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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마케터 김태경박사 칼럼

현방과 저육전

by Meat marketer 2025.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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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소. 돼지, 닭, 계란 전문점 따로 있어

 

조선 시대에는 한양의 성균관 노비들에게 소를 도살해 판매하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곳이 ‘현방(懸房)’이다.

성균관 노비들은 문묘를 지키는 관원들의 사환으로 입역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소의 도살 판매권을 얻었다. 성균관 노비들은 이러한 특권의 대가로 현방속(懸房贖)을 지불해야 했다.

조선 시대에는 소의 도살을 ‘사도(私屠)’라고 해 금지했기 때문에 현방은 큰 특권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48곳에 현방이 있었는데 이후 적을 때는 10곳, 많을 때는 24곳까지 있었다.

현방의 경쟁자로는 제사용 육포를 만들기 위해 소를 잡았던 봉상시공인(奉常寺貢人), 소가죽으로 수공업을 하던 공조우피공인(工曹牛皮貢人), 가장 강력한 경쟁자 저육전(猪肉廛)이 있었다.

원래 현방은 우육(牛肉ㆍ쇠고기)을 판매하고 저육전은 저육(猪肉ㆍ돼지고기)을 판매해 판매품종이 달라 서로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저육전의 번성은 현방의 우육 판로를 침해해 현방의 영업에 큰 타격이 됐다.

이 때문에 현방은 저육전의 번성을 억제하려고 했다. 숙종 38년 현방이 본래 48좌였다가 21좌로 줄었는데 저육전은 시안(市案)에 등록된 것이 6~7좌에 불과했지만 점점 번성해 거의 70~80좌에 이르게 돼 현방과 경쟁이 심해졌다.

당시 대사성 민진원(大司成 閔鎭遠)은 “현방은 처음에 비해 반감되고 저육전은 10배나 증가함이 시정상(市政上) 허용될 수 없다”며 “저육전은 시안에 등록된 곳 이외에는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축·골발·판매가 다 함께 이뤄지는 형태였다. 그래서 한양에서의 소 도축·골발·판매는 현방에서 전문적으로 이뤄지고, 돼지는 저육전이라는 돼지 전문점에서 다뤄졌다.

지금은 정육점에서 소와 돼지를 함께 취급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소(현방), 돼지(저육전), 닭(계전), 계란(계란전)이 다 따로 전문점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돼지 전문점인 저육전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초기에 계전, 계란전이 한 곳뿐이고 돼지를 취급하던 저육전도 숫자가 적었던 것은 당시에는 이들의 유통이 자급 자족 형태로 이뤄졌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집에서 닭을 키워서 계란을 얻고 ?중에 그 키우던 닭을 잡아먹는 형태였을 것이다.

[18세기 들어 돼지고기 소비 늘어]

 

숙종 38년이면 1712년이다. 당시 한양에 돼지고기를 취급하는 저육전이 많아진 것은 시골에서 주로 먹었던 돼지고기가 도시인 한양에서도 급격히 소비되기 시작한 때문으로 추측된다.

조선 초기 도시에서 키워진 돼지고기 가격은 쇠고기 가격보다 매우 비쌌다. 그래서 조선 초기 한양에서는 쇠고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현방이 많았다.

18세기 들어 한양에 저육전이 늘어나고 돼지고기 소비가 확대됐다면 어느 정도 돼지고기 가격이 쇠고기 가격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떨어졌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아니면 18세기 한양의 급격한 발전으로 유입 인구가 늘어나 주막이 많아지면서 술안주로 돼지고기 수요가 늘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소는 사육기간이 길어 급격히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을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늘어나는 육류 수요를 돼지고기로 대체하게 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김치에 고추를 넣은 것이 1700년대부터였다고 하니 돼지고기의 소비 확대는 고추가 일상적으로 요리에 사용된 시기와 함께 확대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늘어나는 저육전으로 인해 돼지고기 소비가 늘어나서 쇠고기 장사를 하던 현방에 큰 위협이 됐다. 영조 즉위년(英祖 卽位年) 좌상 이광좌도 현방이 저육전의 많은 출현으로 갑자기 손해를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를 미루어 보아 현방은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시대는 여러 면에서 양반의 고기와 서민의 고기가 차별돼 있었다. 서민들은 평생 쇠고기 한 점 맛보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고기하면 쇠고기를 말하는 건 이런 유교적 신분 개념과 많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조선 시대에 육류를 축종별로 전문적으로 취급했던 현방과 저육전의 역사에 관해서 더욱더 관심을 갖고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 화우의 개량에 조선소들이 이용됐던 19세기 일본 문헌 자료들을 찾아야 한다. 불고기의 인문학적 연구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활발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반성을 해 봐야 할 때다.

이제는 세계사에서 쇠고기를 가장 심미하면서 먹은 민족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 그리고 한우는 동아시아 끝 한반도에 고립돼 한우 특유의 맛을 보존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쇠고기라는 걸 인문학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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