표적인 연구로는 Mintz(1986)의 설탕 연구, Coe(2003)의 초콜릿, Montgomery(2003)의 연어, Turner(2005)의 향신료, Albala(2007)의 콩, Reader(2008)의 감자, Kurlansky(1997, 2002, 2007)의 대구, 소금, 굴 연구 등이 있다.
또한 **McGee(1992, 2004)**는 식품 과학, 전통, 역사, 문화를 통합한 요리 과학 분야의 대표적 연구를 제시했다.
본 논문은 요리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소비자, 식품 기술자, 연구 셰프, 식품 서비스 기업가, 요리 예술 교육자, 요리 학도, 요리 과학자 등 다양한 식품 관련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실질적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제안한다.
오늘날 많은 식품과 상품(예: 파르마 햄, 스틸턴 치즈, 타바스코 소스)이 자신들의 역사성과 전통을 마케팅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유서 깊은 품종의 과일·채소, 희귀 품종의 육류가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요리 역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경쟁 우위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아일랜드 콘비프의 역사라는 주제를 통해 과거로의 통찰을 제공하고자 한다.
콘비프와 양배추: 최고의 아일랜드 요리?
미국에서는 매년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3월 17일)**가 되면 콘비프와 양배추 요리가 대량으로 소비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 요리를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Allen(2010)이 지적했듯이 **“아일랜드 사람들이 오직 콘비프, 감자, 양배추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님을 수없이 설명해야 했다”**는 말처럼,
현대 아일랜드에서는 콘비프와 양배추가 흔히 먹는 음식이 아니다.
많은 보고에 따르면,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미국에 정착한 뒤 원래 즐겨 먹던 베이컨과 양배추 대신 콘비프와 양배추로 대체했다.
당시 이민자들이 주로 살던 지역의 유대인 정육점에서 공급된 콘비프를 사용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지만,
모든 연구자들이 이 단순한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Andrews, 2010).
본 논문은 아일랜드 요리 속 콘비프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이 요리가 어떻게 미국에서 아일랜드 요리를 대표하게 되었는지를 고찰한다.
‘콘비프’라는 명칭은 17세기 영국에서 유래했다.
당시 **고기를 염장할 때 사용된 소금 알갱이(corns)**에서 유래한 것으로,
소금 결정으로 고기를 절이는 방식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콘비프는 아일랜드 내에서 널리 소비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 동안 주요 수출 식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코크(Cork) 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생산되어 영국 해군 함대의 주요 식량으로 약 200년 동안 공급되었고,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로도 대량 수출되었다.
또한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와 기타 프랑스 식민지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주식으로 공급되었으며,
영국 해군이 방문했던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도 콘비프가 주요 식량으로 자리 잡았다.
이 지역에서는 콘비프를 **‘keg’**라 불렀고, 이후 섬 주민들이 직접 고기를 절여 만들었지만, 영국 선원들은 이를 **‘salt junk’**라 불렀다.
통조림 콘비프와 전쟁
Kurlansky(2002:125)는 콘비프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영국이 태평양 섬 주민들보다 더 그 명성을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영국이 남미에서 콘비프를 통조림으로 가공해 판매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일랜드는 여전히 콘비프를 잘 만들어왔으며, 크리스마스, 부활절,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라는 대표적인 명절에 양배추와 함께 축제 음식으로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Larousse Gastronomique』에서는 콘비프를 **“미국에서 유래되어 통조림으로 판매되는 절인 쇠고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니콜라 프랑수아 아페르(Nicolas François Appert, 1750-1841)**는 과일, 육류, 채소를 유리병에 안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을 발견해 현대 통조림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다(Laudan, 2006:25).
이후 통조림 산업의 발전은 유럽으로의 해외 식품 수입 증가를 촉진했다(Péhaut, 1999:463).
20세기에는 하인즈(Heinz), 크로스 앤 블랙웰(Crosse & Blackwell) 등 기업들이 다양한 통조림 식품을 선보이며 시장을 확대했다(Burnett, 1994:261).
처음에는 식중독 사건으로 통조림 식품에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세계 대전 당시 군인들의 경험이 통조림 식품의 대중화를 이끌었다(Spencer, 2004:305).
특히 통조림 완두콩과 콘비프가 대표적이었다.
요리 역사와 과학·기술사의 공통 주제 중 하나는 전쟁이 식습관 변화와 식품 혁신을 가속했다는 점이다.
Mintz(1996:25)는 전쟁이 아마도 식생활 변화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Davidson(2006)은 **현대 통조림 콘비프의 상당 부분이 우루과이 프라이 벤토스(Fray Bentos)**라는 강변 도시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한다.
이곳은 1866년 Justus von Liebig가 육즙 추출물(Oxo) 생산 공장을 세운 곳이다.
1924년 프라이 벤토스 공장은 영국에 인수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3년에는 약 1,600만 개의 콘비프 통조림이 이곳에서 수출되었다.
이 도시 스스로를 **‘세계의 부엌’**이라 불렀다.
이후 냉전과 우주 개발 경쟁 속에서 Pillsbury와 NASA는 식품 안전 시스템(HACCP)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최근 아일랜드에는 **유럽의 구 식민지에서 수입된 통조림 콘비프(불리비프, bully beef)**가 들어왔으며, 대부분 샌드위치나 샐러드 재료로 소비되었다.
오늘날에도 소 사육은 아일랜드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09년 기준, 아일랜드는 약 46만 톤의 쇠고기(내장 제외)를 수출했으며, 그 중 절반 이상이 영국으로 수출, 나머지는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으로 공급되었다(Bord Bia, 2009).
그러나 본 논문의 핵심은 통조림이 아닌, **아일랜드 전통 방식으로 절인 신선한 쇠고기 부위(주로 양지머리, 실버사이드, 탑사이드)**에 있다.
초기의 시작
수세기 동안 소는 아일랜드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아일랜드의 습윤하고 온화한 기후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푸른 목초지는 소 사육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과학자들은 케리주(County Kerry)의 한 고고학 발굴지에서 발견된 소의 뼈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한 결과, 기원전 4,500년으로 추정했다.
이는 아일랜드인들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우유를 식품으로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참고로 인간이 젖소의 우유를 소화하는 데 필요한 효소를 획득하고 소비하기 시작한 시기는 근동 지역에서 약 기원전 5,000~7,000년으로 추정된다(Murphy, 2010).
이 시기의 소는 농경지 경작용 쟁기 끌기나 운송용 동물로도 사용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노동력을 상실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도축하여 고기를 소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명
아일랜드인들의 소에 대한 집착은 아일랜드 지명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일랜드어에서 ‘bó’는 암소, ‘tarbh’는 황소를 의미한다.
‘bóthar’라는 단어는 **도로(road)**를 뜻하며, 도로의 폭은 한 마리 소의 길이와 너비로 정의되었다.
또한 ‘buachail’(소년을 뜻함)은 **‘bua’(소)와 ‘chaill’(보호자)**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소 치는 사람, 목동(cowboy, herdsman)**을 의미했다.
아일랜드의 지명 중 소와 관련된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Ardboe, Drumbo, Lough Bo, Drumshambo, Inishbofin, Clontarf, Boyne 강 등이 있다.
특히 Boyne 강은 **Bóinne, Boann, Bovinda(흰 소의 여신)**라는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1690년 ‘보인 강 전투(Battle of the Boyne)’**에서 **개신교 군주 윌리엄 오브 오렌지(William of Orange)**가 **가톨릭 국왕 제임스 2세(James II)**를 물리친 역사적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County Mayo의 Westport의 아일랜드어 이름은 ‘Cathair na Mart’**로, **‘쇠고기의 도시(The city of the beef)’**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 약탈
게일족 아일랜드 사회에서 소는 부의 척도였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신화 속에는 유명한 소 약탈 이야기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지만,
Sexton(1998:27)에 따르면 이는 서기 500~1200년 초기 중세 아일랜드에서 쇠고기 소비를 억제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Mahon(1998:3)은 소 약탈이 단순한 전쟁 행위라기보다는 다른 부족의 영토로 들어가 젊은 전사가 자신의 용기를 시험하는 통과의례였다고 설명한다.
또한 Mahon은 왕자나 부족장이 즉위할 때 거행하는 의식의 일환이었다고 강조하며, 『얼스터 연대기(Annals of Ulster)』에는 무려 402회나 언급되어 있다고 밝혔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소 약탈 이야기는 **『Táin Bó Cuailnge (쿨리의 소 약탈)』**이다.
이 이야기에서 **코나트(Connacht)의 여왕 메이브(Queen Meadhbh)**는 자신의 남편보다 더 많은 부를 갖기 위해 **귀중한 쿨리의 갈색 황소(Brown Bull of Cooley)**를 차지하고자 얼스터(울스터) 남성들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설적인 서사는 **아일랜드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인 『Lebor na hUidre (던 카우의 서, The Book of the Dun Cow)』**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책은 11세기 필사본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책의 양피지는 클론맥노이즈(Clonmacnoise)의 성 키아란(St Ciaran)의 애완소 가죽으로 제작되어 ‘던 카우의 서’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한 소는 지불 수단이자 교환의 가치로도 사용되었으며, **7~8세기 브레혼 법전(Brehon Laws)**에서도 그러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쇠고기 소비는 주로 귀족 계층의 특권으로 인식되었다(Sexton, 1998:26).
육류 염장 처리의 초기 증거
Kelly(2000:336, 341)에 따르면, 고대 문헌에서 소금에 절인 쇠고기(bósall)에 대한 언급은 매우 드물다.
이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염장하려면 상당한 양의 소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Kelly는 노르만 이전의 문헌에서 소금 광산이나 염전(salt pans)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일랜드에서는 **해초를 태워 얻은 ‘해재(海灰, sea ash)’**로 소금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Críth Gablach』**에서는 고기 덩어리를 절이는 데 sea ash 사용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12세기 시 『Aislinge Meic Con Glinne』**에서는 소금에 절인 쇠고기와 베이컨이 언급된다(Jackson, 1990).
즙 많은 베이컨의 아들,
그것이 나의 이름.
달콤한 버터롤,
내 가방을 지고 있는 자의 이름.
양다리,
나의 개의 이름,
우아하게 도약하는.
라드, 나의 아내,
케일 위로 다정하게 미소 짓고,
커드 치즈, 나의 딸,
꼬챙이를 따라 빙빙 돌며,
그 명성은 빛난다.
콘비프, 나의 아들,
크고 둥근 꼬리를 가진
망토처럼 빛난다.
Mahon(1998:7-8)은 아일랜드에서 쇠고기를 소금에 절인 후 이탄층 속에 묻어 보존하는 방식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버터 저장 방법과 유사했으며, 콘비프가 축제 음식으로 여겨졌다는 점도 언급했다.
게일족 사회에서 소에 대한 존중 문화는 쇠고기 섭취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대신 소를 죽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유제품(우유, 버터, 치즈 등)이 식생활의 중심이었다.
Lucas(1960)는 대부분의 가축이 암소였으며, 수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도축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Sexton(1998:28)은 송아지 출산기에는 게일족 농가에서 송아지고기 소비가 매우 높았을 것으로 보고, 귀족층 식탁용으로 일부 수소가 사육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언급했다.
아일랜드는 연중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기후로 소 사육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다.
Andrews(2010)는 티퍼러리의 한 농부의 말을 인용해 “우리 들판은 너무 비옥해서 자전거조차 살이 찔 정도”라는 농담을 소개했다.
아일랜드 전통 식단은 곡물과 유제품 중심에 돼지고기를 보충하는 형태로 선사 시대부터 거의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으며, 감자가 도입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Mac Con Iomaire & Gallagher, 2009).
영국 여행 작가 Fynes Moryson은 17세기 초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Moryson 1908:vol. 4, 200-201).
“그들은 주로 유제품(Whitemeates)을 먹으며, 그 중에서도 시큼한 커드 치즈를 최고의 별미로 여긴다.
이를 Bonaclabbe라 부른다.
그래서 그들은 소를 신성하게 지키며, 마치 종교와 생명을 지키듯 소를 지키고, 전쟁까지 불사한다.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도, 소가 나이가 들어 젖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으면 도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코 소를 죽이지 않는다.”
Kurlansky(2002:124)는 중세 시대 아일랜드와 프랑스 간의 소금 무역을 언급하며,
이를 통해 아일랜드에서 대규모 콘비프 및 베이컨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한다.
아일랜드 베이컨 산업에 대한 연구는 **Mac Con Iomaire(2003)**의 이전 논문에서 다뤄졌다.
Cattle Acts와 콘비프 산업의 탄생
근세 초기 아일랜드에서는 대량의 살아 있는 소가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영국 옥스퍼드의 보들리안 도서관에 소장된 **Duke of Ormond 문서(MS. Carte 68)**에 따르면,
1663년 6월 24일부터 1664년 6월 24일까지 약 76,754마리의 황소가 아일랜드에서 수출되었다.
또한 1650년대 후반부터 서인도 제도의 열대 사탕수수 농업 성장에 따라 염장 쇠고기(provisions) 수출도 증가했다.
이에 반발한 영국 북부의 축산업자들의 강력한 로비로 **1663년과 1667년 영국 의회는 Cattle Acts(소 수출 금지법)**을 제정했다.
- 1663년 법: 7~12월 동안 영국으로의 소 수출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
- 1667년 법: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의 살아 있는 소 수출 전면 금지
그 결과 도축용 및 수출용 소 가격이 폭락, 염장 쇠고기(콘비프) 생산과 수출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했다(Cullen 1972:13-18).
Mandelblatt(2007:26)에 따르면, 가격 하락은 아일랜드 provisions 무역(식량 공급 산업)에 큰 이익을 안겨주었고,
Truxes(1988:26-7)는 1660~1688년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가 대영제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다고 기록했다.
영국 본토나 런던 항구에서 출항한 다른 제품 중 아일랜드 콘비프의 수출량을 넘어선 품목은 없었다.
소금과 아일랜드 콘비프
염장 쇠고기 생산에서 소금은 결정적 역할을 했고,
아일랜드는 영국과 프랑스보다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졌다.
당시 아일랜드의 소금세율은 영국의 10분의 1 수준으로 매우 낮았다.
아일랜드는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남서부에서 생산된 최상급 건조 백색 소금만을 수입했다.
소금의 품질은 쇠고기의 부위만큼 중요했다.
Mandelblatt(2009:27)는 프랑스 낭트에 거주하던 아일랜드인 M. Carmichael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에 공급할 염장 쇠고기를 만들었지만, 포르투갈산 소금을 구하지 못해 프랑스 Guerande 지역의 열등한 sel de Guérande(게랑드 소금)를 사용했고,
그 결과 대서양 횡단 후 고기가 상해 폐기되는 실패를 겪었다.
아일랜드 provisions 무역과 코크(Cork)의 부상
아메리카 독립전쟁 이전까지 아일랜드의 대서양 무역에서 염장 식품이 핵심이었다(Cullen 1972:103; Truxes 1988:147).
코크(Cork)시는 염장, 포장, 품질 검사 기술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으며,
서인도 제도 시장에 도착할 때까지 제품의 일관성과 고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블린, 벨파스트, 워터포드 등의 항구 도시에서도 염장 쇠고기 산업이 있었지만,
1668년 코크의 연간 염장 쇠고기 선적량(16,960배럴)은 아일랜드 전체 식민지 쇠고기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Mandelblatt 2007:27).
코크산 쇠고기는 다른 항구 도시 제품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고,
뉴욕과 필라델피아에 들어오는 주요 쇠고기 공급원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벨파스트 상인들이 미국 본토 무역에서 영향력을 키우던 상황에서도 코크는 1위 공급지였다(Truxes 1988:154).
대서양 무역의 세 단계
Truxes(1988:24)는 1660년부터 1731년까지 아일랜드의 대서양 무역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 1660~1688년
이 시기는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단작(단일 작물 재배) 식민지 확장기였다.
이 산업은 서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노예 무역 확대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1685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Code Noir(흑인법령)**은
프랑스 식민지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 식량 규정을 명시했다.
이 법령에 따르면 노예 1인당 매주 ‘소금에 절인 고기 2파운드(deux livres de boeuf salé)’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 집행 여부는 학계에서 논쟁이 있다(Mandelblatt 2007:28).
Mintz(1986, 1996)는 유럽의 설탕과 달콤한 음료(차, 커피, 초콜릿)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정치·사회적 영향을 연구했다.
De Saint-Pierre(1773, Mintz 1986 재인용)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의 행복에 필수적인지는 모르지만,
이 두 제품이 세계 두 지역의 불행을 초래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미국은 사탕수수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내쫓았고,
아프리카는 그 경작지를 가꿀 사람을 보내기 위해 사람들을 내쫓았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백인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정착민들이 아일랜드산 염장 쇠고기의 주요 소비자였으며,
노예들에게는 뉴펀들랜드에서 온 염장 생선이 지급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염장 쇠고기를 싣고 카리브해로 향한 선박은
서인도 제도에서 **럼(Rum)**을 적재해 버지니아나 뉴욕으로 운송했으며,
귀항 시에는 **아일랜드 리넨 산업용 아마씨(flax seed)**를 싣고 돌아왔다.
2단계: 1688~1714년
이 시기는 아일랜드 내 정치 혼란과 유럽 전쟁이 겹친 시기였다.
제임스 2세와 윌리엄 3세의 전쟁으로 아일랜드 전역에서 파괴와 혼란이 발생했고,
1689~1697년 영불 전쟁은 해외 무역에 심각한 제약을 가져왔다.
서인도 제도로의 수출을 위해 특별 허가증이 발행되었으나,
**프랑스 사략선(privateers)**이 무역을 방해했다.
또한 **1688년 악성 전염병(distemper)**으로 아일랜드의 소 사육 두수가 급감했고,
서인도 제도 시장으로 재진출하는 데 약 8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는 전쟁 후 2년 만에 수출량을 회복했다.
3단계: 1714~1731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 체결 이후
대서양 무역이 다시 활성화되었지만,
18세기 아일랜드 경제 최악의 침체기가 곧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14~1731년 4년 평균 대비 1728~1731년 4년 평균 대서양 무역량은 평균 40% 이상 증가했다(Truxes 1988:24).
염장 쇠고기 무역 관련 법률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의 값싸고 안정적인 공급은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별도의 법률이 제정될 만큼 중요했다.
프랑스 의회는 식민지로 향하는 자국 선박이 아일랜드 항구에서 쇠고기를 선적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아일랜드산 쇠고기가 라로셸(La Rochelle), 낭트(Nantes), 보르도(Bordeaux) 항구에 하역, 보관, 재선적될 때 세금을 면제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앵글로-아일랜드 지주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 조치를 Cattle Acts(소 수출 금지법)에 따른 새로운 수익 기회로 인식했다(Mandelblatt 2007:26).
영국 역시 자국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아일랜드산 쇠고기를 적극 수입했다.
1760~1770년대에는 아일랜드산 쇠고기의 65~75%가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로 수출되었다(Cullen 1972:53-55).
18세기에는 전쟁이 아일랜드산 쇠고기 수출 증가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전쟁은 주로 해상에서 벌어졌으며, 해군은 두 가지 이유로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를 선호했다.
첫째, 장기간 해상에서 보관이 가능했고,
둘째, 가격 경쟁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점 때문이다.
염장 쇠고기의 등급과 시장
아일랜드에서는 8월 소 도축을 시작으로 염장 쇠고기 시즌이 시작되어, 보통 10월에 종료되었다(Mandelblatt 2007:27).
염장 쇠고기의 기본 등급은 도축된 소의 무게로 구분되었다.
- ‘Small beef’: 가장 낮은 등급으로 체중이 적은 동물에서 나온 고기. 보통 시즌 초기에 도축.
- ‘Cargo beef’ 또는 ‘common mess beef’: 중간 등급.
- ‘Best mess beef’: 가장 무거운 소에서 나온 최고급 고기로, 일반적으로 시즌 말에 도축.
도축된 고기는 8파운드(약 3.6kg) 크기로 절단, 등급별로 분류되어 염장 후 통에 포장되었다.
하위 등급 고기는 목, 정강이(necks, shanks) 등 비인기 부위가 더 많이 포함되었고,
통은 4~5일 동안 숙성된 뒤 통 제조업자(cooper)에 의해 밀봉되었다(Mandelblatt 2007:27; Truxes 1988:151-2).
18세기 중엽 Edward Willes 대법관은 **Earl of Warrick에게 보낸 서한(c.1757-1762)**에서 당시 염장 쇠고기의 등급을 이렇게 설명했다(Sexton, 1998:30).
“나는 수출용 도축 소의 모든 부위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했다.
상인용으로는 목과 기타 거친 부위를 포함해 모두 통에 넣었고,
영국 해군용으로는 목과 거친 부위는 넣지 않았다.
세 번째로 **‘프렌치 비프(French beef)’**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반 정도만 살이 찐 늙은 암소나 소로 평화 시기에 프랑스로 판매했다.
이 고기는 결국 검고 물러져 젤리처럼 되어버렸다.
(이런 고기를 먹던 선원들이 우리 영국 해군(English Tars)의 든든하고 좋은 식사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1689~1691년 **윌리엄 전쟁(Williamite wars)**으로 인해 아일랜드 대서양 무역이 일시 중단되면서,
펜실베이니아, 뉴욕, 버지니아, 메릴랜드 등 북미 식민지가 카리브해에 염장 쇠고기를 공급할 기회를 얻었다.
이로 인해 17세기 중반 이후 아일랜드가 독점해 온 염장 쇠고기 시장에 균열이 생겼다(Truxes 1988:26-7).
1800년 무렵, 영국이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 및 돼지고기 제품의 주요 시장이 되었다.
이는 영국 해군(Royal Navy) 보급 때문이기도 했지만, 1780년대 이후 서인도 시장이 북미산 식량을 더 많이 구매한 영향도 있었다(Cullen 1972:103).
쇠고기 수출 감소는 계속되어 1815년에는 1770년 최고치 대비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1840년대에는 아일랜드 외 지역으로의 돼지고기와 쇠고기 수출이 1780년 수준의 3% 미만으로 떨어졌다.
19세기 중반 이후 아일랜드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식품이 아니라 아일랜드 사람들(이민)**이었다(Ó Gráda, 2000).
이민
아일랜드의 첫 번째 대규모 미국 이민은 1600년대 미국 식민지 개척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주로 젊은 가톨릭 남성 약 10만 명이 미국에 도착했다.
Moloney(2002:6)에 따르면, 아일랜드어에는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나는 개념의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 고향을 떠나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는 오직 **‘deoraí(추방, 유배)’**였다.
두 번째 이민 물결은 **‘스코치-아이리시(Scotch-Irish)’**로 알려진 집단으로,
1710년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펜실베이니아에서 조지아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저지대 출신 개신교 농민들의 후손으로, 아일랜드에 머문 기간은 몇 세대에 불과했다.
이들 중 다수는 산업혁명으로 리넨 시장이 붕괴되고,
미국에서 저렴한 면직물이 대량 수입되면서 식민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민 물결은 1845~1849년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 시기와 그 직후에 발생했다.
이 시기에 10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수만 명이 ‘관짝선(coffin ships)’으로 불린 열악한 이민선에서 목숨을 잃었다.
Moloney(2002:14)는 이 시기의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도시 산업 기반 속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한 민족 이민 집단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미국 사회의 반(反)아일랜드 편견 속에서 도착했지만,
몇 세대 안에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Ancient Order of Hibernians와 같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단체들과 사업가들은
신진 정치인들이 Tammany Hall 등 민주당 세력 내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뉴욕에서 열린 최초의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퍼레이드는 1762년 영국군 소속 아일랜드 병사들이 개최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는 훨씬 더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로 발전했다.
아마도 이 시기의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분위기가 링컨 대통령이 1861년 3월 4일 취임 만찬에서 콘비프, 양배추, 파슬리 감자를 식사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일랜드인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20세기 초 미국에서 아일랜드계와 다른 민족 집단 간의 관계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유머러스한 노래들이 존재한다.
특히 아일랜드계와 유대인이 함께 등장하는 노래들이 많다.
예를 들어 1910년 ‘It’s tough when Izzy Rosenstein Loves Genevieve Malone’,
1911년 ‘My Yiddish Colleen’,
그리고 **1912년 Jerome과 Schwartz가 작곡한 ‘If it Wasn’t for the Irish and the Jews’**가 있다.
노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Maloney 2002:37).
“이 조합을 이야기하자면, 내 말을 들어봐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에는 Rosinsky가 외투에 샴록을 꽂지
Bloom 가문과 MacAdoo 가문 사이엔 특별한 유대감이 있어
왜냐면 아일랜드인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Tammany Hall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이러한 민족 간 협력 관계는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미국 도시의 유대인 정육점에서 콘비프를 구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콘비프가 베이컨보다 인기를 얻은 더 현실적인 이유는,
아일랜드에서는 고급 식재료였던 콘비프가 미국에서는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Andrews(2010)는 당시 미국 도시의 독일계 정육점에서 베이컨도 유사하게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비프가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와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콘비프가 ‘아일랜드 음식’으로 인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아일랜드의 콘비프
아일랜드에서는 콘비프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
염장 쇠고기(salt beef), 피클 쇠고기(pickled beef), 숙성 쇠고기(hung beef), Pocoke beef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염장 과정에 향신료를 추가해 만든 스파이스드 비프(spiced beef)**도 있는데,
이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인기가 많다.
아일랜드 국립도서관의 고문서들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817년 Annaghmore의 O’Hara 가문 문서(MS 36,375/1/2/3)**에서는
**크리스마스 비프(Christmas Beef)**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염장과 향신료 가공이 함께 이뤄진 고기로 추정된다.
콘비프와 스파이스드 비프는 두 가지 용도로 모두 적합하다.
- 뜨겁게 요리해서 식사로 제공하거나
- 축제 시즌 방문객을 위한 차림, 또는 소풍 음식으로 차갑게 제공할 수 있다.
1953년의 **Headfort 가문 문서(MS 25,370)**에는
Navan Show로 가는 소풍 도시락 메뉴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Cashman, 2009:54).
“샌드위치, 양고기, 콘비프, 겨자, 삶은 달걀, 토마토, 상추, 과일 치즈, 비스킷, 커피.”
콘비프 소비에는 지역적·사회경제적 차이도 있었다.
Daniel Corkery는 **『The Hidden Ireland』**에서
18세기 귀족 가문에서는 도축 후 대형 돌 통에서 자체적으로 소고기를 절여 보관하는 관습이 일반적이었다고 기록했다.
예를 들어, Martin 가문은 매달 황소 한 마리를 도축했다고 전한다(Cowan & Sexton, 1997:29).
Cullen(1981)에 따르면,
당시 아일랜드 국민이 소비한 대부분의 쇠고기는 염장 쇠고기였고,
생쇠고기는 모든 계층에서 매우 드물고 고급스러운 별미였다.
실제로 1829년 12월 27일, Amhlaoibh Ó Súilleabháin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de Bhaldraithe 1970:61).
“콘비프와 흰 양배추, 침에 구운 거위와 빵 소, 순무와 함께한 양다리, 베이컨과 닭고기, 구운 멧도요(snipe)를 먹고,
따뜻한 포트 와인과 위스키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1829년 10월 19일에는 Michael Hickey의 집에서 **“mairtfheoil méithe agus caoirfheoil cumhra(육즙 가득한 쇠고기와 향기로운 양고기)”**를
마을 신부와 함께 식사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831년 3월 15일에는 자신의 집에서 소고기 부위 5점, 황소 혀 6개, 대형 돼지 반 마리를 숙성용으로 걸어두었다고 남겼다.
이는 아마도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정육업자들의 기억
Tannahill(1975:64)에 따르면, 대형 가축의 도축은 소비할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더 흔히 이루어졌다.
아일랜드 정육업 협회(Associated Craft Butchers of Ireland) 소속 Dave Lang 개발담당관은,
더블린과 코크 같은 일부 지역은 북부 지역에 비해 콘비프 소비량이 더 많았다고 설명한다.
북부 지방 사람들은 콘비프를 거의 모르거나 전혀 먹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그는 40년 전 더블린 무어 스트리트(Moore Street)의 Buckley’s 정육점에서 견습 정육사로 일할 당시,
일주일에 tail end(소 엉덩이 부위) 56개를 콘비프용으로 절였다고 회상한다(전화 인터뷰, 2010년 4월 27일).
당시에는 고기 손질 방법도 달랐다.
현재는 따로 분리(seam butchered)되는 topside와 silverside가 포함된 tail end를 일자로 잘라 사용했다.
아일랜드 도시 중에서도 코크(Cork)는 콘비프와 오랜 지역적 연관성을 가진 곳이다.
Paul Murphy는 코크 English Market의 P. Coughlan Family Butchers 4대째 정육업자로,
매주 300파운드(약 136kg)의 뼈 없는 콘비프, silverside, topside를 판매한다고 말한다.
그는 **뼈가 있거나 없는 콘브리스킷(corned brisket)**도 판매한다.
과거에는 두꺼운 지방(약 10cm 두께)이 붙은 뼈 있는 브리스킷을 판매했지만 한동안 중단했고,
최근에는 “노인 고객들이 모두 그 고기를 찾기 때문에 다시 판매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술 한잔 후 두꺼운 브리스킷 지방을 빵에 올려 먹곤 했고,
98세까지 장수했으며 ‘콜레스테롤 약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
브리스킷은 tail end보다 가격이 저렴하지만 더 긴 조리 시간이 필요하다.
Murphy는 새 고객에게 “기름기가 전혀 없는 lean lean lean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기름진 걸 좋아하는지”를 먼저 물어본다.
살코기를 원하면 silverside, **기름진 걸 원하면 브리스킷(뼈를 발라 스위스롤처럼 말아 판매)**을 추천한다.
그는 스파이스드 비프는 평소 소량만 판매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 10일 동안 약 2,000파운드(약 907kg)를 판매한다고 밝혔다.
또한 과거에는 닭고기가 특별한 식사용으로만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사전에 분할 판매되고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음을 언급하며
식습관 변화가 쇠고기 판매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전화 인터뷰, 2010년 4월 27일).
P. Coughlan Family Butchers의 콘비프는 English Market 2층 Kay Harte의 Farmgate Café에서 시그니처 요리로 제공되며,
감자, 양배추, 파슬리 소스와 함께 서빙된다.
소비자들의 기억
Margaret Byrne은 1930~40년대 더블린에서 성장하며,
콘비프와 베이컨을 양배추, 감자와 함께 정기적으로 식탁에 올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지역 정육점 대신 슈퍼마켓에서 고기를 사기 시작하면서 콘비프 소비가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주로 silverside를 사용했으며, 조리 중 고기 덩어리가 생각보다 많이 줄어드는 것에 실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개인 서신, 2010년 4월 21일).
Fergal Quinn은 1960년 던독(Dundalk)과 핑글라스(Finglas)에 Superquinn 슈퍼마켓 체인을 개점했다.
그는 개점 초기 콘비프가 매우 잘 팔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 점유율이 감소했다고 회상했다(개인 서신, 2010년 4월 26일).
Tony Byrne(더블린 Rathgar 지역의 정육사)은,
자신의 고객들 중 많은 이들이 과거에는 ‘주 1회’ 콘비프를 정기적으로 식사로 즐겼지만,
현재는 베이컨이 훨씬 더 인기 있는 선택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베이컨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Liam Mac Con Iomaire는 1930~40년대 서부 골웨이에서 성장했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는 콘비프를 먹은 경험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당시 주요 육류는 베이컨, 양고기 또는 노령양고기(mutton), 가금류, 생선이었으며,
가축인 소는 집에서 도축하지 않고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는 더블린으로 이주해 결혼한 후에야 콘비프를 정기적으로 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개인 서신, 2010년 4월 21일).
콘비프 만들기
Eliza Acton은 **『The Peoples Cookery Book』 (34판, 약 1902년)**에서
‘Hamburgh Pickle’, ‘Hung Beef’, ‘Collared Beef’, ‘Spiced Beef’ 등
다양한 쇠고기 염장·절임 방법을 소개했다.
이들 모든 레시피의 공통점은 소금, 초석(saltpetre), 설탕, 다양한 향신료의 조합이라는 점이다.
McGee(1988:103)는 소금이 수천 년 동안 미생물 증식을 억제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특히 냉장 보관이 불가능했던 시절에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corned beef’라는 영어 표현이 소금 알갱이(corns)에서 유래했으며,
16~17세기부터 초석(saltpetre, 질산염)이 보존 과정에 첨가되었다고 덧붙였다.
앞서 언급한 코크(Cork)의 정육사 Paul Murphy는
가족 사업에서 이미 오래전에 saltpetre 사용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어린 시절 약국에서 콘비프 제조용 saltpetre를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는 또 어느 날 두 명의 소년이 saltpetre를 사러 갔다가 폭발물 제조 의심으로 경찰에 구금되었다는 일화도 전했다.
Saltpetre는 고기의 색소를 변화시켜 붉은 색을 띠게 했지만,
현재 Murphy는 굵은 소금으로 만든 염수(brine)에 약간의 착색제를 추가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소비자들은 심리적으로 콘비프가 붉은빛을 띠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saltpetre가 고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지만,
현재 자신의 콘비프는 예전만큼 짜지 않아서
손님들에게 별도의 담금(염도 제거) 과정이 필요 없다고 안내한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냉장이 보편화되지 않아 훨씬 더 짰다고 한다.
오늘날의 콘비프는 염수를 고기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제조된다.
보통 피클 건 또는 펌프를 사용해 염수를 주입한다.
요약 및 결론
아일랜드에서 소는 고대부터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서기 500~1200년 중세 초기에는 쇠고기 소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법률 및 기타 문헌 자료에서는 귀족층과 축제 행사에서 신선한 쇠고기와 염장 쇠고기 모두가 섭취되었다는 증거가 확인된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접어들며 아일랜드 전통 게일 사회가 붕괴되었고,
소는 영국 시장으로 수출되는 경제적 상품이 되었다.
영국인의 설탕, 차 소비 증가는 대외 팽창과 식민지 정복 시대와 함께 진행되었다(Mintz, 1996:19).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확대와 함께,
1663년·1667년 Cattle Acts가 시행되었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 항구 도시들, 특히 코크(Cork)에서 상업용 콘비프 산업이 발전했다.
코크는 약 200년 동안 번영했다.
아일랜드 콘비프는 등급별로 영국 해군의 주요 식량이 되었고,
프랑스 역시 이를 자국 식민지로 수출했다.
18세기 말 북미(미국 본토)의 경쟁으로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의 대서양 무역이 점차 쇠퇴했다.
영국 해군이 태평양 섬에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를 공급하면서
이 고기는 ‘keg’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나중에는 선원들 사이에서 **질 낮은 모방품 ‘salt junk’**로 불렸다.
19세기 후반 남미(우루과이 등)에 쇠고기 가공공장이 설립되면서
영국 시장에는 **캔에 담긴 ‘bully beef(콘비프)’**가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이로 인해 코크와 아일랜드의 전통 염장 쇠고기 명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 캔 콘비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용 식량으로 널리 배급되었고,
그 결과 전 세계 식문화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전쟁이 식생활 변화와 식품 기술 혁신 가속화의 주요 계기였음도 함께 논의되었다.
『Larousse Gastronomique』 백과사전에서는 콘비프를 미국식 캔 제품으로만 소개하며,
원래의 아일랜드 염장 쇠고기 전통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연구는 아일랜드에서 콘비프가 본래 귀족들의 음식이며,
특히 크리스마스, 부활절,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등의 축제 음식이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이에서 콘비프가 널리 퍼진 가장 큰 이유는
흔히 주장되는 베이컨 부족 때문이 아니라,
미국에서는 아일랜드보다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당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었고,
그 일환으로 고향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었던 식재료(콘비프)를 소비하려 했다.
또한 콘비프가 오랫동안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와 연관되어 왔다는 사실이,
미국에서 ‘아일랜드 음식=콘비프, 양배추, 감자’라는 고정관념을 낳게 했다.
이 논문은 소비자, 식품공학자, 연구셰프, 외식업 창업가, 요리예술 교육자, 요리학생 및 과학자 등 모든 식문화 관계자들에게
식문화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큰 가치를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속담처럼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처럼,
현재와 과거 우리의 식생활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형성해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식품 기술과 소비 행태는 미래 세대의 식문화 역사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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